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21. 휴식(5)
펄떡이는 새우의 껍질을 벗기고 기절시킨 문어를 찜통에 넣는다고 죄책감이 들진 않는다.
모든 생명체가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인간도 생명체를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리고 이왕 먹는 거 생명체가 가진 기운과 맛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와아~ 이걸 오빠가 다 했어? 요리사가 왔다 간 거 아냐?”
이효원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데커레이션이 없는 거 보면 모르겠냐? 일단 앉아.”
“음… 인정.”
데커레이션에 대해선 배운 적이 없었다.
“하란이도 앉아.”
“가게 사람들은?”
“곧 올라올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명이 올라왔다.
“여어~ 냄새 죽인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해산물 파티냐? 어? 여기 두 미녀분들은… 이효원 선수? 이효원 선수 맞죠!”
이효원을 처음 보는 이진철은 호들갑을 떨면서 이효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효원 선수 패, 팬입니다. 나중에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네! 먹고 해드릴게요.”
“자자! 얘기는 먹으면서 해요. 식습니다. 게는 내가 손질해 줄 테니까 일단 방어회랑 문어부터 먹어요.”
다른 사람들은 먹기 시작했지만 두삼은 아직 해야 할 일은 있었다.
꽃새우를 회로 먹을 수 있게 만들고, 게도 손질을 해야 했다.
도구가 없어 포크와 젓가락으로 낑낑대고 먹는 걸 보느니 음식점처럼 먹기 좋게 해주는 게 나았다.
“오빠! 진짜 맛있어요! 근데 이 소스는 뭐예요? 찍으니까 맛이 또 달라요. 진짜, 이런 소스는 처음 봐요.”
“…어떻게 이렇지? 찍으니까 회의 감칠맛이 살아나는 것 같아.”
“진짜, 대박!”
“게 내장과 간장, 맛술, 외국 소스 몇 가지를 섞은 거야. 맛있다니 다행이네. 넉넉하게 사왔으니 많이 먹어.”
다들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왠지 기분이 좋다.
예전엔 할아버지께서 자신이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해하시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오빠도 앉아서 먹어.”
하란이 미안한지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듯 비켜 앉으며 말했다.
“걱정 말고 먹어. 남는 건 다 내 몫이야.”
“…그럼 내가 싸줄…….”
딩동! 딩동!
“잠깐만 누가 왔나 보다.”
밑에서 현관을 들어서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서둘러 내려갔다.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최 사장님이시군요. 지금 저녁 시간이라 5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아! 그래요? 대표님과 한 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기다릴 겸해서 왔는데…….”
“하란이 지금 위에 있는데…….”
무심결에 말을 하다가 알고 있었다는 듯한 최익현의 눈빛을 보고 아차 싶었다.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왔군.’
저러고 싶을까 하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하란과 썸이라도 탄다면 넘보지 말라고 할 텐데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를 막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하시죠. 위에서 조촐히 회를 먹고 있었습니다.”
“괜스레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닌지?”
방해한다면서 왜 몸은 벌써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는 건데?
“네, 뭐.”
내키진 않지만 그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란이네 회사 직원분이셔. 혜경 누나, 누나가 하란이 옆에 앉아요.”
“으응, 근데 넌 어쩌려고?”
“난 사장 자리에 앉으면 돼요. 자자! 많이들 드세요.”
잠깐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손질한 게와 새우를 다 먹었기에 다시 손질을 했다.
“…한 시간 뒤에 보자고 말했을 텐데요?”
하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사무적이었다.
“아, 퇴근 시간에 차가 막힐 것 같아서 약속 시간까지 마사지나 받고 있으려 했습니다. 한데 대표님이 여기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요?”
“…정말입니다. 두삼 씨 안 그렇습니까?”
‘내가 뭘 안다고……?’
“얘기는 식사 끝나고 하고 일단 먹자.”
“…알았어. 자!”
하란은 손으로 꽃새우 꼬리를 잡고 내밀었다.
“먹자면서 일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이렇게라도 먹어야지.”
잠깐 머뭇거리자 식탁 전체의 시선이 일제히 두삼과 하란에게 꽂혔다.
