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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전혼-134화 (134/1,498)

134화 상자를 열다

"좋습니다."

진남은 힘겹게 충동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진남은 흰색 나무 상자에 무슨 신물이 들어있어 그를 흥분하게 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게 억제했다.

"너희 둘은 준비됐느냐?"

구자진언 기영은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용호효종과 묘묘 공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번 심사는 한 사람만 이길 수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다 죽는다."

"참가하겠다."

묘묘 공주는 무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게……"

용호요종은 살짝 놀랐다. 그는 구자진언 기영이 진남을 대했던 태도와 그가 받은 신물을 생각하니 이번 심사에 진남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느꼈다.

용호요종은 참가하면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

으르렁!

용호요종이 마치 천룡맹호가 포효하듯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분노가 가득 찬 얼굴로 진남을 쳐다봤다.

"나는 천룡뇌호의 후손이고 미래에 세상을 정복할 존재이다. 그런데 고작 이딴 심사에서 선천 경지의 녀석보다 못하겠느냐? 이번 심사에 참가해서 반드시 네 놈을 발아래 둘 것이다!"

진남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용호요종을 바라봤다.

'내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왜 나한테 성질을 내는 거야?'

"그럼 심사를 시작하겠다."

구자진언 기영이 동시에 힘껏 발을 굴렀다. 그리고 손을 흔들자 하늘을 찌르는 힘이 진남, 묘묘 공주, 용호요종 세 사람을 감싸더니 휙 하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구 층 대전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형님, 이번 심사는 왜 하는 겁니까? 설마 진남을 우리 후계자로 삼고 싶습니까?"

구자진언 기영 중의 한 기영이 입을 열고 물었다.

그 기영은 '병(兵)'자의 기영으로 구자진언 중 서열 이 위였다.

기타 기영들도 동시에 의혹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임(臨)'자 기영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진남을 우리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 너희들도 그 신물의 위엄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것을 알잖느냐. 우리 아홉 글자가 짊어진 사명은 진남에겐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 다만 이번 심사는……"

'임'자 기영은 호흡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번 심사는 내가 제시한 게 아니다. 바로 그 신물이 스스로 진남을 심사하겠다고 한 거다."

"네?"

나머지 여덟 글자의 기영은 놀랐다.

"왜 진남에게 심사를 진행하는 겁니까? 그 신물은 진남이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심사하는 겁니까?"

다른 기영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도 잘 모른다."

'임'자 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그 신물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아."

나머지 여덟 글자 기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아까 말씀하신 대로 진남이 그 신물의 후계자라면 우리의 사명을 짊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남이 아직 창람대륙에 있으니 차라리 우리의 사명을 그에게 전하여 좋은 인연을 맺는 건 어떻습니까? 저는 진남이 그 신물의 주인으로서 우리의 사명을 쉽게 완수하리라 믿습니다."

'병'자 기영이 천천히 말했다.

다른 진언 기영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일단 그 신물과 진남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꾸나."

'임'자 기영이 대답했다.

한때 구자진언은 수많은 천재들이 주목하는 기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 발로 찾아가 상대방의 태도를 살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구자진언 기영이 진남의 물건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이들의 영광이었다.

'임'자 기영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에는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경외가 드러났다.

* * *

진남은 몸 전체가 강대한 힘에 휩싸여 허공을 찢고 그 사이를 누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전송대진을 타는 것 같았다.

휙!

진남의 몸이 가벼워지더니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젠장!"

진남이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옆에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진남과 멀지 않은 곳에는 용호요종이 바닥에 넘어져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용머리는 땅으로 파고 들어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용호요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는 머리가 복잡하여 생각을 정리하느라 땅에 떨어질 때 넘어진 것이었다.

"하하하!"

진남과 묘묘 공주가 동시에 폭소했다.

'요종 강자가 바닥에 널브러지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구나.'

진남과 묘묘 공주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봤다. 묘묘 공주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경국지색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진남은 묘묘 공주에서 시선을 거두자마자 안색이 확 달라졌다.

'이상하다? 용호요종은 요종 강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한 진남은 곧 용호요종의 온몸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경지가 전부 봉인되어서 일반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용호요종이 어떻게 넘어질 수 있나 했더니 경지가 봉인됐군."

용호요종도 알아차렸다.

묘묘 공주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어이! 나 좀 기다리거라."

용호요종이 뻔뻔스럽게 먼저 다가갔다.

진남은 두 사람이 멀리까지 가기를 기다려 주위를 살폈다. 그는 주위가 온통 풀밭인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품에서 흰색 나무 상자를 꺼냈다.

진남은 심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흰색 나무 상자 안의 물건에만 관심을 가졌다.

진남은 임수성에서 태어나 큰 배경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전신의 혼을 제외하고는 기우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물건이 천 년 전부터 그를 기다렸을까?

진남은 본능에 못이겨 떨리는 손으로 흰색 나무 상자를 확 열어젖혔다.

그 순간 천지가 변했다.

