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59화 (58/122)

# 59

17. 진상들(3)

“여~ 이게 누구야?”

문희원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너랑 내가 아는 척할 만큼 친했냐? 그냥 조용히 갈 길 가지?”

인생 막장이라면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렸겠지만 같이 흙탕물에 뒹굴 만큼 가치가 있는 놈이 아니었다.

물론 약 올리는 데 타고난 놈이라 무시하긴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새끼, 까칠하긴.”

“처맞기 싫으면 말조심해라.”

“아이쿠, 무서워라. 근데 어디 아파서 왔냐?”

“······.”

“설마 뭐 모집 공고 보고 온 건 아니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자격증만 많지 악력도 없고 손재주도 없는 주제에 들어와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안 그래?”

자신이 초인적으로 참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그냥 죽도록 패버리고 돈으로 해결할까 싶다.

“하긴 이 병원 면접관들이 장님이 아닌 이상 네 실체를 알겠지.”

문희원은 친근한 척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을 이었다.

“혹 장님임을 기대하고 있다면 포기해라. 그럴 일도 없겠지만 또 너랑 같이 일할 바에는 나도 떨어지고 속 편하게 너도 떨어지게 할 거거든! 애초에 붙지도 않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도저히 못 참겠다.

“애초에 붙지도 않는 건 너겠지.”

그냥 귀싸대기 한 방 제대로 날리고 깽값 물어주고 말아야겠다 싶어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내려는데 500원 동전이 손에 잡혔다.

그때 좋은 생각이 났다.

방금 전에 한 말 때문인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문희원을 돌아보며 손을 들었다.

그는 움찔하며 손을 풀고 한걸음 물러섰다.

“쫄기는. 이게 뭔지 아냐?”

“···모, 못 보던 사이에 지능도 없어졌냐? 500원이잖아.”

“그래. 내 악력이 약하다고 했지?”

동전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손가락에 힘을 줬다.

손이 잠시 하얗게 빛나며 동전이 종이처럼 반으로 접혔다. 절반으로 접힌 동전을 다시 한번 절반으로 접은 다음 문희원에게 던졌다.

“아! 이 새끼! ···뭐야? 동전이······.”

동전이 스치고 지나간 팔뚝을 연신 쓸어내리며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문희원이 던진 동전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접힌 500원을 확인하곤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말을 할 땐 일단 생각부터 해. 만일 내 기분이 더러워져서 이 동전이 아니라 네 목을 잡고 이렇게 힘을 줬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이대로 말만 하고 끝내는 건 아쉬워 손을 들어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물론 잔뜩 힘을 실은 채 말이다.

“좋은 말만 하고 살지? 비아냥거리고 싶거든 동전 보고 깊은 생각 좀 하고. 다음엔 동전이 아니라 네 목이니까. 지금부터 주제도 모르고 나불거린 입 조용히 다물고 네 갈 길 가라.”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겁먹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 정도 깜냥밖에 안 되는 놈을 더 쳐서 뭐 할까 싶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가다가 뭔가 떠오른 건지 두삼은 돌아보며 한마디를 더 했다.

“참, 여기에 서류 넣었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난 너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거든.”

저 진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민규식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하겠습니다.”

출장을 다녀온 민규식에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오?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 하여튼간 잘 생각했네.”

“다만 제 임의로 세 명만 불합격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그러지. 아니 이렇게 하지. 불합격 세 명, 합격 세 명.”

“불합격 권한을 달라는 건 개인적인 복수를 하기 위해섭니다. 합격 권한을 주시면 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게. 솔직히 그러라고 주는 걸세.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자네가 우리 병원에서 도망가지 못할 거 아닌가.”

요즘 민규식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 고민할 필요 없네. 한방의학센터와 자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자네를 선택할 거니까.”

“···흠, 여전히 부담을 주시는 군요.”

“말이 그렇다는 거네. 아무튼 자네가 허락했으니 이것도 보여줘야겠군.”

그는 책상으로 가더니 서류 한 묶음을 가지고 왔다.

“위의 다섯 명이 한방의학센터장 후보들이고 나머지는 각 과의 과장 후보들이네. 한강대학교에 학과가 생기면 학과장과 1차적으로 교수가 될 사람들이네.”

“그런데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이분들을 평가할 능력은 없습니다.”

“서류를 보면 알겠지만 자네 말고도 많은 이들이 본 서류네.”

그의 말처럼 서류엔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난 말이야 사람을 평가할 때 두 가지 방법으로 교차 검증을 한다네. 하나는 이력과 명성, 또 하나는 그 사람들의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평이라네. 이번 출장은 거기 있는 사람들의 제자, 후배, 함께 일했던 직원들을 만나고 오기 위함이었지.”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어땠을 것 같은가?”