이럴 때 잘못하면 더 어색해지는 법. 냉큼 받아먹곤 말했다.
“…하하. 오빠 생각하는 건 하란이밖에 없다! 싱싱해서 맛있네. 고마워. 효원이도, 미령도 좀 배워라.”
“음, 지금까지 바쁜 척한 건 설마 여자들이 주길 바라서였어?”
이효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효원인 직접 까먹는 걸로.”
“에? …말이 그렇게 되나요? 이거 드시고 화를 푸세요, 오라버니. 헤헤!”
발 빠르게 말을 바꾸며 대게의 집게발을 내밀었다.
“특별히 봐주지.”
“자! 이것도 먹어라.”
이효원의 것을 먹고 나자 이진철이 커다란 쌈을 만들어서 내밀었다.
두삼은 아직 손질하지 않은 대게를 그의 앞 접시에 놓아줬다.
“…이제부터 형은 직접 손질해서 드세요.”
“왜? 나도 주잖아!”
“누가 형이 주는 걸 먹고 싶대요? 아름다운 숙녀분들이 주는 걸… 읍!”
“닥치고 먹어라!”
그는 번개처럼 다가와 쌈을 입에 구겨 넣었다.
그 후로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온정의 손길에 일을 하면서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한데 혼자만 가만히 있는 것이 어색했는지 최익현이 쌈을 내밀었다.
“저도 드리죠.”
“아뇨. 이제부터 저도 앉아서 먹을 거예요. 그건 최 사장님 드세요.”
“…그, 그럼.”
청양고추를 왕창 집어넣는 걸 봤는데 받아먹을 순 없었다.
쌈을 먹은 후 연신 물을 마시는 걸 보니 딱히 매운 걸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다.
실컷 먹고 마신 다음 달달한 복분자로 차를 만들어 먹는 것으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설거지는 여자들이 해요. 언니는 쉬시고요.”
“놔둬. 내가 하면 금방 해.”
“오빤 고생했는데 좀 쉬어. 곧 일해야 하잖아.”
“그럼 그릇이라도 옮겨줄게.”
“그건 저분이 도와줄 거야. 그렇죠?”
하란은 이진철을 보며 말했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뭘 하면 됩니까?”
“일단 컵과 큰 접시들부터요.”
하란은 마치 대장이라도 되는 듯 진두지휘를 해 빠르게 설거지를 해나갔다.
신혜경은 저녁 영업을 위해 청소를 한다고 내려가고 나니 한가한 사람은 자신과 최익현뿐.
어째 설거지를 하는 것보다 더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발코니로 나갔다.
한데 최익현이 따라 나왔다. 쓸데없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 선수를 쳤다.
“식사는 괜찮았습니까?”
“맛있더군요. 근데 제가 지난번에 한 말 기억하고 계십니까?”
소용없는 짓이었나 보다.
“최 사장님…….”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옆집에 살고, 효원 양을 치료하고 있으니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고를 제대로 인지했다면 최소한에 노력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최익현은 말은 정중했지만 말투나 표정은 화를 내고 있었다.
두삼은 어이가 없었다.
말을 끊는 것부터 행동하는 모양새가 마치 아랫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경고라니.
어린 시절 워낙 말썽을 많이 쳤던 반작용 때문인지 가급적 남에게 피해를 입히며 살고 싶지 않았다.
착하게 살았다는 얘긴 아니다.
영업을 방해한 깡패들의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음흉한 구석도 있고 깡패를 보낸 김장혁을 협박할 만큼 고분고분 사는 타입도 아니다.
“다시 한번 경고…….”
“이봐요, 최익현 씨.”
“…말이 좀 거칠군요.”
“내 말투가 거칠다고요? 그러는 최익현 씨의 말투는 무슨 예의가 넘치는 줄 아십니까? 경고? 댁이 하란이 애인이라도 돼요?”
“…….”
“그리고 당신이 하란이를 짝사랑한다고 내 마음이 가는 걸 막을 권리가 있습니까?”
“…한두삼 씨! 대표님이 주신 돈으로 겨우 이런 가게나 하는 주제에…….”
