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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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감사 포인트가 들어옵니다.]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아, 이게 원거리도 되네?
조수석에 앉아 새로 뜬 시스템 창을 슥슥 밀었다. 아마 두 분께서 내 선물을 확인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져주신 덕분이리라.
마음씨 좋은 분들 같으니라구.
본인들이 해준 만큼 돌려받았을 뿐인데 뭘 또 새삼스럽게 감사를 해주시다니요……. 사실 조금 예상은 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땡큐!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 내내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기분이 좋으니까 쓸쓸해 보이기만 했던 풍경이 조금은 평화로워 보였다.
“아, 기분 좋다.”
남한테 베풀었는데 내 배가 부른 이 느낌!
근데 생명력 게이지가 늘어나면 뭐가 좋은 거지. 막 총 맞아도 안 죽게 되는 거 아냐?
“흐흐흐흐.”
불사신이라 이건가? 히히.
“뭔데. 왜 혼자 히죽거리는데 무섭게.”
“베풂에 감사를 모르는 인간에게 답해줄 말은 없거든요?”
그러자 내 쪽을 힐긋 본 데일이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답은 필요 없으니까 그렇게 웃지 마. 등줄기에 소름 돋는다. 솜털이 곤두서려 한다고.”
뭐래 진짜. 이 자식이 운전 좀 오래 했다고 심심한가.
“몸에 근육도 많더만, 근육한테 솜털 못 일어나게 꽉 잡으라고 해요. 웃는 것도 뭐라고 하고 난리야.”
“……흐음.”
여전히 핸들에 한 손만 올려두고 게으르게 운전하던 데일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상승했다.
“안 보는 척하더니 남의 몸을 다 봤나 보네. 정말 엉큼해 살 수가 없구만.”
“…….”
그가 남은 한 팔로 제 몸을 껴안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근육 때문에 저 자세 불편할 텐데 기어코 하네 저걸……. 그리고 눈이 달려 있는데 어떻게 안 봐.
굳이 부정은 안 했다.
좋은 몸, 좋은 얼굴!
차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남자의 순백색 머리칼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다.
부정하지 않는 대신 나는 말을 돌렸다.
“그거 알아요?”
“뭘.”
“세바스찬 할아버지한테 정중하게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좀 의외였어요.”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한 개 치만큼 멋있어 보였달까.
“아~ 너는 길바닥에 버리고 싶어 했는데 왜 그 영감한텐 같이 가자고 말했는지 그게 궁금한 거야?”
“아니, 말을 꼭 그렇게…….”
“사격 솜씨가 훌륭하잖아. 도움이 됐을 거라고 분명.”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얼얼한 표정으로 데일을 쳐다봤다.
“그래서였어요?”
“그럼, 뭐.”
아 됐다. 눈송이 한 개 치만큼 멋있다고 한 거 취소다. 그리고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려던 것도 역시 취소다.
“아…… 설마.”
“…….”
“지금 얘가 삐진 건가?”
순간 앞을 보고 운전하던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확 기울였다. 급격하게 가까워진 파란 눈동자가 내 눈코입을 끈덕지게 훑어내렸다.
“앞이나 봐요. 운전 중에…….”
“너 설마 내가 아직도 널 버리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
“그럴 리가. 난 너 사랑하는데?”
“사…….”
사라앙?
난데없이 튀어나온 의외의 단어에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자, 데일이 만족스러운 듯이 히죽 웃었다. 가볍게 휘는 눈 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바깥 하늘보다도 더 새파랬다.
“뭔 사랑…….”
“그땐 몰랐지만 넌 황금알을 낳는 거위잖아.”
“…….”
“거위보다 더 좋지. 황금알보다 좋은 통조림을 낳잖아, 넌. 짐덩이라고만 생각했던 게 복덩인 줄 내가 알았겠어?”
“그러니까…….”
묘하게 점점 기분이 나빠진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길바닥에 버리겠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협박할 때보다 저렇게 여겨주는 게 나은 것도 같은데.
왜 이렇게 짜증이 치밀지.
굳어가는 내 표정을 몰라서 그러는지 알아서 그러는지 데일은 아랑곳 않고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랑한다. 내 통조림 생산기.”
“…….”
“그러니까 삐지지 마라.”
“…….”
“뭐야. 아직도 얼굴이 안 좋네? 아, 말로만 하는 사랑은 신뢰가 안 가나? 말만 해. 언제든 사랑해 줄 준비는 돼 있으니까. 난 차에서도 괜찮아. 좀 춥긴 하겠지만 금방 더워질…….”
“으아아아아아아!!!”
짜증 나.
“안 닥치면 뛰어내린다?”
놈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뛰어내리려는 사람처럼 차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 문 손잡이를 쥔 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려는 순간.
“으겍.”
놈이 내 패딩 뒷덜미를 낚아채 잡아당기는 바람에, 멱살 부분의 옷깃이 목젖을 눌렀다.
얌전히 다시 조수석으로 끌려온 나는 졸린 목을 감싸 쥐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급정거했다.
“켁켁.”
“돌았어? 차 달리는데 뛰어내려?”
졸린 목을 감싸 쥔 채 데일을 노려봤다.
“그쪽이 하도 헛소리를 지껄이니까 눈에 얼굴 좀 처박고 열 식히려고 그랬어요.”
“어~ 그랬어?”
말의 끝음이 굴러가는 데서 남자의 화난 기색이 느껴졌다.
