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16. 지난 일은 흘려보내고(5)
한강대학병원 긴급회의.
병원장인 민규식이 주최하는 회의로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회의 외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열었다.
수술, 혹은 바쁜 일이 있으면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회의였기에 몇몇 빠진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 참석해 삼삼오오 얘기를 나눴다.
회의의 내용은 대부분 이틀 전 일어났던 사고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민규식이 들어왔다.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드리워진 것이 좋은 일이 있나 보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틀 전에 일어난 사고에 대한 치하부터 했다.
“이번 일 모두 고생 많았어요. 각자 할 일이 있음에도 솔선수범해서 나서준 덕분에 단 한 명의 환자도 잃지 않았습니다.”
짝짝짝짝!
박수 끝에 내과를 총괄하는 센터장이 말했다.
“원장님의 빠른 대처 덕분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저야 뒤늦게 나와 지켜본 것뿐이죠. 직접 환자를 본 선생님들이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몇 명밖에 가지 않은 다른 병원에선 사망자가 나온 반면 위급한 환자 십여 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한 명의 환자도 잃지 않았다는 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그에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했다.
훈훈한 분위기에서 민규식은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어젯밤에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설마, 재난 대응 응급 병원 지원이 결정된 겁니까?”
갈수록 대형사고가 늘어감에도 응급 의료에 대한 병원 투자는 지지부진이다.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큰 조직을 운영한다는 건 병원에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국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병원을 지정해 정부지원금으로 응급의료센터를 지원할 계획이었다.
대부분 국공립병원이 지정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한강대학병원이 거론된 것이다.
“확정된 건 아닙니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장관님께 직접 전화가 왔다면 됐다는 뜻이 아닙니까. 축하드립니다.”
외과 센터장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가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응급의료센터는 외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매년 지급되는 수백억의 지원금을 받게 되면 외과에 대한 지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지방에 있는 병원들도 포함되는 겁니까?”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해선 안 되지만 이번 사고가 우리 병원에겐 호재가 되었군요. 하하하!”
“어느 병원에서도 하지 못한 이효원 양의 재수술에 이어 이번 일로 국민들의 평판 역시 어느 때보다 좋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네요. 허허허!”
병원 대부분의 과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보니 외과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이익이 되었기에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민규식 역시 기분이 좋았지만 너무 들뜨는 건 지양해야 했다.
“허허허! 샴페인은 완전히 결정되었을 때 좋은 자리에서 터뜨립시다. 오늘 바쁜 여러분을 모이게 한 건 다름 아니라 과를 나누지 말고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해섭니다.”
병원장이자 이사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민규식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각 센터마다 알력이 존재했다.
조직별로 매출을 비교하고 그에 대해 평가를 하는데 없을 수가 없다.
그에 민규식은 그런 알력을 없애려 하기보단 공동의 목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응급의료센터에 대한 정부 지원을 먼저 말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요.”
협조 요청에 대한 얘기는 공동의 목표가 있어서인지 좋은 분위기에서 끝났다.
우르르 일어나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지만 두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 선생이랑 김 선생은 일이 없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도요.”
전철희와 김진선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는군. 여기는 보는 눈이 있으니 내 방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얘기하지.”
민규식은 두 사람을 데리고 원장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차를 타서 두 사람 앞에 놓으며 말했다.
“일단 전 선생부터 말해보게.”
“그제 응급실에서 환자들 봤던 사람 누굽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어오는 전철희. 민규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는 친굴세.”
“우리 병원 소속입니까? 그렇다면 저희 과로 보내주십시오.”
“말기신부전 환자들 때문인가?”
말기신부전 환자들의 경우 노폐물 제거를 담당하는 신장 기능이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서 이틀에 한 번 3시간 정도의 혈액 투석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
문제는 반복된 투석으로 혈관이 약해져 쓰지 못하게 된다. 다른 혈관을 이용하거나, 혈관 이식, 마지막엔 인공 혈관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능력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만 있다면 혈관 수술의 난이도를 대폭 낮출 수 있습니다!”
“이해하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직원이 아니네. 열심히 설득하고 있지만 본업이 따로 있어 쉽지 않군. 그리고 설령 직원이라고 해도 자네 과에 소속은 될 수 없네.”
“···소아과로 가는 겁니까?”
“아니, 그는 한의사일세.”
“아!”
“물론 한의사에 한정할 생각은 없네. 그러기엔 너무 탐나는 능력이거든. 그렇지 않나? 김 선생?”
“탐나고, 대단하죠. ···근데 어디까지가 한계인가요?”
