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32. 약도 때론 독이 된다(4)
치이이이이이익~
김 비서가 올린 붉은 소고기가 버터가 녹아 있는 불판에 놓이자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기 시작한다.
그녀는 갖은 양념을 뿌리다가 아랫 부분이 약간 탔다 싶을 정도로 노릇노릇하게 익자 고기를 뒤집었다.
‘고기 집에서 일한 적이 있나?’
비서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고기와 야채가 익자 나이프로 먹고 좋게 썰어서 접시에 담아 고연아의 앞에 놓였다.
포크를 들고 고기를 찍은 고연아가 두삼을 봤다.
“제대로 잘 익은 것 같네요. 연아 씨가 원한다면 익었는지 확…….”
“…준비가 됐는지 확인하려고 쳐다본 건데요.”
“…….”
이런 개망신이.
고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에 잠깐 이성의 끈을 놓은 모양이다.
“드려요?”
“아, 아뇨. 맛있을 때 얼른 먹어요.”
고연아는 고기를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한데 두려운지 입에 넣진 못했다.
“조치는 순식간에 이루어질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말고 먹어요.”
두삼은 그녀의 등에 살짝 손을 올렸다.
다소 안심이 되었을까, 그녀는 TV로 시선을 돌려 노형진이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을 본 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고기를 씹는 아주 평범한 행위였지만 그녀의 뇌파를 확인하고 있는 두삼은 살짝 긴장을 했다.
현재 그녀의 머릿속은 전쟁터였다.
‘거부하라!’는 신호와 ‘맛있게 먹어라!’는 두 개의 신호가 몸으로 연신 향하고 있었다.
고연아는 고기를 입에서 다 소화시키려는지 쉽게 삼키지 못했다. 하지만 뱉지 않는 이상 결국은 삼켜야 했다.
꿀꺽! 형체를 잃은 소고기는 식도를 타고 위로 내려갔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는 원 여사도, 김 비서도, 당사자인 고연아도 긴장했다.
“……!”
뇌파 전쟁의 승리자는 ‘맛있게 먹어라!’였다.
“어서 더 먹어봐!”
원 여사의 말에 고연아는 다시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적당히 씹다가 삼켰다.
물론 이번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고연아의 고기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토해라!’, ‘먹지마라!’라는 신호는 점점 약해졌다.
접시를 깔끔히 다 피웠다.
두삼은 손을 떼며 말했다.
“축하해요. 방금 거식증을 이겨냈어요.”
“…이렇게 쉽게요?”
“쉽진 않았던 것 같은데요?”
조금은 어이없는 방법으로 거식증을 이겨냈지만 쉬웠다고 보기엔 그동안 고생이 너무 많았다.
“…얼떨떨해요.”
“솔직히 나도 그래요. 하지만 저 영상만으로 거식증이 나았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연아 씨가 살기 바라는 마음이, 낫길 바라는 의지가 더해졌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두 번 다시 아프지 말아요. 알았죠?”
“…노력할게요. 그리고 고마워요, 한 선…….”
고연아가 고맙다는 말을 할 때 원 여사의 기쁨의 함성이 터졌다!
“드, 드디어…! 딸,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나아줘서, 이겨줘서 고마워! 흑!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환호는 곧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다.
“…왜, 왜 울고 그래?”
“기뻐서 그런다, 이것아! 흑!”
“울지 마! 엄마가 울면…….”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을 삐쭉거리던 고연아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안겨오는 원 여사를 껴안았다.
“…내, 내가 미안하잖아. …엄마, 미안해! 진짜! 미안해. 흑! 서, 선생님 말씀처럼 두 번 다시 아프지 않도록 열심히 살게. 흐윽!”
흐느끼던 두 사람은 곧 엉엉!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말을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울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두삼은 조용히 일어났다. 슬쩍슬쩍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 비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병실에서 나왔다.
“…하란이랑 소고기나 구워 먹을까?”
지금 들어가서 먹으면 늦은 야식이 될 게 뻔했다. 그러나 오늘은 소고기가 당겼다.
* * *
어제 늦게까지 소고기와 함께 술을 마셔서인지 얼굴이 살짝 부었지만 두삼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운이 좋은지 모든 일이 한꺼번에 해결이 되면서 아주 여유로워졌다.
저녁에 하던 뇌전증 치료를 오전이나 점심을 먹은 직후에 한다면 퇴근도 제 시간에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졌으니 당연했다.
아침에 고연아를 만나 아침을 잘 먹었는지 확인하고 운동량을 늘이라는 말을 한 후 나왔다.
벌써 가느냐고 고연아가 묻기에 성형시술에 대한 얘기를 해줬지만 그래봐야 5분이면 충분했다.