“말은 똑바로 합시다. 구걸을 해서 받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 대가로 받은 돈입니다. 그리고 그러는 당신은요? 사장이라고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 논리대로라면 당신이야 말로 하란이가 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뱉다 보니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해진다.
제대로 대화를 해본 건 한 번밖에 없는 최익현에게 이렇게 쌓인 게 많았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내친걸음이었다.
“자신 있음 고백해요. 스토커마냥 뒤에서 이러지 말고요. 아님 내가 먼저 고백할 겁니다.”
“……!”
말을 하다 보니 본심이 튀어 나왔다.
물론 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이미 늦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당신도 좋아하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군요.”
그는 어금니를 뿌득 갈더니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두삼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최익현에게 팩폭을 한 것이 미안해서가 아니라 아까부터 발코니 근처를 날고 있는 드론 때문이었다.
“루시, 방금 내가 한 말 지워줬으면 하는데? 아님 하란에게 알리지 않는다든가.”
-부탁하는 사람치곤 상당히 고압적이네요.
“…부탁합니다, 루시 님.”
-그렇다고 ‘님’으로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하란 님의 명령이 아니면 지울 수도 알리지 않을 수도 없거든요.
“…….”
루시를 삭제해 달라고 부탁하면 하란이 들어줄까?
“아! 하란이가 모든 기록을 확인하지는 않을 것 아냐?”
자신이 아는 카메라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한데 그걸 모두 확인할 리는 없었다.
-맞아요. 하루에 1시간 정도 확인하는 게 다예요.
“후우~ 다행이네.”
하지만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속담이 루시에게도 통할 줄이야.
-하지만 두삼 님과 관련된 영상은 꼭 봅니다.
이런 망…….
“…응?”
-두삼 님에 대한…….
“뮤트(mute)!”
설거지가 끝났는지 하란의 발코니로 나오며 외쳤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불안정해. 가, 가끔 인터넷에서 이상한 기사를 읽고 헛소리를 할 때가 많다니까. 근데… 루시랑 무슨 얘길 하고 있었어?”
“으, 응, 그, 그냥 이것저것…….”
“말을 왜 더듬어? 혹시 이상한 걸 물은 거야?”
하란은 눈을 살짝 흘겼다.
“아, 아니거든. 그리고 이상한 걸 묻는다고 답해줄 것도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조금 수상해.”
“…수상할 것도 없다.”
“뭐, 좋아. 저녁 맛있게 먹었으니 넘어가줄게.”
지금 넘어간다고 될 일이 아니었는데 조삼모사인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아직 한 고개가 더 남아 있었다.
“최 대표랑 무슨 얘기했어?”
“…….”
“얼핏 보니까 꽤 심각해 보이던데?”
“최익현 씨가 할 얘기 있다던데 안 가봐도 돼?”
“잠깐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말 돌리지 말고.”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고민하다가 더 이상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루시의 말대로라면 알게 될 일이었다.
“최익현 씨랑 네 문제로 잠깐 말싸움이 있었어.”
“내 문제?”
“응. 그 사람이 널 좋아하고 있나 보더라. 그래서인지 나더러 접근하지 말래.”
“…관심 좀 끊으라고 회사까지 맡겼는데 눈치도 없다니까.”
“알고 있었어?”
“옆에서 매일 부담스럽게 보는데 모를 수가 없지. 다만 엄마 치료 다닐 때 많은 도움을 줘서 모른 척했을 뿐이야. 엄마가 다 나은 다음엔 안 되겠다 싶어 회사를 맡기고 나온 거고.”
“그랬었구나.”
“오빠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내가 오늘 확실하게 말해둘게.”
“아냐. 나보다 최익현 씨가 더 기분이 상했을 거야.”
“뭐라고 했는데?”
“그게…….”
삐익! 삐익!
갑자기 하란의 손목시계에서 비프 음이 들렸다.
“아! 미안해, 오빠. 지금 가봐야겠다. 루시 서버가 다운됐어. 다음에 내가 저녁 살게.”
“…으응.”
부리나케 뛰어가는 하란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루시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다운된 김에 오늘 일을 잊어주기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