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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고척돔 앞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주차를 했다.
치이익! 철커덕!
버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다들 야구 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떠들어 대는 학생들의 말이 한국어가 아니다. 그들의 가이드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일본어로 뭐라 열심히 떠들어 댔고 뒤이어 중년의 일본 남자가 또 뭐라고 큰소리를 치자 일본 학생들은 줄을 섰다. 그리곤 가이드가 맨 앞에서 움직이고 그 옆을 일본 중년 남자가 따라가며 뒤로 손짓을 하자 일본 학생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고척돔 구장 안으로 향했는데 가이드가 입구 앞에서 고척돔 관리원에게 뭐라고 하자 관리원이 확인 절차를 거쳐서 그들을 구장 안으로 입장케 했다. 그리곤 다시 관리사무실에 보고를 했다.
“일본에서 온 기요하라 고등학교 학생들이 안으로 입장했습니다. 현일고요? 아! 저기 오네요.”
일본 학생들이 고척돔 안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현일고 학생들이 나타났다. 그런 그들을 인솔하고 있는 덩치 큰 남자가 있었는데 관리원은 어째 그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최민혁 선수네?”
관리원은 요 며칠 계속 고척돔에서 최민혁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도 단 번에 최민혁을 알아 보았다.
“그런데 최 선수가 왜 현일고 학생들과 같이 오는 거지?”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러니까 최선수가 현일고 일일 감독이시란 말이시네요?”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최 선수는 어째 비시즌이 더 바쁘신 거 같습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일본 애들은 벌써 들어갔습니다.”
“일본 기요하라 고등학교에서 벌써 왔다고요?”
“네. 좀 전에 들어갔습니다.”
“일찍도 왔네요.”
아직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뭐 하러 이렇게 빨리 왔나 싶었다. 사람들은 이런 걸 두고 일본인을 근면하다고 얘기하는 데 최민혁의 생각을 달랐다.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최민혁은 뒤쪽 현일고 야구부원들을 데리고 고척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 일본 학생들이 고척돔은 한쪽 덕 아웃을 벌써 차지하고 있었고 감독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의 지시에 따라서 몸들을 풀고 있었다. 그러다 현일고 학생들이 나타나자 힐끗 이쪽을 쳐다보긴 했지만 그들은 하던 몸 풀기를 계속했다. 그걸 보고 최민혁은 반대편 덕 아웃으로 현일고 학생들을 데리고 갔다.
“짐들 풀고 복장 정돈 한 뒤 요 앞에 집합하도록 한다.”
“네에!”
현일고 학생들은 최민혁의 말에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덕 아웃 안으로 들어가서 각자 짐을 풀고 입고 있던 두꺼운 야구잠바를 벗어두고 덕 아웃 밖으로 나가서 2열 횡대로 섰다. 그런 그들 앞에 최민혁이 서자 주장이 나와서 인원 보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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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현일고 야구부 주장인 우현민으로부터 정식으로 보고를 받은 뒤 선수들에게 말했다.
“교류전이 뭔지는 다들 알지?”
“네에!”
“친선 도모 형식으로 치루는 시합니다. 살살하도록. 주장은 애들 몸 풀게 하고.”
최민혁이 그 말 후 물러가자 주장 우현민이 알아서 현일고 야구부원들과 몸풀기를 시작했다. 그 사이 먼저 몸을 푼 일본 기요하라 고등학교 야구부원들은 본격적으로 캐치볼을 하고 투수들은 불펜에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때 고척 돔에 몇 사람이 등장했는데 최민혁이 딱 봐도 협회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심판진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곧장 일본 감독과 최민혁을 불렀다.
“이쪽은 기요하라 고등학교에 마코토 감독 감독이시고 이쪽은......”
협회 사람들은 최민혁을 보고 다들 놀란 얼굴이었지만 그를 보고 왜 여기 있냐는 식으로 묻지는 않았다.
“현일 고등학교 최민혁 감독입니다.”
최민혁은 유창한 일본어로 기요하라 고교의 마코토 감독에게 직접 자기를 소개했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하며 교류전이지만 페어플레이 하도록 합시다.”
“페어플레이 좋지요. 이쪽이 바라는 바입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마코토 감독의 말하는 뉘앙스가 최민혁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치 한국 선수들이 페어플레이를 안 하는 선수들로 비춰지고 있었으니까.
사실 고교 야구의 수준을 놓고 보면 일본이 훨씬 낫다. 그건 최민혁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기요하라 고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한 학교라면 현일고도 황금사자기의 우승 팀이었다.
우승팀끼리의 전력은 붙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두 팀 모두 정상에 선 팀들이니 말이다.
최민혁은 굳은 얼굴로 생글거리고 웃고 있는 기요하라 고교의 마코토 감독과 악수를 나눈 뒤 덕 아웃으로 향했다.
마코토 감독은 확실히 현일고를 기요하라 고교보다 수준 낮은 팀으로 보고 있었다. 사실 일본 감독이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건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 전역에 약 4,000개의 고등학교 야구부가 있는데 고시엔 구장의 흙을 밟을 수 있는 건 단 49개의 학교뿐이었다. 그렇게 결정된 49팀은 추첨을 통해 토너먼트 경기를 진행, 1회전이 끝나면 1회전 승리 팀끼리 추첨을 해서 2회전의 상대를 정하고, 2회전이 끝나면 2회전 승리 팀끼리 추첨을 해서 3회전의 상대를 정하는 '전 시합 추첨 방식'이란 특이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렇듯 고시엔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지역별 예선에서 1위를 하고 올라와 1, 2, 3회전,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까지 모두 이겨야만 하므로 고시엔 우승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선수들에게 고시엔 대회라는 것은 그만큼 값진 의미를 지닌 것일 터.
