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심장이 멎을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나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놈은 긴 쇠막대기로 계단을 긁어 2층으로 올라가는 척을 했던 거였다.
눈처럼 새하얀 은발을 가진 남자였다. 커다란 키와 덩치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꼭 사람이 아니라 야수 같았다.
덕분에 눈높이가 한참이나 높아서 나는 고개를 완전히 뒤로 꺾어 올려다봐야만 했다.
투명한 고글 너머 남자의 시선이 내게 매섭게 꽂혔다.
[타인과 마주쳤습니다. 위협 감지 중…….]
[감지 완료: 위협 수준 〘중〙]
이게 튜토리얼이 말한 위협 감지인가?
놈의 머리 위에 뜬 시스템 창을 빠르게 읽었다. 주황색 글씨로 쓰인 위협 정도는 중이란다.
집 밖에서 쌩쌩 이는 바람 소리가 들릴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꿀꺽하고 내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그와 나 사이를 갈랐다.
이놈이 들어온 후로 다른 놈이 따라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던가?
아니, 그렇다면 지금 이놈은 혼자다.
‘좋아, 그렇다면…….’
내 얼굴에 꽂혔던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며 내 몸을 훑어볼 때였다.
이때다!
-탕.
내가 장렬히 휘두른 프라이팬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놈이 든 쇠막대기를 짜부라트렸다.
“너 뭐야.”
남자가 놀란 얼굴로 짜부라진 쇠막대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내 목엔 어느새 시퍼런 날붙이가 닿아 있었다.
‘아, XX.’
난생처음 느껴보는 목에 칼이 닿는 경험에 그만 프라이팬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망했군. 이제 내 미래는 잿빛 확정이네.
칼날이 목에 붙어 있는 탓에 반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일단 설설 기자. 방심해서 칼을 쥔 손이 느슨해질 때까지.’
“계획은 용감했어.”
바닥에 떨어진 프라이팬을 보며 그가 씩 미소 지었다.
“실패해서 그렇지.”
참으로 같잖다는 웃음이었다.
“사, 살려…… 주세요.”
“…….”
“그래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프라이팬을 보며 지었던 미소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는 말없이, 한참을 무표정한 얼굴로 날 훑어보았다.
날 내려보느라 살짝 고개를 기울였을 때,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남자의 콧등에 가로로 난 얇은 흉터가 보였다.
“해괴한 옷차림이군.”
내 아가일 니트랑 코듀로이 바지가 어때서. 너야말로 집에서 나올 때 거울은 본 거야?
그도 그럴 게 남자의 의상은, 로판 남주들이 입고 나올 법한 제복 같기도 하고 요원복 같기도 했다.
허벅지에 저 가죽 벨트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제발 살…….”
한 번 더 살려달라 말하려던 내 입술이 콱 다물렸다. 턱 아래 닿아 있던 날붙이가 슬금슬금 아래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쇄골 근처까지 내려온 단검의 칼날이, 니트의 목 부분을 들춰 올렸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 단검, 칼날이 얼마나 예리한지,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인데 니트의 목 부분이 그대로 베어져 나갔다.
이 새끼 내 니트를 오프숄더로 만들려는 생각인가.
앞에 선 상대가 두려움에 몸을 떨건 말건, 놈의 온 신경은 내 옷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상대의 감정이 어떻든 제 관심사 외에는 별 감흥 없는 게 사이코들 특징이잖아?’
살려달라고 애원해 봤자 저 사이코 새끼를 더 즐겁게 만들 뿐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때, 남자의 입에서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 초면인데 내 첫인상 어때.”
“첫인상? 당신이 왜 그딴 쓸데없는 질문을 지금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차피 내 결말은 이제 하나뿐 아닌가.
저 자식의 비위를 맞추다 죽느냐, 비위를 거스르다 죽느냐.
그렇다면 적어도 전자는 아니지.
“얼굴에 흉터가 아주 X 같아.”
나는 조용히 나무밀대를 꽂아둔 허리 뒤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부엌에서 프라이팬만 챙긴 게 아니라고.
‘아깐 빗맞아서 쇠막대기였지만, 이번엔 널 뭉개주마.’
손에 쥔 나무밀대를 빼내 후려치려는 순간. 남자가 흉터가 난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그럽게도 다시 대답할 기회를 주지.”
