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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2)화 (2/108)

2화

아니, 근데 빙의 맞아?

반짝이는 금색 종 표면에 얼굴을 비췄다. 표면에 비친 까만 눈, 까만 머리는 맨날 보던 내 얼굴이다. 옷도 입고 있던 옷 그대로고.

그럼 빙의가 아닌데.

어느 인물에 빙의했는지 알면 무슨 소설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 됐다. 그래도 이곳이 소설 속, 그것도 생존물 안이라는 느낌은 확실히 들었다.

게임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소설 속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돈을 많이 쓴 분야가 소설이니까.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로판은 아닌 것 같은데 주위 배경을 보면 현판 쪽인가?

육아물이나 후회물이라면 시작은 보통 방 안에서 눈을 뜨게 해준다. 근데 난 뒤질 것처럼 추운 눈밭 위에서 눈을 뜨지 않았는가. 야외 스타트는 생존물이란 소리다.

게다가 사망하지 말라고 무기 사용부터 알려주다니, 생존물 확실하네.

‘그런데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화한다고?’

내가 죽지 않길 바란다면 화력 좋은 무기를 선물하면 되지, 저 모호한 말은 뭘까.

‘그럼 이것도 무기가 된단 말일까?’

내 주변에 가장 많은 것.

나는 흰 눈을 단단히 뭉쳐 손에 쥐었다. 그리고 땅바닥을 향해 던졌더니.

“오우, 와.”

돌멩이도 안 넣은 순도 100퍼센트의 눈 뭉치였는데, 땅바닥이 30센티는 파인 것 같다.

‘이런 걸 사람이 맞았다간 뒤진다.’

무기화시켜주는 건 맞네.

-치, 치직.

‘아 맞다, 아저씨.’

내 처지를 파악하느라 죽어가는 사람을 잊을 뻔했다.

잡음이 섞여 희미했지만, 무전기 너머로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한 사람의 말소리였다.

“도와주세요! 사람이 죽어가요! 위치는 저 멀리 집 몇 채가 보이고 놀이터랑…….”

그 순간, 간절한 내 외침에 응답하듯 무전기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칙, 치지직…… 야 여자다, 여자.

“그래요. 저 여……!”

잠깐만.

나는 뒷목을 타고 흐르는 묘한 느낌에 대답을 멈췄다.

왜 이렇게 쎄한 느낌이 드는 거지.

‘여자다, 여자라고?’

무전기 너머의 상대방은 목소리로 내 성별을 알아챘다.

그런데 왜 기뻐하는 기색인 걸까. 구조 요청을 보낸 사람의 성별이 여자인 게 왜…….

“…….”

쎄한 느낌에 잠시 말을 멈추고 있자, 무전기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직, 위치가 어디인가요.

‘위치를 묻는 목적이 뭘까.’

내가 너무 예민한가? 구조 요청에 응하려면 상대에게 당연히 내 위치를 알려야 한다. 당연한 건데…….

대답해선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지직, 몇 명인가요?

침묵으로 일관하자 무전기의 잡음이 잦아들었다. 무전기 너머의 사람은 다른 질문이라도 찾는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치지직, 야 뭘 물어.

-너 어제 무전기 잃어버렸잖아. 어제 네가 간 곳 8구역이랑 9구역밖에 더 있어?

목소리가 다르다. 처음 응답한 놈이 아니었다.

8구역이랑 9구역? 여기가 8이나 9구역이란 소린가.

다시 주위를 살폈다.

눈 쌓인 나뭇가지에 가려 아깐 보지 못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꽂혀 있는 검은 깃발을 찾을 수 있었다.

깃발에 적힌 숫자는 8 같았다.

‘위치를 특정 당했어.’

등줄기 저 아래서부터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나 내 등줄기에 소름이 돋건 말건, 무전기 너머의 사람에게선 또 말이 들려왔다.

-치직, 듣고 있죠?

“…….”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했나?

“…….”

-구조하러 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요. 치, 치직.

잡음을 끝으로 무전기에서 더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창백한 얼굴의 아저씨를 내려다봤다.

아저씨의 몸을 덮었던 눈을 치운 게 조금 전인데, 금방 또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사락사락 다시 쌓인 눈을 치우고 그 위를 구세군 빨간 패딩으로 덮었다.

“아저씨, 조금만 참아봐요.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

혹시 몰라 흔들어봤지만 그가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패딩을 벗어주고, 나는 아가일 니트에 코듀로이 팬츠 차림으로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색을 가진 거라곤 내 상의와 하의, 벗어준 빨간 패딩뿐인듯한 광경이었다.

“으…… 추워.”

나는 니트 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떨며 아저씨 옆에 놓인 가방을 주워 어깨에 멨다.

이 씨앗들 소중한 거라고 했었지.

아저씨는 이미 정신을 잃었고 구조대원들이 혹여나 빠트릴 수도 있으니 내가 잘 챙겨야지 싶었다.