회진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본관의 의사들과 달리 두삼은 푸드코트로 가서 여유롭게 앉아 고구마 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했다.
‘시작해 볼까?’
뇌전증 치료를 하면서 뇌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봤다. 그래서 대략 어느 위치에서 과한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면 어떤 증상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두삼은 자신의 뇌를 관조했다. 그리고 현미경의 줌을 높이듯 뇌의 내부를 봤다.
연신 전기적 신호를 내뿜는 신경세포를 보고 있자니 새삼 신비롭다.
‘자! 일단 너부터 해볼까?’
두삼은 자신의 신경세포 중 하나에 전기적 신호를 더했다.
지직! 지지직! 지직!
하나의 세포가 과신호을 발하며 순식간에 주변의 신경세포들의 신호를 교란하며 퍼져 나갔다.
그때 두삼의 눈이 파르르 떨리면 제멋대로 감겼다 떴다를 반복했다.
‘음, 여긴 곤란하겠다.’
신호를 끊자 금세 눈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몇 군데를 테스트해 본 결과 이마 쪽에 순간 찌릿해지면서 마비되는 신경세포군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마 케이크와 커피를 마셨다.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고 마신 후 위로 내려간 음식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했다.
타인의 몸을 볼 때완 완전히 달랐다. 10배는 선명했고 일일이 파악을 할 수 없었던 신호들이 그냥 느껴지고 이해가 됐다.
‘헐! 내 몸이라 그런 건가? 신기하네.’
물론 자세히 살펴본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작은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모금이 일으키는 몸의 변화는 어마어마했다.
눈을 떼지 못할 만큼 황홀한 모습, 한데 그런 감동은 누군가가 등을 찰싹! 치면서 깨어졌다.
“케이크 한 조각 먹으면서 뭔 그런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냐? 케이크랑 연애해?”
돌아보니 이방익과 한방부인과의 성지숙이었다.
“…연애는 두 분이… 험! 여긴 웬일이세요?”
무섭게 올라가는 성지숙의 눈썹에 얼른 말을 바꿨다.
“한방부인과가 비만클리닉을 같이하고 싶다고 해서 얘기했다. 한 선생은 찬성이라고?”
“괜찮은 생각 같아서요.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험! 같은 식구끼리 반대하는 것도 우습지. 안 그렇습니까, 성 선생님?”
“그럼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혹시 서로 간에 이견이 생기면 대화로 해결하고요.”
“그래요. 전 먼저 갈게요. 두 분은 천천히 오세요.”
휑하니 가는 성지숙의 뒷모습을 이방익은 꽤나 오랫동안 바라본다.
“꽤 아름다운 분이시죠?”
“아름답기보단 매력적인… 큼! 하, 한 선생 혹시 연상을 좋아해?”
“딱히 나이를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성 선생님은 제 스타일은 아닙니다.”
“다행… 자네랑 어울리진 않지. 가지. 참! 이거.”
이방익이 봉투를 건넸다.
“입막음용 봉투입니까?”
“…입막음할 일이 무에 있다고? 이경도 셰프가 준 거야. 지난 토요일 날 한 선생이 결재한 금액이라더군.”
“이경도 셰프랑 또 싸운 겁니까?”
“싸우긴 누가 싸워. 이경도 셰프가 병원으로 찾아왔어. 그날 일 미안하다고 사과하더군. 그리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돈은 받을 수 없다고 주더군.”
“그래요? 근데 그렇다고 이렇게 주면 부담스러운데. 어찌 되었건 그곳에 가서 먹었잖아요. 그리고 굳이 주려면 카드를 취소하면 되지…….”
“사정이 있더라고. 투자를 받아 개업해서 매출은 어떻게 할 수가 없나 봐.”
말투가 어째 그를 옹호하는 듯하다. 그새 화해를 하고 친해진 건가?
“실력이 떨어진 이유도 설명했어요?”
“……! 그것 어떻게?”
그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식당에서 싸울 때 입맛을 잃었을 거라고 독설을 날리셨잖아요. 그때 이경도 셰프 반응을 보고 알았죠.”
“…그래?”
“이유가 뭐래요?”
“비밀이네.”
“그렇군요.”
비밀이라는데 뭐랄까.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한 선생 오늘 무척 한가해 보인다?”
“하하하! 한가합니다. 날씨가 풀리듯이 일이 술술 풀리네요.”
“오! 잘됐군. 그럼 침술 회의에 참석할 거지? 다른 과장들이 자네가 아닌 인턴이 왔다고 은근히 불만들이 많아.”