* * *

묘묘 공주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두 눈에 미동이 없이 진지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존귀한 기운은 여전히 특별한 매력을 풍겼다. 용호요종은 묘묘 공주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용머리를 흔들며 아첨했다.

"경지는 봉인됐지만 난 여전히 감지할 수 있다. 이곳은 방원 백 리에 요수도 없고 수사도 없다. 그저 황량한 섬이야."

"……"

묘묘 공주는 용호요종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용호요종의 허세가 극에 달했다.

"용호산맥을 종횡무진 누비던 시절의 나는 정말 어마어마했어. 방원 만 리 이내에 수천 마리의 요왕이 모두 내 아우들이었지. 그들의 보물이 곧 내 보물들이었고……"

용호요종은 자신을 뽐내며 계속 중얼거렸는데 전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묘묘 공주가 발걸음을 멈췄다. 용호요종은 신이 났다.

'끈질기게 허세를 부렸더니 과연 효과가 있군. 역시 옛사람들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어. 여인을 꼬시려면 낯짝이 두꺼워야 해.'

묘묘 공주는 말없이 몸을 숙였다. 금빛 긴 치마가 몸에 감겨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보여주었다.

용호요종은 구리 방울만 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어서 벌어진 일에 용호요종은 실망했다. 묘묘 공주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말없이 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손을 뻗어 바닥에서 보랏빛 작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이건 정령화(精灵花)다. 이걸로 뭘 하려는 거냐? 아무 작용도 없는 식물이다. 설마 이 꽃을 좋아하는 거냐? 나한테 말하지 그랬느냐? 용호산맥에 뒷동산이 있는데 전부 정령화란다. 너에게 다 줄 수도 있는데……"

용호요종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후!

묘묘 공주가 보랏빛 정령화를 들고 입김을 불자 꽃에서 한 줄기 빛이 나오더니 손바닥만 한 사람의 허영으로 변했다. 그 주변으로 빛을 풍기는 것이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기영을 부르는 거냐?"

용호요종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정령화지영(精灵花之灵)이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묘묘 공주와 대화를 하는 듯하더니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묘묘 공주는 무표정으로 그 정령을 따라갔다. 넋을 놓고 있던 용호요종도 정신을 차리고 쫓아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황량한 섬에 있는 유일한 숲에 도착했다.

숲속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비석은 높이가 한 장이나 되고 황토색이었는데 무척 무거워 보였다. 비석은 바닥을 짓누르고 있었다.

비석 아래에는 간판이 세워져 있고 간판에는 큰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이 비석을 부수는 자가 이번 우승자이다.

용호요종은 그 글을 읽더니 만면의 희색을 띠고 웃어댔다.

"이게 무슨 개똥같은 심사냐. 너무 쉽구나. 지금 당장 내 방대한 힘으로 이 비석을 부숴버리겠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용호요종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거대한 몸에서 순식간에 힘을 폭발시키며 호권(虎拳, 호랑이 주먹)을 날렸다. 주먹은 방대한 힘을 싣고 비석을 가격했다.

지금의 용호요종은 아무런 경지가 없었지만, 원체 육신의 힘이 대단했다.

묘묘 공주는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입가에 빈정거림이 비꼈다.

쿵!

굉장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요수 몸을 가진 용호요종이 순식간에 뒤로 날아가 땅에 넘어졌다.

거대한 비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개자식! 짐승 같은 놈!"

용호요종은 몸을 뒤집더니 하늘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이 비석을 깨뜨리려면 적어도 무왕 경지의 힘이 있어야 한다. 지금 나는 경지가 봉인되어 보통 사람과 같은데 어찌 깨뜨릴 수 있겠느냐! 구자진언 기영, 너희들이 날 놀리는 거구나!"

묘묘 공주는 거른 용호요종을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좀 전에는 고작 비석이 아니냐고 경지가 봉인됐다고 해도 손쉽게 깨뜨릴 수 있다고 하더니."

용호요종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용각(龍角)을 붉히며 연신 해명했다.

그때, 두 사람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태고의 청색 빛이 지상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빛은 허공에 꽂히더니 쿵쿵쿵 하는 거대한 울림을 냈다. 마치 벼락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건……!"

용호요종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빌어먹을! 그놈의 신물을 잊고 있었군."

용호요종은 묘묘 공주를 유혹하겠다는 생각에 집중하느라 이제야 보잘것없는 인간이 신물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휙!

용호요종이 놀란 사이 묘묘 공주가 몸을 신속하게 움직여 빛이 하늘로 치솟는 곳으로 향했다.

"젠장!"

용호요종은 욕설을 퍼붓고 힘차게 내달렸다.

용호요종은 천지의 위엄을 풍기고 구자진언을 굴복시킨 신물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시각, 천지를 뒤흔든 파동의 중심.

진남은 나무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을 봤다. 흰색 나무 상자를 든 그의 두 손이 마치 충격적인 것을 본 듯 심하게 떨렸다.

진남은 천 년 동안 자신을 기다려온 물건이 그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진남은 그것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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