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종문을 뒤흔든 차용증
궁양이 떠나자 진남은 쉬지 않고 전신의 혼을 풀어 수련하기 시작했다.
진남은 냉봉과 생사전에서 결전하기로 했다. 두 달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는 반드시 경지를 높여야만 했다.
그런데 진남이 수련하려고 하자 백횡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횡은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오십 개의 무왕단 옥병을 꺼내며 말했다.
“진남 공자, 힘의 열매 다섯 알로 사천 알의 무왕단을 바꿔 왔는데….”
“사천 개의 무왕단으로 바꿔 왔다고요? 잘했습니다.”
진남은 기쁨의 눈빛으로 그 단약들을 모두 주머니에 넣었다.
백횡은 머뭇거리다가 걱정하듯이 말했다.
“그…, 진남 공자. 냉봉과 결전하는 게……”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문제 없으니까요.”
진남이 웃었다.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 다음에 얘기하죠.”
“맞아, 그렇지. 난 이만 가도록 할게.”
백횡이 서둘러 물러났다. 진남의 담담한 모습을 본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사라졌다.
백횡은 진남이 신처럼 느껴졌다. 두 달 뒤에 냉봉과 결전한다면 진남이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다.
백횡이 떠나자 진남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십 알의 무왕단을 꺼냈다.
“현급 무혼을 돌파하는 건 질적인 도약이지만 삼천 알의 무왕단이면 충분하겠지?”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전신의 눈을 각성시키는 데만 만 알의 무왕단을 복용했다는 거야. 이번에는 그렇게 많은 단약이 필요 없어야 할 텐데……”
진남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손을 뻗어 무왕단을 입에 넣었다.
전신의 혼이 살짝 떨리고 오묘한 흡입력이 폭발하여 무왕단의 약효를 모두 흡수했다.
진남은 끊임없이 단약을 삼키기 시작했다.
천 알.
이천 알.
삼천 알.
삼천팔백 알을 삼킬 때가 돼서야 진남의 행동이 멈췄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났고 얼굴에는 모처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삼천팔백 알의 무왕단을 복용했지만, 전신의 혼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백 알의 무왕단이야. 반드시 돌파해야 해……”
진남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상당히 긴장했다.
이백 알의 무왕단을 복용한 뒤에도 전신의 힘을 돌파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서든 단약을 다시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남은 눈을 감고 마지막 무왕단 이백 알을 단숨에 입에 넣었다.
하지만 전신의 혼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돌파하지 못했어…….”
진남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가난해서 무왕단 한 알 한 알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무왕단을 모아야 했다. 전신의 혼을 현급 무혼으로 승급해야만 냉봉과의 대결에서 승산이 있었다.
바로 그때, 앳되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역시 나의 하인답게 용기가 있네! 선천 경지 일 단계가 선천 경지 칠 단계와 싸우려 하다니. 용기가 대단해! 근데 두 달 뒤엔 하인을 바꿔야 할 것 같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기는 말투였다.
그 사람의 정체는 묘묘 공주였다.
묘묘 공주를 보자 진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망을 본 듯 다급하게 물었다.
“공주! 내게 단약을 좀 빌려줄 수 있어?”
묘묘 공주는 전주, 장로에게서 약탈해 팔십 그루의 천정화를 얻었다. 그리고 그녀는 추산의 무종급 요수 대전에서 지보를 얻었다. 무연각에서는 상도맹과 도박을 벌여 엄청난 단약을 벌어들인 영락없는 부호였다.
만약 묘묘 공주가 단약을 빌려준다면 진남은 전신의 혼을 현급의 무혼으로 돌파시킬 자신이 있었다.
묘묘 공주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찡긋하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지금 가난하다. 아주 가난하다고. 네가 하인으로서 성실하게 단약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내가 네게 단약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
진남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였는데 그녀는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가난하다고? 웃기지 마.’
“단약이 없다니 됐어.”
진남은 눈을 감고 차갑게 말했다.
“이제 수련을 시작해야 하니 넌 마음대로 해.”
묘묘 공주는 진남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주 가난하지만 그래도 방법이 하나 있지. 그 방법을 사용하면 무왕단을 팔만 알이든 십만 알이든 적을 힘을 들여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진남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고맙지만 필요 없어.”
진남은 묘묘 공주가 단약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정말 듣고 싶지 않느냐? 이 방법을 쓰면 단약을 구해오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게다가 내 하인이 다른 사람과 싸움을 하는데 당연히 널 이기게 해야지. 그리고 이 방법을 들어본다고 해도 네가 손해 볼 것도 없다.”
묘묘 공주는 노심초사하며 진남을 설득했다.
진남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말해봐.”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네가 차용증을 하나 작성해서 외문 장로, 내문 장로 그리고 각 전주들에게 전달하면 된다. 넌 내 하인이기도 하고 그 늙은이의 이름뿐인 제자이기도 하지 않느냐? 다른 사람들이 너의 이런 배경이 마음에 걸려서라도 단약을 빌려줄 거다.”
묘묘 공주는 말을 마치며 두 눈을 반짝였다.
“이게……방법이라고?”
진남은 황당했다. 묘묘 공주의 방법은 좋게 말하면 빌려주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강도질이었다.