“글쎄요.”

“이력과 명성이 과대 포장 된 이들이 제법 있더군. 제자들의 연구를 자신의 것으로 발표한 이도 있고, 겉으로는 신사인데 실제로는 개차반인 인간도 있었다네.”

“저번엔 인성보단 실력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도껏이지. 그리고 인성을 커버할 만큼 실력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사람들인데 인성이 나빠서야 되겠나? 아무튼 거기 보면 자네 학교 교수님과 선배들이 있을 걸세. 잘 보고 칭찬해 줄 사람은 해주고 욕할 사람은 욕해주게.”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셨다니 편안하게 보겠습니다.”

“그러게.”

다른 학교 출신에 대해선 잘 몰랐기에 그냥 넘겼다. 세 장쯤 넘겼을까 한 인물의 이력서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탁고성 교수.’

센터장 후보에 탁고성 교수의 이력서가 있었다.

“탁고성 교수님이군. 자네의 평이 어떨지 궁금한데?”

민규식이 이력서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글쎄요. 절 싫어하던 분이라. 다른 사람이 이분을 보고 어떻게 판단했는지 궁금하네요.”

“자넬 싫어했다고? 뭔가 일이 있었나?”

“아니요. 저도 절 싫어했던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게다가······.”

류현수에게 들었던 얘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센터장이 된다면 한강대학병원에서 일하고픈 생각이 달아날 것 같았다.

“며칠 전 후배에게 탁 교수가 제 과거의 일에 관여한 것 같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허어~ 그래? 그래서 자네 표정이 그리 안 좋았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쫙! 찌익! 찌익!

민규식은 갑자기 다가와 탁고성 교수의 이력서를 서류철에서 뜯어냈다. 그리고 바로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멍하니 보고 있는 두삼을 향해 말했다.

“그에 대한 평은 사실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네. 한데 중요한 사람이 추천한 거라 놔뒀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군.”

“확실한 건 아닙니다.”

“상관없네. 그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고집할 이유가 없지.”

고마우면서도 살짝 부담스러운 느낌. 물론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이어 계속 봤다. 탁고성 교수 이후론 딱히 욕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이방익 선생님도 계시네요? 이분 한의원도 크게 하고 있는데 병원에 들어오실까요?”

“이 선생은 스스로 지원했네.”

“그래요?”

나름 생각이 있어 한 것이겠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사상체질과 전문의지만 실제로 실력이 있는 분야는 두삼 자신과 비슷하게 물리치료와 마사지였다.

“이력서를 보고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 이 선생쯤 되는 스타 한의사가 온다면 대환영이지. 근데 그가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네.”

“어떤 조건인데요?”

“첫 번째, 물리치료와 안마를 통해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과를 만들어달라는 거였네.”

현행 한의사 전문의 제도에서는 한방내과, 한방부인과, 한방소아과, 한방신경정신과, 침구과, 한방안이비인후피부과, 한방재활과, 사상체질과 8개의 전문 과목을 규정하고 시행하고 있다.

물론 병원의 진료과는 8개의 전문 과목과 달리 더 세분화되어 있고 해가 갈수록 더욱 분화되어 가는 추세다.

하지만 아직까지 안마를 주(主)로 하는 진료 과목은 없다. 굳이 비슷한 걸 찾는다면 한방재활과인데 그마저도 ‘아주 넓게’ 봐야 유사하다.

“이 선생님은 새로운 분야를 만들 생각이군요?”

“그보다는 자신의 오랜 임상 경험을 남기고 싶은 모양이다. 물론 그런 욕심이 없다면 거짓이겠지. 새로운 분야로 인정받게 된다면 의사로서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나.”

“두 번째는요?”

“자네와 함께 일하고 싶다더군.”

“갑자기요? ···조금 뜬금없군요.”

“자네 실력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더군. 효원 양 치료할 때 봤다고 말했지. 그리고 그녀에게 물어 우리 병원에서 잠시 일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은 모양이야.”

“기를 자세히 느낀다는 정도만 말했을 뿐입니다.”

“만일 자네가 병원에서 일하기로 한다면 이방익과 새로운 과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일단 조금이라도 자네 실력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비밀을 지키지 않겠나.”

그렇게 보면 이방익과 함께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침 분야도 비슷하지 않은가.

전에 민규식과 얘기했는데 병원에서 일하게 되어도 지금처럼 가급적 비밀스럽게 하기로 했다.

한방의학과가 아닌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을 막고, 다른 한의사들이 혹시 모를 자괴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두삼도 바라는 바였다.

