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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유명철은 궁금한 게 갑자기 많아졌다. 하지만 그걸 직접 윤동준 감독에게 물어 볼 순 없었다. 감독인 그는 당장 바빴으니까. 윤동준 감독은 9회 초 타격에 나설 헬멧을 쓴 타이탄스 타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을 상대로 무슨 말을 했다. 그 말에 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윤동준 감독은 흡족한 얼굴로 덕 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에게 유명철이 당장 궁금한 걸 물었다.
“타자들에게 무슨 얘길 하신 겁니까?”
“별거 아니야. 불펜에 해명이 몸 풀릴 때까지 지공을 하라고 했을 뿐이야.”
하긴 타자들이 서두르고 재수가 없다보면 자칫 한 이닝을 10분 안에 끝내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딱 봐도 윤동준 감독의 머릿속은 이 시합의 승패보다는 이해명과 최민혁의 승부에 더 포커스가 잡혀 있었다. 하긴 그건 유명철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가운데 9회 초 타이탄스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 되었다. 스코어는 16대 7로 여전히 타이탄스가 크게 앞서 있었다. 하지만 타이탄스 타자들은 지금 이 스코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첫 타자는 나름 감독의 지시를 따르며 투 쓰리 풀 카운트까지 가며 크로노스 투수가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게 만들었다. 그리곤 크로노스 투수의 결정구를 그대로 통타해서 안타를 만들어냈다.
“좋군.”
윤동준 감독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흡족해 했다. 그럴 것이 첫 타자가 벌써 10분이나 시간을 끌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 타자 역시 3-1에서 밋밋하게 들어오는 직구를 때렸다.
“저, 저.....”
그 타구는 훌쩍 고척 돔의 좌측 펜스를 넘어가 버렸다. 그 홈런에 윤동준 감독은 별 반응이 없었다. 단지 두 번째 타자가 홈 플레이트를 밟을 때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렇게 시작 된 타이탄스의 공격은 한 타순을 돌고 반 타순을 더 돈 후에야 끝이 났다. 그 결과 전광판의 스코어는 다시 크게 벌어져 버렸다.
25대 7!
당연히 크로노스 선수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들 웃고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이 타이탄스의 상대가 아니란 것쯤은 다들 알았다. 그래선지 승패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강팀을 상대로 그들이 배울 것이 얼마나 있냐는 건데.
다들 배운 게 많았다. 그래서 크로노스 선수들은 오늘 시합 이후 자신들의 실력이 더 늘어 날 걸 알기에 모두 웃고 있었던 것이다.
9회 말, 사실상 크로노스의 마지막 공격이 될 공산이 큰 이닝이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표정은 다들 밝았다. 그리고 타순 역시 1번부터 시작되기에 마치 초심으로 돌아간 듯 활기에 넘쳤다. 하지만 마운드에 오른 바뀐 투수를 확인한 순간 그 활기는 침묵으로 바뀌었다.
“맙소사. 이해명이 아냐?”
“서경 와이번즈의 그 마무리 투수?”
“하아! 끝났네. 끝났어.”
비록 크게 뒤지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희망을 불씨를 지피려던 크로노스의 선두 타자 둘이 벌레 씹은 얼굴로 변했다. 이해명이 누구던가? 국내 투수 중 150Km/h의 강속구를 뿌려대는 몇 안 되는 투수였다. 제구와 구위까지 좋은 그는 단지 나이가 30대 중반이란 이유로 보직이 클로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이해명이었다.
그래도 수준을 따지자면 앞서 크로노스가 상대했던 유명철에 비해 두 세 단계 높은 수준의 투수랄까? 유명철도 언터처블이었는데 그보다 더 대단한 이해명을 무슨 수로 상대 한단 말인가?
“크로노스 파이팅!”
그래도 톱타자랍시고 1번 타자가 파이팅 넘치게 타석에 섰다.
펑!