“솔직히 짐작만 할 뿐,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 다만 기를 이용한다고 하더군. 기를 이용해 혈관을 막거나 신경을 차단하고 몸의 내부를 살필 수 있다고 말해주었어.”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직접 보지 않았는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가능과 불가능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군요··· 그럼 언제 영입을 하는 겁니까? 당장 도움을 받아야 할 환자가 있습니다!”
“노력 중이네. 과거의 일이 있던 모양이야. 조금씩, 조금씩 환자들과 부딪히다 보면 괜찮아질까 해서 부탁하고 있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지··· 해서 이번에 다른 일을 맡겨볼까 해.”
“과거요?”
“무슨 일을요?”
동시에 각각 다른 질문을 했다.
“과거 얘긴 잊어주게. 어쩌다 보니 알게 됐지만 말을 옮길 수야 없지. 그리고 무슨 일을 맡길지는 곧 알게 될 걸세.”
대답을 회피한 민규식은 씨익 웃으며 차를 마셨다.
***
‘뭐지? 기를 사용하는 게 왠지 수월해진 기분인데?’
나연섭의 항문조임근을 조이면서 한결 쉽게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가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기분 탓인가?’
이틀 전, 간만에 온몸의 기를 탈탈 끌어다 썼다. 그 덕에 오랜만에 약재를 고기 씹듯이 먹어야 했다.
“됐다. 아침 운동은 여기까지 하자.”
“고생했어요, 형. 근데 이거 자꾸 하니까 진짜 변이 황금색으로 나오던데요.”
“그렇다고 했잖아. 난 잠깐 옆집에 다녀올게.”
“엥? 형이 무슨 일로 우리 누나한테 가는 거예요?”
“일하러 가는 거거든. 그리고 하란이 만나러 가는데 네 허락을 맡아야 하는 거냐?”
“당연하죠! 내 누난데.”
“······.”
워낙 당당하게 말하니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무시하고 가려는데 연섭이 방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잠깐만요. 같이 가요!”
잠시 후 머리에 헤어 젤을 바르고 나타났다.
“가서 뭐 하게?”
“형 일하는 동안 누나랑 놀려고요.”
“···쫓겨나도 난 모른다.”
“착한 누나가 그럴 리가 없죠. 가요.”
당당하게 앞장 서 가는 나연섭을 따라 하란의 집으로 갔다.
“어서 와. 아직 집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좀 어지러워. 연섭이라고 했지? 잘 왔어.”
티셔츠에 생활한복 같은 편안한 바지를 입은 하란이 두 사람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누나. 집 완전 좋네요. 그림을 좋아하시나 봐요?”
외부도 미술관 같더니 내부도 복도가 미술관처럼 꾸며져 있다. 여기저기에 풍경화와 모니터가 걸려 있는데 모니터는 아름다운 풍경 영상을 보여줬다.
“옛날 버릇 때문인지 집에 있는 걸 좋아해. 근데 가끔 풍경도 보고 싶고. 그래서 이렇게 꾸며둔 거야. 이쪽으로 앉아. 오빠, 효원인 뒤뜰에서 산책 중이야.”
정장을 입었을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집이라 그런지 무척 털털하게 느껴졌다.
물론 다르게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와아~ 우리 누나 저렇게 입고 있으니까 완전 패션디자이너 같지 않아요? 정장을 입으면 섹시한데 평상복을 입으니까······.”
이효원을 데리러 간 사이에 나연섭이 호들갑을 떤다. 그러다 단어를 생각하는지 머뭇거렸다.
“입으니까, 뭐?”
“더 섹시해요!”
“···혈기왕성하네. 아무래도 기를 좀 줄여야······.”
“우와아아아악~”
나연섭은 괴상한 감탄사를 터뜨리며 말을 씹었다. 이효원이 온 것이다.
“효원이 누나죠? 진짜죠? 저 누나 팬이에요.”
“···누구?”
연섭이의 반응에 당황한 건지, 낯선 사람이 어색한 건지 이효원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두삼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아는 동생이야.”
“그래요? 반가워요.”
자신의 아는 동생이라니 안심을 한 건지 평소 표정으로 돌아와 인사했다.
“나연섭입니다! 누나 한국에서 한 경기는 다 봤어요. 지난번 올림픽 때도 러시아에 가서 봤고요. 그때 정말이지 환상이었어요.”
“어머? 고마워요. 좋아해 주니 기분이 좋네요.”
“누난 저의 영웅이에요. 혹시 괜찮으면 악수라도······.”
이효원은 반갑게 손을 내밀었고 나연섭은 공주라도 만난 듯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의 누나’에 이어 ‘나의 작은 누나’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재미있는 애네요. 근데 저 애, 많이 아파요?”
