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21. 휴식(4)
* * *
클리닉은 특정한 병, 혹은 장애에 대해 진단하고 치료하는 곳을 뜻하는데 성장클리닉, 비만클리닉 정도가 예일 것이다.
좋게 보자면 특정한 병에 대해 집중적으로 예방과 치료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보자면 몇몇 클리닉은 돈벌이 수단의 하나였다.
이는 개설된 클리닉의 이름만 보더라도 능히 집작할 수 있다.
두삼은 클리닉을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이고 클리닉의 이름에 맞게 만족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사실 대학병원에서는 명성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는 여러 방법으로 환자에게 돈을 캐내는(?) 개인병원들도 많았다.
“저희끼리 결정한다고 되겠어요? 각 과마다 돈이 되는 클리닉을 하려 할 텐데요?”
성장클리닉, 비만클리닉, 피부클리닉, 갱년기클리닉 등은 상대적으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클리닉인데 한의학의 특성상 어느 과에서 해도 상관이 없었다.
“확실히 지킬 한 가지를 정하고 나머진 상황을 봐야겠지.”
“선생님이 염두에 두고 있는 클리닉이 뭔지 먼저 알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병원 일은 제가 문외한이나 다름없거든요.”
“현재 내가 운영하고 있는 의원에선 많은 것을 하고 있어. 비만, 성장, 피부, 어깨 질환, 허리 질환 등, 그중에서 가장 자신이 있는 건 비만과 어깨지.”
비만과 어깨라, 안마과 특성에도 잘 어울리는 곳이니 괜찮아 보였다.
“비만클리닉은 꼭 해보고 싶네요.”
“오! 그런가? 나의 경우는 식이조절과 함께 혈을 자극해 내장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만든다네. 그리고 안마를 통해 지방을 분해한 후 배출하게 만들지. 한 선생은 어떤 방법을 쓰나?”
“저라면 혈을 자극해 위의 움직임을 늦추는 방법을 사용하겠습니다.”
“응? 그게 가능한가?”
“배울 땐 침으로 배웠지만 안마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늦추게 되면 며칠이나 가나?”
“시술을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며칠은 입맛이 없을 겁니다.”
“오호! 한 선생은 정말 재주가 많아. 위 절제술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조금 전에 떠오른 생각이지만 위 절제술과 같은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포만감이란 결국 뇌의 작용.
포만감을 느끼는 부분을 찾아 조작할 수 있다면 수술 없이도 비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테스트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다른 한 가지를 더 떠올렸지만 지금은 그저 상상에 불과했다.
“한 선생은 비만 치료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의지죠.”
두삼이 생각하기엔 술, 마약, 도박을 끊지 못하는 것처럼 비만 역시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들에게 옆에서 아무리 먹는 것을 줄이고 운동하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결국 강제하거나 생존 본능이 일어나 살기 위해 살을 빼지 않는 이상 치료는 요원하다 얘기다.
물론 의지를 기르면 된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데 의지가 생기려면 적어도 가시적인 결과가 보여야 했다.
악순환의 고리랄까.
“잘 아는군.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혈을 자극해서 위의 움직임을 늦추는 방법도 훌륭해.”
“고맙습니다.”
“하지만 좀 약한 감도 있어. 비만 환자의 경우 음식에 대한 집착이 생각보다 강하거든.”
“인정합니다. 하다 보면 새로운 방법이 생기겠죠.”
나연섭의 경우처럼 나아야겠다는 의지로 인해 신체가 되살아나듯이 비만 환자의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혈을 자극해서 임의로 걸어둔 제약 따윈 쉽게 깨질 수 있었다.
“…이미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무슨 생각이요?”
“말하기 싫음 일단 넘어가지. 어깨클리닉은 어떤가?”
“어깨는 검사가 절반이잖습니까.”
“훗! 자신이 있다는 얘기군.”
“자신이야 있지만 침구과에서 양보하려 할까요? 의료 장비가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자신이 없으면 양보하겠지. 아! 장인규 선생님이 계셔서 힘들겠군.”
장인규는 침구과 과장이다.
“장 선생님 실력이 좋으십니까?”
“뜸에 대해서는 유명한 분이셔.”
“식견이 좁아서인지 처음 듣는 얘기네요.”
