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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워낙 고급 주택가라 그런지 마트 한 번 가려면 그것도 일이었다. 땅값이 비싸선지 인근에 그 흔한 상가 건물 하나 없었다. 집을 나선지 10여분 뒤 교차로를 건너자 겨우 중형 마트가 하나 나왔다.
그 중형 마트에는 제법 사람들이 복작거렸다. 그러니까 이태원에서도 이곳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고급 주택가와 일반 주택가가 나뉘었는데 여기 일반 주택가라도 이태원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 집값은 수십억을 호가했다. 그러니까 이곳 교차로는 최상류층과 상류층을 구분 짓는 경계인 셈이었다.
최민혁은 필요한 돼지고기를 사면서 비어 있는 냉장고도 채울 생각으로 마트 쇼핑에 본격적으로 참가했다.
“어?”
카트를 밀고 필요한 걸 주워 담던 최민혁의 눈에 늘씬한 자태의 여인이 한 며이 발견 되었다.
주위를 살피자 마트 내 수컷들은 죄다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만큼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는 여인은 몇 가지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해서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알기라도 하는 듯 최민혁이 말했다.
“별 일이네. 그런데 저 여자가 여긴 어쩐 일이지?”
마트 안에서 유독 혼자 빛나고 있는 미모의 여인의 정체는 바로 민예린이었다. 오늘 백제 호텔 레스토랑에서 보고 또 여기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최민혁은 민예린이 정확히 어디서 살고 있는지 몰랐다.
그녀와의 데이트는 주로 사람이 없는 곳이나 아니면 차 안, 그것도 아니면 차성국의 집에서 이뤄졌으니까.
최민혁도 살 건 얼추 다 산 터라 계산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민예린의 앞에서 계산대의 문제가 생기면서 최민혁과 민예린은 비슷하게 계산을 마치고 마트를 나서게 되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마트 문을 통과 했을 때 최민혁은 민예린에게서 술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 보니 민예린의 발걸음이 어째 정상은 아니었다.
막 마트를 나선 그녀는 비틀거렸다. 짐까지 한 손에 들고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걷는 그녀는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런 그녀 옆으로 최민혁이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취하신 거 같으신데 짐이라도 들어 들어요?”
“네?”
민예린은 이건 뭐냐는 듯 빤히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최민혁이 넉살좋게 말했다.
“저 오성 라이온즈의 투수 최민혁입니다. 잘 알려진.....공인이란 얘기죠.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 후 최민혁이 손을 내밀자 민예린이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곤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 저한테 작업 거는 건가요?”
“아뇨! 단순한 호의입니다. 호의! 뭐 그쪽이 조금 궁금한 건 사실이긴 해요.”
최민혁의 시종 자신 있는 대답에 민예린은 계속 웃으며 들고 있던 짐을 그에게 건넸다. 그녀가 최민혁에게 호감을 보인 것이다. 최민혁은 그 짐을 받으며 말했다.
“마마. 앞장서시지요.”
“오냐! 호호호호!”
민예린은 최민혁의 말 장난에 호응까지 해 주며 앞서 걸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는 방향은 최민혁의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다행이라면 마트에서 그녀가 사는 집이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민예린은 이태원의 일반 주택가의 단독주택 옥상의 옥탑 방에 살고 있었다.
“다 왔어요.”
민예린은 생전 처음 보는 남자라 그런지 아니면 최민혁이 마음에 든 건지 모르지만 집 앞까지 그를 데려갔던 것이다.
“이제 그거 주세요.”
“네. 여기.....”
최민혁은 민예린의 짐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 짐을 받으며 민예린이 살짝 유혹어린 시선으로 최민혁에게 말했다.
“올라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실래요?”
민예린의 최민혁의 입에서 바로 ‘예스’란 말이 튀어 나올 거라 확신했다. 지금껏 그녀의 유혹을 뿌리친 남자는 딱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는...... 이미 죽고 없었다.
“아뇨. 전 밥하러 가야해서요. 배고픈 여동생이 이제나 저네나 제가 오길 기다리고 있는 터라. 차는 다음 기회에 마시도록 하죠. 그럼 전 이만....”