기요하라 고교는 바로 그 고시엔의 우승 팀이었다. 그러니 한국의 수십 개밖에 되지 않는 학교끼리 붙어서 우승한 황금사자기 우승팀 정도는 우습게 볼만도 했던 것이다.
최민혁도 그걸 알지만 교류전에 온 일본 감독이 저렇듯 대 놓고 상대팀을 무시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대충 시합하는 것에서 반드시 이기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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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구 협회 측에서는 한일 고교 야구 교류전을 하기로 했지만 그 일정에 대해서는 학교 측에 위임했다. 그래서 기요하라 고등학교와 현일 고등학교에서 그 일정을 조율하다가 학사 일정이 없는 방학에 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름 방학엔 두 팀 모두 야구를 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겨울 방학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덜컥 잡힌 게 겨울에 두 학교의 교류전이 잡힌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측과 한국 측 야구 협회에서 겨울철에 무슨 야구냐며 학교측에 일정 변경을 요구했지만 이미 잡혀 버린 일정은 어쩔 수가 없었고 이번에 한해서만 교류전을 치루는 걸 허락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겨울에 두 팀은 시합을 하게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일본 기요하라 고교에서는 야구를 하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행을 왔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기요하라 고교의 감독 대신 학교 체육 교사가 선수들을 인솔해서 한국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마코토는 기요하라 고교의 진짜 감독은 아닌 셈이었다.
마코토의 역할은 기요하라 고교 야구 선수들을 잘 인솔해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교류전이 있었지만 연습경기로 대충 5회까지만 야구 놀이만 하면 됐다. 그런데 기요하라 고교에서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바로 마코토가 혐한주의자란 점이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혐한주의 시위에도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기요하라 고교 선수들을 인솔하고 있었으니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조센징들한테 지면 안 되겠지? 확실하게 보여 줘라. 일본 고교 야구가 얼마나 강한지 말이다.”
마코토는 시합 시작 전에 기요하라 고교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교류전인데 꼭 이기라고 강요했다. 거기다 협박까지 일삼았다.
“만약 지면 나머지 일정이 고달프게 될 거다. 그러니 확실하게 해. 마모루. 특히 너. 봐주고 그랬다간......”
마코토는 특히 기요하라 고교의 에이스 마모루를 지목하며 그가 제대로 공을 던지길 요구했다. 마모루는 작년 고시엔의 MVP였다. 그런 그가 제대로 던진다면 그건 교류전이 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본 측에서 먼저 칼을 빼 들면서 한일 고교야구 교류전은 실제로는 교류전을 뺀 한일 고교 야구 시합이 되었다.
그런 사실도 모른 체 협회 직원들은 10시 30분이 되자 정확히 시합을 시작 시켰다. 어차피 연습경기 형식이었다. 한 시간 정도 두 팀이 어울려 야구 놀이를 하다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는 게 협회 직원들이 생각하고 있는 교류전이었다.
“플레이 볼!”
주심의 시원스런 콜과 함께 일본의 기요하라 고교와 한국의 현일고의 한일 고교 야구 시합이 시작 되었다.
당연히 한쪽이 진심으로 야구를 하니 다른 쪽도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기는 초반부터 접전 양상을 띠었다.
1회 초 기요하라 고교의 선두 타자의 출루에 이은 번트와 적시타로 선취점을 뽑자, 1회 말 현일고가 곧바로 내야안타와 도루, 적시타로 따라가는 점수를 만들었다. 이후 두 팀은 선발투수의 호투가 이어지면 팽팽한 접전 상황을 이어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게. 제네 왜 저러는 거야? 그리고 현일고는 또 왜 저러고?”
시합이 시작 되고 나서 협회 직원들도 곧 깨달았다. 이건 그들이 생각한 교류전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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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1의 팽팽한 균형이 깨진 것은 3회 초였다. 기요하라 고교의 공격 상황. 투아웃 이후 발 빠른 1번 타자가 볼넷을 골라 나갔고 중심 타선에서 시원한 장타가 연이어 터지며 2점을 득점 한 것이다. 투 아웃 이후 볼넷을 내 준 것이 굉장히 뼈아픈 장면이었다.
“그렇지. 빠가야로. 조센징들아. 어떠냐? 크하하하하.”
경기가 과열 양상을 띠면서 혐한주의자 마코토도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경기 중 욕하고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걸 최민혁도 들었고 협회 직원들도 들었다.
“저, 저런 미친.....”
“일본 감독 왜 저래?”
“저대로 둘 거야? 빨리 일본 협회에 연락 해 봐.”
이에 협회 직원들은 황급히 일본 협회 측에 이 사실을 알리고 따졌다. 그러자 일본 협회 측에서도 부랴부랴 기요하라 고교에 연락을 취했고, 마코토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결과 그가 혐한주의자란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일본 협회에선 그 사실을 숨기고 오히려 한국 협회에 항의를 했다. 교류전인데 한국 쪽에서 이기려고 경쟁을 부추겨서 그렇다고 말이다. 그러다 기요하라 고교 선수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건 전적으로 한국 측의 책임이래나 뭐래나.
그 얘기를 협회 직원으로부터 전해들은 최민혁이 분기탱천해서 말했다.
“하여튼 이 쪽바리 새끼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절대 인정 못하는 종자들이라니까.”
최민혁은 감독으로서 즉시 선발 투수를 내리고 중간 계투 요원들을 올려서 더 실점 없이 3회 초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