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55화 (54/122)

# 55

16. 지난 일은 흘려보내고(4)

“그 사람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분명해. 술 깬다고 들어간 마사지 숍이 하필 자네 가게였다니 말이야.”

초기 암에 걸린 손님에 대한 얘기를 들은 민규식이 간단한 평을 했다.

“검사를 받지 않으면 소용없잖습니까? 아직 연락이 안 왔다면서요.”

“그 사람이 자네 말을 무시할까 겁나는 모양이군. 어째 자네가 더 안달이야.”

“걱정이 되네요.”

“걱정 말게. 며칠 내로 연락이 오든가, 아님 다른 병원이라도 갈 거야. 검사를 못 받을 만큼 가난할 것 같지도 않고.”

“확신하십니까?”

“확신하네. 생각해 보게. 누군가가 자네에게 암이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비슷하게 말하면 어떨까?”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겠죠.”

아닐 거라고 하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 때문에라도 검사를 하게 될 것이다.

“나라면 말이야 일단 암 보험이 있나 확인부터 한 후에 움직일 걸세. 보험사엔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일단 나부터 살아야지.”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걱정 말게.”

“···감사합니다. 원장님 덕분에 좀 편안해지네요.”

“다행이군. 오늘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

똑똑!

노크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소아과의 김진선 교수가 들어왔다.

그녀는 달려왔는지,

“헉헉! 원장님. 급하지 않으면 한 선생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면 나도 가지.”

“원장님은 원장님 일을 하셔야죠. 뉴스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당장 필요해요. 가요, 한 선생.”

그녀는 이미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그녀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뛰어요! 헉헉!”

엘리베이터로 뛰어가자 경비원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었다. 오르자마자 그녀는 닫기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는 숨을 돌리느라 말을 하기 힘든지 말 대신 손가락을 들어 엘리베이터에 있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교통사고 현장이었다.

사고로 인해 흉측하게 구겨진 버스와 트럭, 승용차들이 보였고 그 밑에 자막이 크게 적혀 있다.

[현장학습을 가던 버스, 강변북로에서 트럭과 추돌. 가까운 병원으로 학생들 이송 중]

“하아! ···위급한 환자들이 방금 전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요. 멀리 이동할 수 없는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우리 병원으로 줄지어 온다는 얘기에 도움을 청하러 온 거예요.”

급하게 말하던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현재 급하지 않은 수술은 뒤로 미루고 있으니 수술할 의사는 부족하지 않아요. 다만 그들이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 바이탈(vital)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요.”

한강대학병원은 하루 수술 건수만 150건이 넘을 만큼 대규모 병원이었다. 수술할 의사들은 많다는 얘기다.

다만 의사가 많은 것과,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오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였다.

응급수술이 필요하다고 무작정 수술을 시작하는 건 아니다. 일단 환자의 바이탈을 잡은 후, 어디가 이상이 있는지 확인을 한 후 수술에 들어간다.

한데 그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보니 조치를 취하는 중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곳이 의사가 없는 곳이라면 모를까 한의사의 영역을 벗어납니다.”

“그럼 그냥 죽는 걸 지켜보겠다는 건가요?”

“······.”

“선생님, 처음엔 한의사라고 하셔서 좋지 않게 봤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한 선생님은 충분히 실력이 있잖아요?!”

“······.”

급한 상황에 자신의 말이 속상했던 것일까.

“실력이 있으면서 분야가 다르다는 말로 회피하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회피하면 마음이 편한가요?”

“···회피를 하지 않아도 편한 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우선! 말싸움할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싸워요. 일단은 환자가 먼저예요.”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건넸다.

“안에 마스크 있어요. ···지금부터 당신이 취하는 모든 행위는 제가 책임져요. 부탁해요.”

엘리베이터가 2층에 이르자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열망이 불타올랐다.

‘이 병원엔 왜 이렇게 열혈 의사들이 많은 거야? 원장한테 옮은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가운을 걸치고 마스크를 했다.

‘어쩌면 나도 옮았을지도 모르지.’

그래, 어차피 마음이 불편할 거라면 회피하지 않는 쪽이 더 낫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응급실로 뛰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진한 피 냄새였다. 그리고 의사들의 고함 소리.

정신이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가 보고 의료 경험이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에선 인턴만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짜악!

그때 정신이 번쩍 들게 김진선이 등을 쳤다.

“정신 차려요! 직접적인 조치는 담당 의사에게 맡겨요. 그저 접근해서 환자 상태를 파악하거나 조용히 조치를 취한 후 저에게 말해줘요. 따라와요. 일단 저 환자부터 해주세요.”