최민혁은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의 가슴을 충분히 울렁거리게 만들 정도의 매력적인 웃음을 민예린에게 지어보이곤 돌아서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런 그를 민예린이 한 동안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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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국이 죽고 나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민예린은 나름 살기 위해 부회장인 박영준의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성그룹의 후계자인 박영준의 여성 편력은 민예린의 상상을 뛰어 넘은 수준으로 그녀로서는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반대로 박영준의 여자가 된 민예린이 되레 손발이 묶였다. 당연히 회장 사모의 개인비서 자리도 잘린 그녀는 본사 전략기획본부장의 비서로 좌천 되었다. 하지만 거긴 이미 일 잘하는 비서가 있었고 그녀에겐 그냥 빈 책상만 주어졌다.
즉 그녀는 박영준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하는 몸빵 비서가 된 것이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기껏 만나자고 해 놓고 일이 생겼다면서 그녀 혼자 저녁을 먹게 했다. 그런데 더 기막힌 건 그 저녁 식사를 박영준이 보낸 경호원의 감시 하에 먹어야 했단 점이었다. 그러니까 박영준은 민예린에게 다른 날파리가 끼지 않게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더 그녀를 비참하게 만든단 사실을 박영준은 알지 못했다.
민예린은 식사 대신 와인으로 배를 채웠다. 술에 장사 없다고 어지간해선 취하지 않은 그녀도 계속 마시다보니 결국 취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박영준의 경호원이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었다.
민예린은 살게 있다면 집 근처 마트 앞에서 내렸다. 그녀가 마트에 들어가자 박영준의 경호원도 떠났다.
“휴우!”
박영준의 감시망에서 그제야 벗어난 민예린은 이제 살 거 같았다. 더불어 술기운도 확 가셨다. 그녀는 이왕 마트에 온 김에 필요한 걸 구입했다. 그리곤 계산을 할 때였다.
주위 여자들의 시선이 온통 그녀의 계산대 옆으로 쏠렸다. 그래서 그녀도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잘생긴 훈남이 카운터 직원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예린은 그런 훈남을 보고 모델이 아니면 연기자 지망생이 아닐까 싶었다.
훈남이 유명했으면 민예린도 그를 알아 봤어야 하는 데 그녀의 머릿속에 저 남자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렇게 민예린이 계산을 끝내고 마트를 나설 때 그 훈남이 그녀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마트 밖으로 나오자 민예린은 갑자기 취기가 오르면서 비틀 거렸다. 그걸 보고 그 훈남이 그녀에게 다가와선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뻔하게 작업을 걸어왔다.
문제는 그런 그가 민예린은 별로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 좋았다. 그와 집까지 가는 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렜다.
‘내가 왜 이러지? 오늘 처음 본 남자한테.....’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녀를 이렇게 설레게 만든 남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이미 죽은 차성국 오성 자동차 전무이사!
그가 그리웠던지 아님 오랜만에 자신을 설레게 만든 남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는 살아오며 몇 번 하지 않은 유혹이란 걸 훈남에게 시도했다. 하지만 그 훈남은 그녀의 유혹을 가볍게 뿌리치고 유유히 떠났다.
“이름이 최민혁이라고 했었지?”
민예린은 어째 그 최민혁이란 이름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거 같았다. 그가 오성 라이온즈 소속의 선수인 이상 말이다.
민예린은 곧장 집으로 올라가서 씻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곤 검색창에 최민혁을 쳤다. 그러자 화면에 꽉 찬 그에 대한 정보들! 그 내용을 읽던 민예린의 눈에 오랜 만에 생기가 감돌았다.
“자신 있을 만 했네.”
자신 앞에서 최민혁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국내 최정상, 국보급 투수였다. 당연히 연봉도 상당했고. 내년 FA에 대박이 날 거란 건 공공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 액수로 민예린을 만족 시킬 순 없었다.
“차성국!”