눈길이라 차가 느리게 가고 있기도 했고, 그냥 보여주기식 행동이었는데 그래도 역시 좀 과했나?
혼자 찔려서 곁눈질하자, 아니나 다를까 데일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선 눈만 웃고 있었다.
“왜 눈에 얼굴을 처박아. 더워? 식히려면 벗으면 되는데. 또 열 받으면 말해. 저번처럼 겉옷, 아니 입은 옷 싹 다 벗겨서 차 문 밖으로 던져줄 테니까.”
“그건 추행…….”
“…….”
안 그래도 허연 놈이 잘 빚어놓은 석상처럼 눈만 웃고 있으니 더 무섭다. 여기서 더 나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때론 비굴이 현명이다.
“잘 이해했다는 얼굴이네.”
“…….”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데일이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리더니 빙긋 따라 웃었다.
크고 묵직한 손이 정수리를 가볍게 두어 번 툭툭 치는가 싶더니.
“으윽…… 또 그러면 머리를 부수겠다는 협박인가요?”
악력이 엄청난 다섯 손가락으로 정수리를 부술 듯이 누르는 것이다.
“아니, 사랑의 두피 마사지야. 열 내리라고.”
“덕분에 벌써 차게 식어버렸네요.”
“다행이네. 그럼 다시 갈까?”
잘생긴 놈이 저렇게 웃으니까 더 소름 끼친다. 데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나는 조금 눈치를 보다 생각난 걸 질문했다.
“근데 일행을 따라잡아야 한다면서 교도소를 들렀다 가도 돼요?”
“일행은 무리 지어 움직이니까 둘뿐인 우리보다 느려. 어차피 교도소가 가는 길에 있기도 하고. 너무 늦장 부리지만 않으면 문제 될 건 없어.”
“음.”
플로라 할머니네 집이 있던 마을 로사를 떠나며, 우리는 노선을 약간 수정했다.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말했던 근처 교도소를 들르기로 한 것이다.
마을을 떠나기 전날 밤, 할아버지는 나와 데일의 손에 작은 열쇠를 하나 쥐여주었다. 제국 산하 교도소에서 일하던 친구가 할아버지에게 남기고 간 것이라 했다.
“안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더니 이걸 주고 가더군요. 교도소장실 열쇠라고 했었나……. 무슨 방을 여는 열쇠라고 했는데, 교도소를 운영하던 이들이 급하게 피난 가느라 이것저것 물건을 많이 두고 간 모양입니다. 물론 풀려나온 죄수들이 식량이나 생필품은 이미 다 쓸어갔겠지만, 여긴 내내 잠겨 있었을 테니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친구 말로는 ‘마나핵’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주고 간 물건인데, 저와 플로라가 찾으러 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 마나핵이란 단어를 들은 데일은 눈을 빛냈었다.
“마나핵이란 게 그렇게나 유용한 물건이에요?”
“전에 내 설명 기억해?”
“이미 만들어진 물건에 깃든 마법을 제외하고는 모든 마법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요?”
“응. 마나핵도 그런 물건이랑 비슷한데, 일종의 에너지 덩어리라고 보면 돼.”
마나핵. 그것은 모든 에너지를 대체하는 에너지 구였다.
혹 자가 발전기가 없는 곳이라면 전기를 쓰기가 어려울 텐데, 마나핵 하나만 손에 들고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일반 교도소에 있을 법한 물건은 아니라 의심스럽긴 한데, 찾아봐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렇구나.”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데일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하고, 하루라도 빨리 낙원을 찾고 싶은데…….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어쩔 수 없지.
‘퀘스트 창 열어봐.’
속으로 읊조리자 닫혀 있던 메인 퀘스트 상태창이 허공에 떴다.
[메인 퀘스트 명: 최후의 낙원을 찾아서.]
[첫 번째 메인 퀘스트: 최후의 낙원을 찾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여정을 위한 새로운 일행을 합류시키세요. (0/1)]
[보상에 대한 부가 정보: 기준치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일행일 경우 히든 보상이 있습니다.]
퀘스트 달성 요구 수치는 일행 단 한 명. 데일의 일행에 합류만 한다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완료될 퀘스트다.
히든 보상을 위한 추가 조건이 있지만, 군인 출신인 데일의 일행이라면 평균 이상의 전투력을 보유한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이상은 있지 않을까. 같은 군인 출신이라거나.
그래서 더 조바심이 나긴 하지만…… 교도소를 빨리 수색하는 수밖에.
“데일.”
“…….”
“혹시 일행 중에 까만 머리 있어요? 까만 머리에 누가 봐도 되게 잘생겼다 싶은 남자요. 눈동자는 아마 붉은색이나 흑색일 거고.”
“??”
마지막에 최후의 낙원 가장 가까이에 도달하는 사람은 여주랑 함께 있던 진남주다. 다른 세 남주도 근처까지 가지만 역시 가장 가까이 가는 사람은 진남주…….
데일도 최후의 낙원을 언급한 걸로 봐서 이것저것 아는 눈치긴 한데, 그건 다른 남주들도 공통일 거고.
원작에선 어차피 다 못 찾잖아?
그럼 가장 가까이 가기라도 하는 진남주한테 붙어야 내가 최후의 낙원을 찾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간단 소린데.
‘아무래도 K-로판 진남주라고 하면 흑발 흑안이나 흑발 적안이 클래식 아니냐고.’
로판 작가가 마이너 취향을 저격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분명 흑발을 진남주로 썼을 거라는 생각이 날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