그녀는 의사, 간호사 해서 몇 명이 붙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침대엔 피투성이의 초등학생이 누워 있었는데 긴급한 상황인지 그들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BP(혈압) 80에 40. 계속 떨어집니다!”

“혈액을 쥐어 짜!”

“선생님 아무래도 동맥이 터진 것 같습니다. 빨리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걸 누가 몰라! 어디가 터졌는지 확인도 안 하고 절개부터 할 거야!”

“아! 선생님, 맥박이 안 뜁니다!”

“심정지 상태입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할 때 접근해 환자의 발목을 손으로 잡았다.

분위기로 인한 흥분 상태여서일까, 두삼의 손에선 한꺼번에 많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유독 밝게 빛났다.

쏟아져 들어간 기운은 다른 곳보다 우선적으로 동맥과 정맥 쪽을 훑으며 지나갔다.

‘배대동맥이 터졌어!’

제법 길게 찢어져 버린 배대동맥에선 피가 연신 왈칵왈칵 쏟아졌다. 혈액을 공급해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쏟아져 들어간 기운을 파이프 모양으로 만들어 찢어진 배대동맥을 막음과 동시에 연결했다.

지금까지 만들어본 적 없는 크기였다. 한데 그동안 꾸준히 해오던 일이라 그런지, 아님 위급 상황에 실력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 건지 모르지만 모양이 만들어지며 출혈을 잡았다.

아니, 잡았다고 생각했다. 재수 없게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누른 심장의 압력과 혈액주머니를 짜 넣는 압력이 만나며 막아둔 혈관의 한쪽이 조금 더 찢어졌다.

퓨슉!

‘젠장!’

“혈액 짜 넣지 마요!”

크게 소리친 후에 새로운 기의 파이프를 만들어 틈을 막았다.

“맥박이 돌아왔어요! BP 85/45, 90/50. 차츰 안정화되고 있어요.”

손을 떼고 옆에 있는 김진선에게 말했다.

“배대동맥 파열입니다. 배꼽에서 좌측 45도 방향 10센티미터 아래쪽이에요. 일단 막아놨어요. 다른 곳도 살필까요?”

“···아, 아니에요.”

김진선이 두삼을 데리고 온 것은 그의 신기한 한의학 기술로 양의학이 할 수 없는 부분을 보조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가 있으면 마취를 시켜주고, 혹시나 검사 장비를 사용할 수 없을 경우 다친 부위를 찾아내 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건 생각을 뛰어넘었다.

혈액 팩을 쥐어짜도 힘들만큼 동맥이 찢어졌는데 그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도대체 이 사람 뭐야?

당장에라도 어떻게 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을 치료하던 의료진들의 시선이 자신과 두삼에게 집중되어 있는 걸 보고 정신을 차렸다.

좀 전에 두삼이 소리친 것 때문이리라.

“···험! 지금 뭣들 해? 환자 안정화됐으면 얼른 검사를 하고 수술 들어가야지.”

“···아! 네, 네!”

“이쯤에서 배대동맥 파열이니까 서둘러 혈관외과 전철희 선생님께 연락해. 한 선생은 다음으로 가죠.”

김진선이 다시 손을 잡고 끌었다. 근데 그때 방금 전 환자를 보던 의사가 말했다.

“김 선생님, 전철희 선생님 15분 전에 수술실에 들어가셨습니다. 나오려면 적어도 30분은 걸릴 텐데요.”

“다른 선생님들은?”

“정규 수술과 현재 다른 분들 환자까지 보고 있어서 가능할지······.”

김진선이 두삼을 쳐다봤다. 막아둔 배대동맥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묻는 것 같았다. 얼른 귀에다가 대고 속삭였다.

“서너 시간은 문제없을 겁니다.”

“한두 시간은 괜찮을 거야. 일단 검사부터 해. 혹 이상이 생기면 바로······.”

그녀는 살짝 말을 바꿔 옮겼다.

그때였다. 민규식이 나타났다.

“이러고 있을 것 같아 비상을 걸고 바로 내려왔지. 통제는 내가 할 테니까 김 선생이랑 한 선생은 일봐. 급하면 내가 수술하면 돼.”

민규식이 나타난 이상 다른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바로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움직였다. 한데 처음 몰려왔던 환자들의 경우 응급처치가 완료가 된 상태였다. 세 명은 수술실로 들어갔고 수술 대기 중인 환자 또한 바이탈이 완벽하게 잡힌 상태로 검사 중이었다.

“긴장 풀지 말아요. 곧 환자가 들어올 거예요.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피투성이 환자를 태운 침상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환자 들어갑니다! 나이 12세. 트럭과 부딪힌 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인데 부서진 창밖으로 튕겨져 나갔다가 승용차에 2차 충돌한 환잡니다.”