“자네는 잘 모를 거야. 내가 학생일 때 뜸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다 할 정도로 유명했는데 무슨 일로 갑자기 은거하셨거든.”
한의학계엔 은거기인들이 많다더니.
“혹시 뜸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친해지려 노력해 봐. 일단 마음에 들면 아낌없이 자신의 노하우을 전수하신다더군. 물론 마음에 드는 건 힘들 거야. 좀 괴팍하다는 소문이 있어.”
“…괴팍한 분 비위맞추는 건 사양입니다. 과장님께서 맞추시고 노하우는 공유하죠.”
“하하하! 나도 그런 일에 젬병이라서 말이야. 자자! 아직 많은 클리닉이 남아 있으니 얘기를 계속하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
‘현수의 과를 바꿔달라고 원장님께 말해봐야 하나?’
장인규와 임동환의 밑에서 잘 헤쳐 나갈지 걱정이 됐다.
그러나 클리닉을 하나하나 읊어가며 안마과에 맞는 클리닉을 찾으려 하는 이방익을 보자 자신의 코가 석자임을 깨달았다.
* * *
“사장님, 4차 투자자들 명단입니다.”
“메인 컴퓨터에 입력은?”
최익현은 팀장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현재 HR투자는 고객들의 요청에 의해 투자 지원자를 두 번 추가로 받았다.
그런데도 투자하겠다는 이들이 계속 생기면서 결국 4차 모집까지 하게 된 것이다.
“루시에겐 이미 입력됐습니다.”
“쯧! 이 팀장도 컴퓨터를 이름으로 불러?”
“사장님께서도 한번 사용해 보십시오. 자료가 헷갈릴 때나 점심이 고민될 때 물어보면 아주 유용합니다. 직원들 대부분이 이용합니다.”
“대표님이 자리를 비웠다고 다들 풀어진 건 아니고?”
“…대부분은 업무용으로 사용합니다.”
가볍게 얘기했는데 대답이 무겁게 돌아오자 팀장은 찔끔해서 변명을 했다.
“좋은 때일수록 조심하는 게 좋아. 대표님은 일만 잘하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난 달라. 회사임을 명심해.”
“죄송합니다.”
불과 6개월도 안 돼서 회사의 투자 운영 자금이 6배 정도 늘어나게 되면서 회사의 이득 역시 커졌다.
그에 회사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근데 너무 좋아서 약간 풀어지는 느낌이었기에 긴장하게 만들어야 했다.
“투자자 중에 직원과 관련된 이들은 없지?”
“예. 몇 번 확인했습니다. 설마 거위의 배를 가르려는 이들이 있겠습니까. 걸리면 그 즉시 퇴사는 물론 지금 얻고 있는 이익도 토해내거나 못 받게 될 텐데요.”
내부의 정보를 이용한 투자를 막을 겸 복지 차원에서 직원들의 투자는 별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상당한 이익을 보고 있었다.
회사 설립 때부터 일한 이들은 월급보다 투자 이익이 더 컸다.
“그래도 사람 일이란 모르는 일이니 주의하도록. 자! 명단대로 진행해.”
“예! 사장님.”
서류에 사인을 하고 건네준 후 최익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까지 1시간 30분 남았다.
오늘 업무를 마쳤기에 퇴근을 할까 하던 그는 좀 전에 루시에 대해 들은 것이 기억났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노트북에 있는 루시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루시, 대표님은 뭐 하고 있나?”
-대표님은 현재 저에게 질문을 하고 있어요.
우문현답이었다. 현재 그가 대표였기 때문이다.
“…우하란 대표님.”
-우하란 님에 대한 것은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알려 드릴 수가 없어요.
“…….”
뭔가 울컥했다. 기계 따위에게 희롱당하는 기분이랄까, 무시당하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잘 생각해 보니 ‘모른다’가 아니라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을 보아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회사 일로 보고할 게 있다.”
-아! 그런가요?
어울리지 않으니 놀란 척하는 반응까진 하지 마!
-하란 님은 현재 댁에 계십니다. 하지만 20분 후 집을 비우실 예정입니다.
“어딜 가는데?”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최익현은 우하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최익현입니다.”
-최 대표님이 대표죠.
루시가 누굴 닮았을까.