두 번째 기회와 함께 니트의 목 부분을 베어낸 칼날이 다시 턱 아래에 와 붙었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서슬 퍼런 칼날의 온도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기회를 주려는 것 같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날 죽일 수 있을 텐데, 묘하게 상대가 행위를 망설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그래 주면 고맙다.
‘고분고분 대답하는 척하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내자.’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고는 앞의 놈 하난데, 밀대로 후려치기 전에 이곳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고 싶었다.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야박하지 않은 남성의 이미지?”
“하.”
헛웃음을 흘리긴 했지만, 완벽히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턱 아래 칼날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될 수 있으면 길게 대답해. 널 살릴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니까. 길게 고민해야 살려준다는 결론이 날 확률이 올라가지 않겠어?”
“지금은 살려준다가 몇 퍼센트인데요?”
“음…… 5퍼센트?”
“…….”
그걸 지금 있다고 말한 거냐?
나는 개똥같이 적은 확률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놈은 후하게 덤까지 얹어준 인심 좋은 사장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5퍼센트라…….
“5퍼센트면 너무 적은데, 100퍼센트가 되려면 한참 남았잖아요.”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떠들어 봐, 늘어나게.”
“…….”
“말 안 하면 점점 줄어든다. 5, 4, 3…….”
“아, 잠깐! 잠깐만!”
“…….”
“날 죽이고 싶은 마음이 95퍼센트라는 거잖아요. 어차피 죽일 거면 사람 희망 고문도 정도껏 해요.”
그 순간 살짝, 내 목에 닿은 칼날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널 죽이고 싶다가 아니라, 정확히는 널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95퍼센트 정도지.”
죽여야만 하는 이유?
“살인범이 살인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남자가 틀렸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돈?”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흥이 깨져 버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돈? 이런 세상에서 아직도 돈이 가치가 있나? 금화를 한 무더기 줘도 통조림 한 캔 못 구할 텐데.”
‘금화를 줘도 통조림을 못 구하는 세계관이면, 아포칼립스 배경인가.’
뭐든 정보가 더 필요했다.
남자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
“금화? 금화가 뭐예요? 신종 비트코인인가? 아…… 떨어졌구나, 그래서?”
남자는 중얼대는 나를 보며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제 볼을 긁적였다.
“너 어디 출신이야.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말을 지껄이는군.”
“서울이요.”
“서? 어디?”
서울을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을 보아하니 현판 생존물은 아닌 거 같고, 금화가 있다면 로판 같은데.
남자에게 질문했다.
“여기 어느 나라예요?”
“이봐, 너 내 묻는 말에…….”
“여기가 어디냐구요.”
심각한 내 얼굴을 마주 보던 그가 비어 있던 한 손을 허리에 올렸다.
“정말 어디 땅속에 파묻혀 있다가 온 모양이네.”
“…….”
“이제 나라라는 건 없어. 환영해, 종말 후의 세계에 온 걸.”
“???”
‘제발 저 대사가 시답잖은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주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놈의 말은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종말 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이고, 로판일 확률이 높고 밖의 날씨는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잠깐만, 얼어붙? 설마 여긴 얼죽아?
너무 황당한 나머지 내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이라는 것마저 잊었을 때였다.
“저기요.”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쉿.”
“…….”
그가 진중한 눈빛으로 제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란 의미였다.
문이 열린 현관 쪽에서 세 명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보았던 이 남자의 동료들일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얌전히 이 남자의 말을 따라야 하나? 하지만 난 낯선 사람이고 저들은 제 동료들인데…….
“어디로 숨은 거지?”
“도망가봤자 이 근처겠지, 찾아보자고.”
그들이 저토록 날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끔찍한 상상 때문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동요를 읽은 건지, 계단 뒤 벽 쪽으로 나를 몰아넣은 남자가 더 세게 내 몸을 짓눌러왔다.
-똑, 똑…….
쇄골 위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개를 치켜드니, 남자의 하얀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더운 모양인지 그가 고개를 돌리며 목에 딱 붙은 터틀넥을 잡아 늘였다. 남자의 턱이 이마에 닿을 듯 가까웠다.
내 움직임을 느꼈는지, 입구 쪽을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쉬…….”
더운 입김이 귓속으로 감겨 들어왔다.
“고민 끝났어.”
“…….”
“살려줄 테니까 조용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