“네? 저의 참여 여부가 그리 중요한 겁니까?”
“우리 과가 미움을 받고 있어서 그래. 센터장님이 이번 달 매출액을 발표했는데 이번에도 압도적이었거든. 그래서 괜한 트집 잡는 거야.”
“몇 시인데요?”
“월, 수, 금 오전 7시 30분.”
“안 할래요. 저 바빠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3일 동안 포기하라고? 절대 못 한다. 또한 자신이 만든 혈 자리들을 모른 척하면서 회의를 하는 건 싫었다.
“수영 때문에? 저녁 시간으로 옮기면 되잖아?”
“차라리 회의 시간을 저녁으로 옮겨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퇴근을 얼마나 칼같이 지키는 사람들인데.”
“아무튼 저녁으로 옮기기 전엔 안 해요.”
“똥배짱은. 바쁘다고 할 테니까 한가하다는 얘긴 절대 하지 마.”
하여간 인간들 웃긴다. 매출액이 많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소리다. 근데 칭찬은 못 해줄망정 시기라니, 기가 찬다.
무시하기로 했다.
가급적 좋게 지내고 싶지만 시기심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과 친해질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두삼 자신이 잘되면 알아서 꼬리를 내릴 것이다.
“한 선생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책을 읽고 있던 양태일이 벌떡 일어나며 인사했다.
“응. 오늘부터 스케줄이 조금 바뀔 거야. 근데 무슨 책이야? 표지가 꽤 오래되어 보이는데?”
“…조부님이 쓰신 책입니다.”
“그래? 한의원 집안이었구나? 자식! 안 봐. 굳이 그렇게 숨기려 안 해도 돼.”
손을 꼬물꼬물 움직여 책을 치우려는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 역시 할아버지의 진료 기록을 남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으니 이해했다.
“…죄송합니다. 커피 갖다드릴까요?”
“커핀 마셨으니깐 됐고. 침술 회의에 대해서 말해봐. 분위기 어때?”
“흥미를 가지는 선생님들 절반, 관심 없어 보이는 선생님들이 절반입니다. 그리고 젊은 선생님일수록 관심이 많으시고요.”
“그래? 테스트는 해봤고?”
“예. 한데 위험성과 자존심 때문인지 젊은 선생님 몇 분만 실험에 참여했는데 부분, 전신 모두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누구?”
“침구과의 임동환 선생님이요. 중국에서 경험이 있었다고 하지만 단번에 성공했습니다. 교수님들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깔끔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큼 실력이 있나 보다.
“그래? 넌?”
“인턴인 제가 나설 자리는 아닙니다. 다만… 혈 자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시침할 자신도 있고요.”
“그래서 나보고 침상에 누우라는 소리냐?”
“…아, 아닙니다.”
“아니면 말고. 그렇다고 했으면 실력이나 한번 볼까 했더니.”
“…할 자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좋아!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특별히 실험체가 되어줄게. 대신 왼쪽 팔 마취만이다.”
두삼은 가운을 벗고 윗옷까지 벗었다.
“해봐!”
“네! 왼팔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마사지를 배울 때와 비슷하게 침을 배울 때도 대부분 동기의 몸에 꽂는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쓰기도 하지만 상당히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해야 했고 반드시 책임자의 입회하에 이루어졌다.
간단한 결림 시침도 그럴진대 위험한 마취 시침을 구하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양태일은 며칠 전과 달리 신중하게 침을 꽂았다.
결과는 두 개의 시침이 잘못됐다.
“이런, 팔이 움직이네?”
“…다시 해보겠습니다.”
“됐거든. 수술실에서 다시 한다고 말하면 환자가 좋아 하겠다. 안마실에서 배운 거나 완벽하게 해. 그다음 다시 말하고.”
다른 곳과 달리 마취를 할 때 한 번의 기회뿐이라고 생각하고 긴장해야 했다.
기분 좋게 시작해서인지 일과가 끝날 때까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오늘은 약속대로 이준호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로 하고 그의 병실로 갔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오늘은 발걸음에서 여유가 느껴지네요.”
이준호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 머리를 말리고 있다가 반겨줬다.
“하하하! 준호 씨는 못 속이겠네요. 어제는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시간 넉넉하니 오랫동안 치료를 해보죠.”
“전 선생님이 봐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일단 확인부터 할게요.”
그의 안경을 벗기고 기운을 눈 부위에 넣어 살폈다. 그런데 말랑말랑했던 노폐물이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딱딱해지고 약간 뚫어놨던 부분에도 새로운 노폐물로 채워져 있었다.
“커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한동안 투자했던 시간이 무위로 돌아가는 순간이었기에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