그리고 진남은 원체 가난해서 종문 사람들을 동원해 단약을 빌리면 나중에는 갚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묘묘 공주는 진남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이건 빌리는 거지 약탈하는 게 아니다. 나중에 돌려줄 수 있잖아. 난 전에 이 방법으로 형벌전 전주와 그 장로들에게서 많은 단약을 빌려왔다.”
묘묘 공주는 당당하게 말을 내뱉었다.
진남은 입가가 떨렸다. 그는 묘묘 공주에 대한 인식을 다시 바꿨다.
“내 기억에 넌 남을 먼저 도와준 적이 없어. 솔직히 말해. 네 목적이 뭐야.”
진남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묘묘 공주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묘묘 공주는 성난 눈으로 쏘아봤다.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잘했다. 내가 너를 몇 번이나 구해줬는지 잊어먹은 거야?”
그 말을 듣자 진남은 침묵했다. 그가 여러 차례 결정적인 순간에 묘묘 공주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볼게.”
진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보자 묘묘 공주의 노여움은 삽시에 풀렸고 교활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 * *
형벌전, 작은 정원 안.
소냉과 초운이 마주 보고 앉았다. 그들 뒤로는 무혼이 떠 있었고 영기를 뿜으며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지난번 진남이 무연각의 모든 층을 통과하자 이들 둘은 큰 압력을 느꼈다. 그래서 폐관 수련으로 경지를 높이려고 했다.
이때,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구냐!”
소냉과 초운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떴다. 나타난 사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순간 당황했다.
그림자는 묘묘 공주였다.
묘묘 공주는 방긋 웃으며 그들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진남이 너희들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
소냉과 초운은 어안이 벙벙했다.
두 사람도 당연히 묘묘 공주를 알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기에 묘묘 공주에게 부탁한 거지?’
두 사람은 의문스러웠다.
두 사람은 의문을 가지고 손을 뻗어 편지를 펼쳤다. 편지를 본 두 사람은 황당했다.
‘단약을 빌려달라고?’
* * *
형벌전 의사대전.
형벌전 전주가 제일 윗자리에 앉고 그 아래에 형벌전의 각 장로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 달 동안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했다.
그때, 작은 몸집을 가진 사람이 대전 중앙에 나타났다.
장로들은 순간 놀랐지만 이내 노기가 치밀어올랐다.
‘대체 누가 감히 의사대전에 쳐들어온 게냐!’
형벌전 전주는 버럭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작은 몸집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자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느라 웃긴 얼굴이었다.
“공, 공주 전하? 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형벌전 전주에게 묘묘 공주는 악몽이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른 장로들은 전주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령종에서 공주라고 불릴 사람은 제멋대로라는 소문만 무성한 명예 장로뿐이었다.
장로들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공주는 제멋대로라고 유명하잖아, 여기에 왔다는 건 틀림없이 좋은 일은 아닐 거야.’
“어머, 다들 여기 있었네? 마침 잘 됐다.”
묘묘 공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하인 진남을 대신해 너희들에게 편지를 전하러 왔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진남 대신 편지를 전하러 왔다고? 진남이 어떤 편지를 썼기에 묘묘 공주가 직접 온 걸까?’
묘묘 공주가 손을 흔들자 무수한 편지들이 나비처럼 날아가 사람들 손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편지를 펼치더니 얼굴이 굳어지고 입가가 떨렸다.
‘차용증? 단약을 빌려달라고?’
* * *
한 주 향이 타는 시간이 흐른 뒤, 묘묘 공주가 공법전에 나타났다.
또 한 주 향이 타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보전에, 그리고 이어서 공로전, 생사전에 나타났다.
한 시진이 채 되지 않는 동안, 묘묘 공주는 현령종의 여섯 대전 중 다섯 곳에 나타났다.
그녀는 다섯 대전에 나타나서 한 가지 일만 했다. 그녀의 하인 진남 대신 편지를 전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똑같았다. 바로 단약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다섯 대전의 사람들은 모두 어이없었다. 제자들이나 장로들이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단약을 빌리기 위해 무종 경지의 강자에게 편지 심부름을 시킨 사람은 진남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외원 도장과 내원봉에 가서도 제자들에게 차용증을 내밀며 단약을 빌려달라고 했다.
현령종 전체가 조용할 수 없었다.
자칭 명예 장로라는 여자애가 진남이 보냈다는 편지를 외원봉에서 내원봉, 외문 장로에서 내문 제자들까지 받게 됐다.
현령종에서 눈에 안 띄는 제자나 이름 자자한 천재, 혹은 권력과 신분이 높은 장로들까지 모두 진남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한 가지 내용밖에 없었다. 바로 단약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낙하 왕국의 사대 종문 중 하나인 현령종이 편지 하나에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모두 진남에게 단약을 빌려줘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 * *
‘단약 사건’의 주인공인 진남은 제삼 정원에 앉아 묘묘 공주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묘묘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내 하인이 이렇게 능력이 좋을 줄이야. 빌려온 단약이 꽤나 많구나.”
“얼마나 돼?”
진남은 묘묘 공주가 시키는 대로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남은 단약을 빌려야만 전신의 혼을 현급 무혼으로 승급시킬 수 있었다.
진남은 빌려온 단약을 다 갚아주겠다고 속으로 몰래 맹세했다.
그는 빚을 지는 게 싫었다.
“무왕단 오십만 알이다.”
묘묘 공주는 놀라운 말을 쉬지도 않고 내뱉었다.
“뭐? 무왕단이 오십만 알이라고?”
진남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