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죽었다
진남은 태고 몽경에서 봤던 그 태고거인을 떠올렸다.
현급 무혼을 돌파했을 때 경천동지의 대전에서 나타난 빛의 그림자였다.
진남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흰색 나무 상자 속에는 칠흑안구(漆黑眼球)가 얌전히 들어있었다. 안구에서 경천동지의 위압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이 안구가 진남을 부른 것이었다.
진남은 전신의 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신의 혼은 하나의 무혼일 뿐 육신이 없었다.
그런데 상자 안에 몽경 거인의 왼쪽 눈이 있었다. 현급 무혼을 돌파할 때 빛의 그림자의 왼쪽 눈이었으며, 전신의 왼쪽 눈이었다.
묘묘 공주와 용호요종은 한참을 달려 마침내 천지를 뒤흔든 빛이 나는 곳에 도착했다.
"엄, 엄청난 위압…이다. 그 속을 알 수가 없구나……."
용호요종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존귀한 혈통이었지만 영혼마저 공포에 떨었다.
"진…남……."
묘묘 공주도 역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끝없는 두려움을 애써 참으며 앞을 응시했다.
그 시각, 빛의 중심.
"진남."
칠흑안구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었다. 마치 태고의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음절 하나하나가 세상을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아하니 나를 알아보는 게로구나."
"저는……"
진남의 영혼이 떨려서 겨우 뇌리에 한 가닥의 의지를 붙잡고 말했다.
"저는 당신을 알아요….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전신의 왼쪽 눈이라는 걸 말입니다…."
진남은 머릿속에 의혹이 가득해서 혼란스러웠다.
'내가 전신의 혼을 가졌는데 왜 전신의 왼쪽 눈이 따로 있는 걸까? 설마 전신의 혼은 비검종의 황궐처럼 영혼만 변화한 것일까? 전신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네가 궁금한 게 많은 줄 알았다."
칠흑 안구가 말했다.
"이번에 내가 널 부른 건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전신의 혼이 모두 전신의 일부이니 이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걸 너에게 알려주려고 불렀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진남은 놀랐다.
진남이 전신의 혼을 갖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만약 전신의 왼쪽 눈까지 가지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나는 너와 하나가 되어서 전신의 위엄을 빛내려고 했다."
칠흑 안구가 갑자기 우레같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그런데 넌 날 실망시켰다! 전신의 혼을 가지고 있으며 보잘것없는 정을 위해 고개를 숙이다니! 이게 얼마나 큰 수치인지 알고 있느냐!"
칠흑 안구가 분노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그의 분노를 느끼고 함께 분노했다.
진남은 머릿속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는 칠흑 안구의 노여움을 못 견딜 뻔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에게도 큰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소경설은 제 친구이고 저를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부탁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칠흑 안구의 분노는 더욱 폭발했고 사방팔방에서 귀신들의 화난 소리가 울렸다.
"넌 패배를 인정했다! 넌 고개를 숙였다! 넌 전신의 존엄을 잃어버렸다!"
"전신은 전천전지, 무소불전, 무소불승이다! 그러니 져서는 안 된다! 이기기만 해야 한다! 뒤로 한 보만 물러나도 큰 치욕이다!"
진남은 칠흑 안구의 호통이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다.
진남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영혼마저 흩어질 것 같았다.
"전, 패,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신세를, 친구에게 신세를 졌어요. 당연히 갚아, 갚아야 하는 것……"
"제가 어, 언제 패배를, 언제 패배를 인정했다는 겁니까…… 다, 다만 신세 진 우정의 빚을 갚으려고 했을 뿐인데……"
정신이 무너지는 한계에 이르렀어도 진남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칠흑 안구는 화가 나 오히려 헛웃음을 지었다.
"허, 전신의 후계자인 네가 이렇게 타락할 줄 몰랐다. 무도의 세계는 약육강식인데 우정이 웬 말이냐? 전신이다! 전신에겐 오직 전투! 전투밖에 없다! 대지가 산산이 부서지도록 싸우고 하늘이 무너지도록 싸우며 모든 것을 패배시킬 때까지 싸워야 한다!"
진남의 머릿속에서 굉음이 터졌다.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네가 이렇게 타락하다니! 전신의 왼쪽 눈 이름을 걸고 후계자 자격을 박탈할 것이다! 이제부터 진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칠흑 안구는 솟아오르더니 곧 현광으로 변해 진남의 왼쪽 눈으로 들어갔다.
* * *
묘묘 공주와 용호요종은 하늘을 찌르는 듯한 빛의 삼 리 밖에 서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온 하늘에 광채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주위가 고요해졌다.
"사라졌다……."
용호요종이 안도했다.
엄청난 위압이 없어지자 온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묘묘 공주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잽싸게 앞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다가가 보니 진남은 바닥에 쓰러져 왼쪽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는 수많은 보라색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호흡이 점점 약해져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진남!"
무표정이던 묘묘 공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남은 땅 위에 누운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싼 보라색 무늬는 마치 구렁이 같았다. 보라색 무늬가 오래된 기운을 있는 듯 없는 듯 풍겼다.
"이놈아! 죽은 척하지 마."
용호요종은 진남을 경멸하듯 내려다봤다.
용호요종은 요수로 오랫동안 살면서 스스로 파렴치하다고 여겼지만, 눈앞의 진남이 더 파렴치해 보였다. 진남이 죽은 척하며 묘묘 공주의 걱정을 받으려는 생각이 졸렬하게 생각됐다.