하지만 150Km/h이 넘는 속구가 포수 미트에 박히는 걸 크로노스 1번 타자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지켜만 봤다. 그야 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공이 들어와 버리니 크로노스의 1번 타자는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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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명은 전광판에 찍혀 있는 스코어 25대 7을 보고 의아해 하며 마운드에 섰다. 왜 이런 무대에 자신이 서야 하는지 모르지만 감독이 서라니 설 수밖에. 이해명은 마운드에서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뻐엉!
그가 던지는 강속구에 미트가 터질 듯 울려 댔는데 그걸 타이탄스 수비수들이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반면 상대 측 덕 아웃은 초상집 분위기고 말이다.
이해명이 나선이상 1점차 박빙의 승부에서도 그 점수가 넉넉해 보였던 수비수들이었다. 그 만큼 이해명에 대한 타이탄스 선수들의 믿음은 확고부동했다.
“후아아!”
마지막 연습투구를 마친 이해명이 호흡을 고를 때 공이 내야를 한 바퀴 돌았다.
뻐어어엉!
“스트라이크 쓰리, 배터 아웃!”
안 그래도 별 볼 일 없는 크로노스의 타선. 그저 150Km/h 대의 강속구와 110Km/h 커브 앞에 그들은 추풍낙엽이었다. 그의 주 무기인 포크볼은 던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간단히 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운 이해명이 마지막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최민혁!”
투수인 이해명이 어찌 최민혁을 모를까? 2015년 월드베이스볼에 참가 했을 때 이해명도 불펜 투수로 참가를 했었다.
“조명진!”
이해명의 입에서 불운한 사고로 메이저 무대에 서보지도 못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간 녀석의 이름이 갑자기 흘러나왔다.
당시 조명진은 최민혁과 단짝처럼 붙어 다녔기에 최민혁을 보자 조명진이 생각난 것이다. 이해명은 조명진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조명진에게 포크볼을 전수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더 애착을 가졌던 녀석이었는데........
그런 녀석과 특히 친했던 게 최민혁이었다. 죽은 조명진 대신 최민혁은 국내 최정상급 선발투수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갑자기 타자로 자신 앞에 나타나자 이해명도 조금 얼떨떨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상대가 최민혁이 아니라 죽은 조명진이라도 타석에 선다면 봐 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 이해명이었다.
이해명은 늘 그렇듯 타석에 타자가 들어서자 투수판에 올라 포수의 미트 밑을 응시했다. 그런데 포수의 사인을 보고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리곤 바로 고개가 홱 돌아갔다. 사인이 마음에 안 든단 소리였다. 그럴 것이 포수가 공을 하나 빼려 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투수였다. 클로저가 투수를 상대로 공을 빼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래서 이해명이 직접 사인을 냈다.
한복판 포심!
이해명은 일방적으로 사인을 낸 뒤 바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디 칠 테면 쳐보라며 한 복판에 직구를 꽂아 넣었다.
뻐어어엉!
앞서 던진 유명철의 공도 빨랐다. 그 앞의 원성우의 공도. 하지만 그들 공과 150Km/h 대의 강속구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스트라이크!”
최민혁도 초구부터 시원하게 배트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스윙을 한 자세 그대로 몇 초간 굳어 있어야 했다.
‘.....빠르다.’
최민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전광판으로 향했다.
152Km/h!
자신도 별 무리 없이 던지는 속구의 구속이었다. 하지만 그걸 던지는 것과 타석에 서서 그 공을 치려들 때 느끼는 빠르기는 천양지차였다.
“후아아!”
최민혁의 배트가 맥없이 돌아가는 걸 보고서 이해명은 속으로 생각했다.
‘좋았어. 이대로 잡는다.’
앞서 최민혁이 상대한 투수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해명이 투수판을 밟고 우뚝 서자 포수가 사인을 보냈다. 그걸 보고 이해명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 포수가 제대로 된 사인을 낸 것이다.