소란스러운 만남이 끝나고 이효원과 피트니스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웬만한 피트니스 클럽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운동기구가 준비되어 있어 훈련과 치료를 병행하기에 딱 좋았다.
“왜 아프다고 생각해?”
“손목요. 자포자기해서 스스로 그은 거 아녜요? 오빠랑 함께 있는 것도 그렇고······.”
“음··· 그래, 예상한 대로 환자도 맞고······. 하여간 조금 불편하게해도 잘 대해줘.”
“당연하죠? 누구완 달리 진짜 팬이잖아요.”
“···나도 팬이거든. 직접 경기장을 찾아가서 보진 않았지만 웬만한 시합은 인터넷에서 다 봤어. 그리고 네가 선전하는 커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 네네.”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시설 정말 좋다. 작은 아이스링크만 있으면 이곳에서 모든 테스트가 가능하겠어.”
“하란 언니가 필요하면 수영장 얼려서 링크로 써도 된다고 했어요. 가볍게 타는 정도는 가능해요.”
“수영장이 있어?”
“정원 밑이 수영장이에요.”
“···대박.”
‘대박’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러움도 잠시, 치료를 위한 테스트에 들어갔다.
“뭐부터 할까요?”
“일단 러닝머신 위에서 뛰면 돼.”
“그게 다예요?”
“한 손은 나에게 주고.”
“그럼 불편할 것 같은데. 이런 식이란 말이잖아요?”
러닝머신에 올라간 그녀는 두삼의 손을 잡은 채 가볍게 달렸다.
“···불편하고 어색하네. 그럼 어쩌지? 손으로 체크해야 하거든.”
마땅히 손을 대고 있을 만한 곳이 없다. 한데 이효원은 잡고 있던 손을 등쪽으로 옮겼다.
“여기에 올리고 있음 되죠.”
“아, 그럴까?”
어색하게 허리에 손을 댔다.
“참나, 마사지할 때 온몸 구석구석을 더듬었을 텐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옳은 말이다. 마사지할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 허리에 손을 올리는 건 뭔가 묘했다. 치료의 연장선인 건 마찬가진데 말이다.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 건가?
“구석구석은 아니지 않냐?”
“왠지 못 만져서 억울해하는 말툰데요?”
“누가 억울하다고··· 얼른 뛰기나 해.”
“네네~ 정 아쉬우면 오늘 구석구석 마사지해요. 모른 척해줄게요.”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누가 마사지해 준다고 그랬어?”
효원은 혀를 날름 내밀곤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장난기 어린 얼굴을 지우고 뛰는 것에 집중했다.
두삼은 얼른 기를 내부로 보낸 후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일단 분리해 둔 대로 움직이고 있긴 한데······.’
첫 수술 후 재활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1년 가까이 운동을 하면서 오른발의 근육은 잘못된 상태로 자리를 잡아버렸다.
사흘 전에 강제로 구분을 짓고 흡착된 부분을 떼어냈지만 운동을 시작하자 다신 예전처럼 돌아가려 했다.
기운을 이용해 원기둥처럼 만들어 근육과 근육 사이에 끼웠다.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퍽’하고 부서져 버린다.
‘하나가 안 되면 여러 개로 하면?’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점점 늘리다 보니 기운으로 근육을 꽉 잡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다리가 뭔가 이상해요.”
“음, 그럴 수밖에 강제로 교정한 상태거든. 이제 그만 뛰어도 돼.”
고정하는데 기운의 절반이 사라져 버리니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오빠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 허리에 손을 올린 것만으로도 다리 근육을 고정한다는 게 가능해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시늉이라도 했을 거야. 그러니 다른 사람한텐 비밀이다.”
“···날 믿는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비슷해.”
사실 믿기보단 귀찮아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치료하는 데 6개월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연극할 자신이 없었다.
“꼭 비밀을 지킬게요!”
“고맙다.”
어차피 말해봐야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솔직히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능력이었다.
“오빠가 믿어주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근데 몸의 일부를 잡고 있으면 몸 전체를 볼 수 있는 거예요?”
“그 덕분에 네 다리의 뼛조각을 찾았잖아.”
“···몸 전체란 말이죠?”
“응. 근데··· 왜, 왜 그러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데 이효원이 양손을 엑스 자로 만들어 가슴을 막았다.
“···오해 마. 뼈, 근육, 혈관이 보인다는 거야. 거길 봐봐야 혈관과 지방, 유선만 보여. 볼 것도 없는······.”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손 올리고 있지 마!
더 어색해지잖아!
피트니스 룸은 어색한 기운으로 가득 차 침묵만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