용호요종은 거리낌 없이 호랑이 발을 내밀어 진남을 걷어찼다.
쿵!
그러자 진남의 몸에서 위압이 솟구쳐 용호요종의 몸을 때렸다.
악!
처량한 비명이 황량한 섬의 하늘에 울렸다.
용호요종의 몸은 멀리 날아갔는데 용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호랑이 몸도 여기저기 찢어져 몹시 처량했다.
묘묘 공주는 깜짝 놀랐다.
용호요종은 천룡뇌호의 혈통이라서 엄청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왕 경지의 최고 강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전혀 상처를 낼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경지가 봉인된 게 아니었나? 상자 속에 들어있던 신물이 나온 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먼 곳에 날아간 용호요종은 허우적대며 일어서더니 걸음마저 비틀거렸다. 그는 경악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놈이…, 이놈의 몸속에…, 아까 그놈이 아니…… 설마 탈사(夺舍)당한 건가……?"
"탈사 당했다고?"
묘묘 공주의 얼굴빛이 급변했다.
탈사란 최고의 강자가 죽은 뒤 자신의 영혼을 이용해 남의 몸을 차지하는 것이다.
다만 그런 탈사는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성 경지의 강자라도 비법을 장악하기 어려웠다.
이제 보니 아마 구자진언이 말한 신물이 진남의 몸을 탈사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묘묘 공주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진남의 생명력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생명력은 순식간에 홍수처럼 빠져나가 완전히 사라졌다.
"안 돼!"
진남이……죽었다.
"죽, 죽었느냐?"
묘묘 공주의 얼굴이 굳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용호요종의 눈에 연민의 감성이 어렸다.
"이건 탈사이다. 먼저 생명을 빼앗아 가고 또 영혼을 빼앗아 간다.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탈사가 반은 성공한 것 구나."
"어떻게 구해야 하느냐?"
용호요종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묘묘 공주의 두 눈에 싸늘한 한기가 일었다.
"다시 묻겠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느냐?"
'이 사람을 구하겠다는 말인가?'
용호요종은 묘묘 공주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금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사람은 이미 생기를 빼앗겼다. 혹시 선약(仙藥)을 사용하면 음양을 돌리고 이 사람의 생기를 부를 수 있지만, 생기를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계속 고통을……"
묘묘 공주는 손을 흔들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알았다."
"뭐 하려는 게냐?"
용호요종은 의문스러웠다.
"내가 구해주려고!"
묘묘 공주는 생기가 전혀 없는 진남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속에 있던 힘을 깨웠다. 그녀의 기세가 순식간에 변하고 위압이 일렁거렸다.
"뭐 하는 거야."
용호요종은 놀라서 물었다.
"공주의 몸속에 근원의 힘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다친 상태인데 그 힘을 깨우면 좋지 않아. 그리고 공주가 근원의 힘을 사용한다고 해도 크게 도움되지 않을 거야."
묘묘 공주는 그의 말을 못 들었는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래된 밀어(密語)를 외웠다.
"이 세계는 일화일초, 일석일사 다 조화이다. 나도 조화로 이루어졌다. 오늘 조화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근원을 부른다. 천지는 내 부름을 들었다면 응답하라……"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방원 십 리에서 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초, 나무, 모래가 끊임없이 빛나고 진동하며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는 듯했다.
기이한 힘이 그녀의 사방에 솟아올랐다.
"구전령(九轉靈), 영전선(靈轉仙), 선전력(仙轉力), 근본의 힘! 각성하거라!"
묘묘 공주의 눈동자에 강렬한 보라색 빛이 번뜩였다.
그녀의 몸에서 엄청난 힘이 각성하여 오색찬란한 빛이 되었다.
빛이 그녀를 겹겹이 감싸더니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 나면서 영롱한 긴 수염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 수염은 끊임없이 퍼져나갔는데 생기가 넘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묘묘 공주가 인삼으로 변했다. 인삼은 한 길 높이까지 자랐고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서 백옥 같았다. 인삼 뿌리에는 무려 삼천 개의 긴 수염이 생겨났는데 각 수염은 두 장이나 길어졌다. 뿌리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모습은 마치 백화가 만발한 것 같았다.
"이건……!"
이 모습을 본 용호요종은 경악해서 소리쳤다.
"본 모습이 구령전선삼이었구나! 생각났어, 드디어 생각났어! 유실(遺失) 약원(藥園)의 공주구나! 근데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아직 이 세상에 있는 거지? 넌 이미……"
"구전령수(九轉靈須)로 사라진 생기를 부른다."
바닥에 길게 뻗은 삼천여 갈래의 수염이 순식간에 펼쳐지더니 수십 장에 달하는 빛으로 변했는데 마치 흐르는 강물 같았다. 그 빛들은 형언할 수 없는 생기를 풍기더니 전부 진남의 체내로 들어갔다.
"미쳤어!"
용호요종은 그 모습에 그녀의 신분을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놀래서 소리를 질렀다.
"이건 스스로 근본을 망치는 짓이다! 아무리 네가 구령전선삼이라고 해도 이렇게 하면 중상을 입어서 회복하기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것이야!"
묘묘 공주는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이냐! 저자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잖느냐! 저자의 생사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도대체 왜 네가 근본의 힘을 낭비하면서 살리려고 하는 게냐! 혹여 네가 저자를 살린다고 해도 회복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용호요종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