한 복판에 패스트 볼!
어디 칠 수 있으면 쳐 보란 뜻이었다. 이해명은 와인드업 뒤 곧장 공을 뿌렸다.
쐐애애액!
빠른 공이 금세 홈 플레이트 근처에 다다랐다.
따악!
그때 최민혁의 배트가 빠른 공에 맞춰 따라 나왔다. 공은 배트 위쪽에 맞고 치솟아 파울 라인을 넘어갔다. 그걸 보고 이해명은 생각했다.
‘어쭈! 이거 봐라?’
그의 포심은 어설픈 타자가 절대 건드릴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민혁이 적어도 타자로서 그의 상대는 된단 얘기였다.
‘그렇다면.....’
이해명도 우습게 여겼던 최민혁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우선 포수의 사인을 존중하게 됐다. 아무래도 앞 선 타석에서 그보다 포수가 더 최민혁에 대해 관찰을 했을 테니까 그의 약점도 파악해 뒀을 공산이 컸다. 그런 포수가 커브 사인을 냈다. 이해명은 포수가 시키는 대로 커브를 던졌다.
이번에도 빠른 공을 생각하고 있었던지 최민혁은 움찔하더니 다급히 배트를 내밀었다. 커브가 홈 플레이트를 걸치고 들어왔기에 그대로 두면 루킹 삼진이었다.
틱!
다급했던지 최민혁 타구 폼이 무너지면서 내민 배트로 억지로 공을 걷어냈다. 볼 카운트는 여전히 0-2로 투수가 유리한 상황. 이때까지만 해도 이해명은 느긋했다. 변화구로 배트를 유도해서 범타로 끝내도 되고 아니면 그의 결정구인 포크볼을 사용해서 삼진을 잡아도 되고 말이다. 그러나 그가 범타를 유도하거나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잡아 경기를 끝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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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
“파울!”
틱!
파울!
...........
최민혁이 이해명의 공을 집요하게 커트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150Km/h 대의 강속구를 통타 하기엔 그의 실력이 모자란다고 쳐도 그의 능력치로 이해명의 공을 커트 해 내는 데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새 12구! 이해명이 로진백을 손등으로 튕기며 최민혁을 쏘아보았다.
‘질긴 녀석이로군.’
최민혁처럼 저렇게 컨택으로 물고 늘어지는 타자를 클로저들은 가장 싫어했다. 그건 이해명도 마찬가지였고.
던질 수 있는 변화구는 다 던졌다. 잘 구사된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모두 커트 당했고 9구째에는 그의 비장의 무기, 결정구인 포크볼까지 던졌는데 그것마저 커트 당하면서 이제 남은 건 볼 배합을 통한 승부밖에 없었다.
그때 포수가 먼저 타협안을 제시해 왔다. 볼카운트는 3-2. 포수의 사인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였다.
배트를 유도하기엔 좀 먼 공이지만 배트가 딸려 나오면 좋고 아니면 1루로 걸려 보내잔 뜻이었다.
문제는 최민혁의 능력치는 단순히 컨택만 이뤄지는 타격폼이 아니란 점이었다. 그 자세에서 컨택 외에 얼마든지 타격이 가능했다. 즉 빠지는 슬라이더라도 최민혁이 그 구종만 안다면 얼마든지 칠 수 있단 소리였다.
이때 최민혁은 투수의 보유 능력 중 타구안을 사용했다. 당연히 마무리 투수인 이해명은 타자가 될 일이 없으니 해당 사항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포수라면 얘기가 달랐다. 타이탄스의 포수는 오늘 홈런 2방을 쏘아 올리며 공격에서 맹활약을 펼쳤으니까.
최민혁이 타구안을 사용한 결과 포수가 원하는 공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라!’
상대 투수가 무슨 공을 던질지 아는 상태에서 최민혁이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마운드를 응시할 때 투수 이해명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