수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한 그가 죽지만 않았어도..... 그녀 수중에 천억 원 이상의 돈이 쥐어졌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돈이 다가 아니었다. 그녀 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가 있다는 그가 바로 차성국이었다. 사실 민예린은 차성국이 프러포즈를 하면 받아드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민예린의 머릿속에 좀 전에 봤던 훈남과 차성국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러면서 오늘 따라 차성국이 뼛속깊이 더 그리워지는 민예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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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예린을 집까지 바래다 준 뒤 최민혁은 부지런히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왜 이리 늦어? 나 배고프단 말이야.”
거실에서 TV를 보다 그가 나타나자 칭얼거리는 최다혜를 보고 울컥해서 한 소리 하려던 최민혁은 그냥 입맛만 다시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최민혁은 마트에서 사온 식자재를 냉장고에 넣을 건 넣고 나머지는 보관해 두는 싱크대 안에 넣어뒀다. 그리곤 손을 씻고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일 냄비를 꺼냈다. 밥은 아침에 외출 전 취사를 예약해 뒀기에 벌써 전기압력밥솥엔 맛있게 밥이 완성 되어 있었다.
최민혁은 냄비에 적당량의 물을 붓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끓였다. 그렇게 육수가 끓일 동안 최민혁은 양파와 파를 썰고 두부는 두툼하게, 돼지고기와 김치는 한입 크기로 잘랐다.
10여 분간 끓인 육수는 한 쪽에 잘 두고 빈 냄비에 최민혁은 참기름을 두르고 먼저 돼지고기를 볶았다. 그렇게 돼지고기가 반쯤 익을 무렵 김치와 양파, 청주를 넣고 2-3분간 볶은 뒤 돼지고기가 다 익었을 때 육수를 붓고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을 넣었다.
이때 꼭 들어가야 할 것이 바로 김칫국물이다. 이게 오늘 최민혁의 돼지고기 김치찌개의 맛을 좌우할 신의 한수가 될 터였다. 그 뒤 중불에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끓는 동안 최민혁은 밥상을 차렸다.
준비 된 밑반찬들에 밥을 푸고 나자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었다. 거기에 두부와 대파를 넣은 뒤 최민혁은 최다혜를 불렀다.
“야! 밥 먹어.”
그러자 최다혜가 TV를 끄고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왔다.
“김치찌개 다 됐어?”
최다혜는 식탁에 앉으며 김치찌개부터 찾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한숨을 내 쉰 최민혁이 가스레인지 위에 끓고 있던 냄비를 들어다 그녀 앞에 대령했다.
“우와! 맛있겠다.”
맛있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앞에 눈이 뒤집힌 최다혜는 군침을 꼴깍 삼키며 김치찌개로 숟가락을 가져가서는 먼저 국물부터 맛봤다.
“후루룩! 쩝쩝! 카아! 이거거든. 오빠. 짱 맛있어.”
김치찌개 때문에 오늘 그의 심기를 꽤나 불편하게 만들었던 최다혜였다. 하지만 그녀가 천진남만하게 웃으며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는 걸 보고 나자 그녀에 대한 불만도 눈 녹듯 다 사라졌다.
원래 요리사에게 맛있다는 말이 최고의 극찬인 법. 최민혁은 자신이 만든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어 주는 최다혜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배불러.”
하지만 딱 그때뿐이었다. 식사를 끝내자 최다혜는 이내 안면몰수하고 후다닥 부엌을 빠져 나가서는 거실에서 TV를 봤다. 자신이 먹은 밥그릇도 그대로 두고 말이다.
“저게.....”
도저히 못 참겠어서 최민혁이 막 최다혜에게 한 소릴 하려 할 때였다.
“아까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오빠 사고 당한 걸아시더라고. 두 분 다 걱정 많이 아셨나 봐. 그래서 내가 잘 말씀 드렸어. 오빠 아무 이상 없으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재미있게 지내다 오시라고.”
최다혜가 TV에 시선을 고정 시킨 채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 잘했네. 뭐.”
최다혜가 불쑥 부모님 얘기를 꺼내자 최민혁도 당혹스러웠다. 없던 여동생이야 이제 막 적응이 되었는데 부모님과는 어떤 식으로 지내야 할지 아직 엄두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