“호칭이야 어떻게 됐던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아직 대표의 뜻을 잘 모르나 보군요. 뭔데요?
“전화상으로 말씀드리기가…….”
-1시간, 아니, 1시간 반 후에 집으로 와요.
“알겠습니다.”
20분 후에 집을 나서는데 1시간 반 후에 집에 있겠다니 목적지가 짐작이 갔다.
전화를 끊은 최익현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자식! 접근하지 말라고 분명 경고를 했었는데……. 좋은 말로 말하면 알아듣질 못한다니까.”
-빌어먹을 자식이라는 말은 거지같은 놈이라는 뜻인데 별로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프로그램 끄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 * *
노량진 수산 시장은 서울의 최대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으로 수많은 독립된 점포들이 모여 있다.
장점은 서울 최대 수산물 도매 시장답게 구하고자 하는 수산물은 거의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곳에 가면 싸고 싱싱한 해산물을 양껏 먹고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조심해야 한다.
간단하게 수산 시장계의 용산 전자 상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집에서 해먹을 해산물을 사러 간다면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해산물을 사서 조리를 부탁하고 먹을 생각이라면 그냥 동네 횟집을 가는 걸 추천한다.
장소 제공과 간단한 조리(찜, 초장, 간장, 볶음밥 따위)를 하는데 웬만한 음식점에서 음식 먹는 값을 훌쩍 뛰어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수산물 가격에 음식점 가격을 더하면 창렬해진다.
또한 수조에 있다고 해서 싱싱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히 패류(貝類)는 절대 조심해야 한다.
고향이 남해안과 가까워 수산물을 좋아했던 두삼 역시 대학교 때 후배들과 함께 왔다가 학을 뗐다.
분명 단골인 선배의 추천으로 왔는데 가격, 품질 두 가지 모두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노량진을 찾은 이유는 정도만 덜할 뿐 어느 수산 시장이든 비슷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직하게 장사하는 사람 역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마에 정직이라고 찍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이상 발품을 팔고 정보를 검색할 수밖에 없었다.
“음, 분위기가 왜 이래?”
수산 시장 특유의 비린내에 흐뭇하게 수산 시장에 들어섰는데 여기저기 살벌한 플래카드가 보였다.
노량진 수산 시장 신축 건물을 반대한다, 신축 건물은 시장 기능이 부족해 입주를 거부한다, 노점을 하는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이 피해가 없길…….”
상인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일하는 이들 중 자신보다 더 돈이 많은 자가 수두룩할 텐데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오늘 들어온 좋은 놈으로다가 싸게 드릴께 보고 가세요.”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어요?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학생, 싸게 해줄게.”
“오늘 들어온 놈이야. 보고 가. 뭘 원해? 게? 회?”
연신 두리번거리자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두리번거리는 이유가 수산물이 신기해서가 아니었기에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수산물의 기운도 보여!’
약초, 채소, 과일 따위를 볼 때 기운이 보여 수산물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마찬가지였다.
하얗게 빛나는 것이 싱싱한 수산물이니 굳이 많은 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대게 얼마예요?”
“얼마까지 알아봤어요?”
“처음 물어보는 거예요.”
“킬로에 3만 5천 원 많이 사면 서비스도 드릴게요.”
“숙성 방어랑 새우는요?”
싱싱한 것을 파는 곳만 세 곳을 들러 가격을 물어봤다.
가격은 비슷했다. 결국 제대로 숙성된 방어를 파는 곳에서 샀다.
“방어는 회를 떠드릴까요?”
“아뇨. 제가 할 거니 포장만 잘해주세요.”
포장을 한 수산물을 오토바이 뒤에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둘러야겠네.”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수산 시장에 가기 전에 준비해 뒀던 와사비와 초장을 이용해 양념장을 만들고 회를 썰고, 찜을 하려면 아슬아슬했다.
게를 솔로 깨끗이 씻어 찜통에 넣었다.
이어 큼직한 방어머리를 반으로 잘라 반은 양념을 하고 오븐에 넣고 반은 회를 칠 수 있게 옆에 나뒀다.
담을 접시를 준비하고 회칼을 들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비싸지 않은 회칼이다. 물론 비싼 걸 써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더 좋은 도구가 생겼지.”
기를 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