다른 사람은 대단하게 볼지 모르지만 솔직히 아직 부족한 게 많았다. 특히 할아버지의 진료 기록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들도 있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이 장갑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 중이다.

이방익 이후로 조교였던 선배를 제외하곤 이렇다 저렇다 말할 사람은 없었다.

“고생했네. 지원자들에 대한 면접은 각과 과장급 교수들이 채용된 후 실시할 생각이니 한 달 정도 후가 될 걸세.”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면 시간 빼놓겠습니다. 이만 가야겠네요. 연섭이가 기다리고 있어서.”

나연섭의 요도조임근을 풀어줄 시간이었다.

***

선천적인 질병이나 난치병, 혹은 적정선을 넘어선 병의 경우를 제외하곤 인간은 특별한 치료를 하지 않아도 건강 상태를 스스로 회복하는 힘이 있다.

이를 자연 치유라고 하는데 한의학에서는 이를 무척 중요시 여긴다.

침과 뜸을 이용해 혈을 자극하고, 약재를 통해 몸을 보(補)하고, 근육과 뼈를 맞춰 신체의 균형을 이루게 하는 등, 대부분의 행위가 자연 치유와 연관이 있다.

두삼은 아직까지 뚜렷한 치료 방법이 없는 나연섭의 치료에 자연 치유를 기대하고 있었다.

막연히 기다려야 한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식사와 운동, 거기에 나연섭이 아직까지 성장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연 치유로 인한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다.

찌릿!

나연섭의 아랫배에 대고 있던 손에 미약하지만 찌릿함이 느껴진 건 그가 요도와 항문의 조임근을 조인다고 생각하고 아랫배에 힘을 줄 때였다.

“계속 반복해.”

“···형,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요? 저 오늘 엄마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어요.”

“늦으면 다음 시간대 거 보면 되지.”

냉정하게 잘라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이기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두삼은 잘못 느낀 것일 수도 있기에 좀 더 집중을 했다.

근육이 움찔거릴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분명 느껴졌다. 그리고 찌릿할 때마다 요도조임근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댔다.

‘됐어!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기 시작했어! 자자! 흥분하지 말고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찾자.’

완전하다고 보긴 어려웠기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기운을 얼굴로 보냈다.

‘아! 언제 이렇게······!’

최근 이효원과 한강대학병원에서 기운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나연섭의 수술한 얼굴 확인을 소홀히 했던 건 사실이다. 근데 아무리 길어봐야 일주일이다.

분명 지난주에 확인했을 땐 변화가 없었는데··· 지금은 모세혈관과 미세한 신경들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혈과 맥도 일부분 살아났어.’

그동안 계속한 운동 덕분인지, 순수한 자연 치유력 덕분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 가지가 만나면서 이루어진 기적인지 모르지만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니 놀라웠다.

인간의 몸에 대한 경이랄까.

“형, 계속해요? 몸에 경직이 일어날 것 같아요······.”

시간이 길어지자 나연섭이 다시 투덜댄다.

이럴 땐 살짝 떡밥이라도 던져주는 게 좋았다.

“지금이 중요해. 요도조임근에 신호가 전달되고 있어.”

“신호요? 그게 뭔데요.”

“쉽게 말하면 전기야. 네 중추신경, 뇌에서 발생한 전기가 척추를 지나 네 조임근에게 전달되는 거야.”

“전 뇌수술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몸속의 변화를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연섭이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도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에 설명을 이었다.

“짐작이지만 성형 수술을 하다가 네 얼굴의 신경을 건드려 뇌신경에 충격을 받았고 그 부분이 하필이면 조임근을 담당한 부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는 수술로 인해 네 몸의 일부가 과부화가 걸려서 신호를 방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

손가락으로 그의 몸을 집어가며 설명했다.

“물론 추측에 불과해. 전기적 신호를 눈으로 볼 수 없고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잡아낼 수가 없거든. 그래서 어디가 이상한지 찾을 수 없는 거고.”

“음··· 어렵네요. 아무튼 신호든, 전기든 그게 제 괄약근에 전달이 안 된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어? 근데 형 잡아낼 수 없다고 했는데 신호가 전달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듣고 보니 그렇다.

‘그 찌릿함은 전기적인 신호였던 건가?’

두삼은 양손을 들어 찬찬히 살피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천천히 손을 나연섭의 아랫배에 대며 요도조임근까지 전기적 신호의 흐름을 보길 원했다.

“아!”

지금까지 하얗게 빛나던 손이 파랗게 빛났고 몸에 닿는 순간 뇌부터 요도조임근까지 이르는 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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