“아저씨,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요. 대신 저기서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게요.”

제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나는 눈 속으로 푹푹 파이는 발을 힘겹게 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전기 너머의 사람에게 나는 아저씨가 위험하다는 말밖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전기의 상대방은 어떻게 위험한 상황인지 내게 구체적으로 물었어야만 했다.

출혈이 있는 건지, 골절은 있는지 무슨 부상인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챙겨야 할 물건들이 달라질 테니까.

그들이 타고 올 차량에 모든 물건이 다 실려 있어서 묻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곳으로 오는 목적이 구조가 아닌 다른 이유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게 생존물이라면 더더욱.’

이곳에 멍하니 있을 순 없어.

나는 눈앞에 보이는 집 몇 채를 향해 걸어 나갔다.

-똑똑.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문고리를 당기자.

-끼이익.

녹슨 경첩의 신음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생활의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무단침입이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해서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역시 빈집이었던 건가. 1층을 지나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생존물에 들어와 버리다니…….’

아니, 나는 엄마랑 잘 살고 있었는데 왜 소설 속으로 이동하고 난리야. 빙의든 이동이든 그건 다 현생에 미련없는 애들만 하던데 나는 왜, XX.

“하…….”

기운이 빠져 벽에 등을 대고 쭉 미끄러졌던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두고 온 아저씨 쪽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성에가 잔뜩 낀 유리창을 문질러 닦아내자, 내가 덮어두고 온 빨간 패딩이 보였다.

“언제쯤 오려나.”

상황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구조대원이라는 게 확실시되는 순간 튀어 나갈 계획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들리는 거리니까.

하지만 구조대원이 아니라면…….

“…….”

이곳에서 몸을 숨길 곳이라고는 여기 집 몇 채가 다였다.

이 집을 뒤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숨을 곳을 미리 찾아봐야 할까.’

물론 내게 살인 눈덩이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지만 가장 좋은 건 위험 요소와 아예 마주치질 않는 거다.

집 안에 몰래 숨어 들어갈 장소를 찾아 돌아서려 할 때였다.

-끼이익.

‘왔어.’

난생처음 보는 요상한 모양의 자동차였다.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 해도 저 차가 구조대원의 차로 보이진 않는데.

차에서 내리는 사람의 수는 총 넷. 그중 한 명이 빨간 패딩으로 다가갔다. 패딩을 들춰본 그는 의식을 잃은 아저씨를 억지로 일으켰다.

남자가 아저씨를 붙들고 거세게 흔드는 바람에 아저씨의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여자는 어디 있냐고!!”

남자가 내지른 괴성이 눈밭을 달려 내가 있는 이곳까지 들려왔다.

절망적인 상황에 나는 벽을 짚고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절대 구조대원이 아니었다.

‘안 돼. 정신 차리자.’

놈의 손에서 흘러내린 아저씨의 몸이 힘없이 눈밭을 굴렀다.

그리고 놈들은 시체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점점 놈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쪽을 쳐다봤다.

‘X됐다.’

어디에 숨어야 할까, 침대 밑? 너무 뻔한데. 그럼 어디? 옷장? 너 같으면 안 열어보겠냐?

몸을 숨길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아 공황에 빠져 있는 사이, 놈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부릉.

바깥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지척이었다.

차 소리는 바로 멈추지 않았다. 엔진 소리가 꺼진 건, 내가 있는 집을 조금 지나쳤을 때였다.

그나마 몇 채의 집 중, 이 집이 첫 타자는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말 움직여야 해.’

다른 집을 수색하고 올 테니까 무기 정도는 찾아서 숨을 시간이 있을 거다.

1층으로 내려가 부엌으로 들어선 난 벽에 걸린 프라이팬을 집어 들었다.

눈덩이도 파워가 그 정도였는데 프라이팬은 어떨까.

‘그래도 남자 4명은 좀 빡세지 않나?’

숨어 있다가 발견되는 순간, 한 명은 기습으로 때릴 수 있다고 해도 나머지 세 명은 놀고 있겠냐고.

차라리 1층 대문 가까이에 숨어 있다가 놈들이 2층으로 올라갔을 때 집을 빠져나가 밖에 숨는 게 무사할 확률이 높다는 계산이 나왔다.

보통 집 안에 숨어 있을 거라고 예상할 테니 밖은 대충 살피지 않을까.

-터벅터벅.

갑자기 들린 발소리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계단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집 밖에서 인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벌써?

다른 집부터 수색하고 오는 거 아니었어?

-끼이익. 지이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금속으로 벽을 긁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계단 아래 어둠 속에서 나는 숨을 죽였다.

제발 이쪽으로 오지 마라, 2층으로 올라가라.

-지이이이익.

벽을 긁는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휴, 다행이다. 이제 저놈이 완전히 2층으로 올라가고 나면…….

“어이.”

“…….”

“나 여기 있는데?”

고개를 들자 그곳엔, 투명한 고글을 쓴 은발의 남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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