119 구급대원의 외침에 대기 중이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서둘러 환자에게 붙었다.

“모니터 붙이고 혈관 잡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정형외과, 신경외과에 콜해. 기도 확보한다.”

옷을 자르고 몸에 붙어 있는 금속류를 제거한 후 심전도 모니터를 부착시키고, 기도를 확보하는 동안 두삼은 환자의 발을 잡았다.

발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가면서 학생의 몸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왼쪽 넙다리뼈 골절, 대퇴부 골절, 소장 파열. 갈비뼈도 세 개나 부러졌어.’

더욱 나쁜 건 부러진 갈비뼈 하나가 폐를 찌르고 있었고 비장에 출혈도 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두부 골절은 있어도 뇌의 손상은 없었다.

파악을 마친 두삼은 출혈 몇 곳을 잡은 후 옆에 있는 김진선에게 말했다.

“···전신 MRI가 따로 없네요. 나중에 설명해 주셔야 해요.”

“···그건 여기부터 끝내고 말하죠.”

말하는 사이에 이미 두 명의 환자가 추가로 들어와 있었고 그중 한 명은 맥박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홍 선생님.”

“전 선생도 고생했네.”

간담도를 맡고 있는 홍치수가 나가고 난 후에 혈관외과를 맡고 있는 전철희 과장은 레지던트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마무리는 후일이랑 창수가 해. 다른 사람들은 다음 수술 준비하고.”

“예! 선생님.”

봉합을 할 두 명을 남겨놓고 수술실을 나왔다. 그리고 피범벅이 된 마스크와 옷, 장갑을 벗곤 수술실 옆에 있는 의자에 잠시 앉았다.

“후우~ 오늘 빡세네.”

아침 7시부터 시작한 수술. 겨우 마치고 나왔을 때 교통사고 환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곧바로 수술실에 들어와야 했다.

한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수술 중이라 바깥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환자가 계속 밀려오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점심 먹는 건 사치겠지?”

아침에 나오면서 먹은 죽 한 그릇은 이미 소화가 된 지 오래였다. 점심은 우유와 초콜릿으로 때워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외과는 힘들다.

성형외과를 제외하고 매년 지원자들이 줄어드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생명을 다루는 것이라 실력 있는 의사도 시시비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응급 상황이 자주 발생해 출퇴근이 들쑥날쑥이다. 게다가 휴식 시간이 없을 만큼 업무강도가 높은 날이 많다.

병원 입장에서도 외과는 환영받지 못한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에서 일하며 항상 건강에 신경 쓰는 이들이 외과적인 사고를 많이 당할까, 아님 일반 소시민이 많이 당할까.

당연히 후자다.

응급의학과나 일반외과에 비하면 혈관외과가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오십보백보다.

‘우리 병원은 좀 다르지만 말이야.’

한강대학병원의 다른 병원의 외과는 조금 달랐다.

일단 원장인 민규식이 외과 출신이라 그런지 외과의 힘이 컸고 월급 역시 적지 않았다. 또한 의료 분쟁이 일어나면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민규식이 나서서 막아줬다.

‘게다가 특별 보너스도 많고.’

사명감으로 시작한 외과지만 그렇다고 가난하게 살고픈 생각은 없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힘든 것을 이겨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수술 준비가 됐을 것이다.

“이 환자는 어디가 이상이 있지?”

“배대동맥 파열입니다.”

간호사가 화면에 환자의 차트를 띄웠다.

“음, 다른 곳은 큰 문제가 없군. 한데 누가 바이탈을 잡은 거지? 어레스트(심정지)까지 온 환자라면 긴급 수술을 했어야 하는데······. 사진 띄워봐.”

간호사는 CT 사진을 띄웠다.

사진을 보던 전철희는 인상을 쓰면서 모니터 가까이 다가갔다.

“이 사진 뭐야? 잘못 올린 거 아냐? 화면상으로 출혈이 전혀 없잖아?”

“그게··· 원장님 말씀으론 손을 써둔 것이라고.”

“뭔 헛소리야! 배대동맥 파열인데 무슨 수를 썼다는 거야? 막아뒀으면 사진에 보여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배대동맥 파열 맞아?”

“열어보시는 게······.”

“열어서 아니면? 최 간호사가 책임질 건가? 당장 원장님 모셔와.”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수술실에서 나가려는데 민규식이 들어왔다.

“자네라면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 배대동맥 파열 맞으니까 얼른 수술하게. 미적거리다 처치해 놓은 게 터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사진엔 멀쩡한데요.”

“내말을 믿게 내가 헛소리하던가.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얼른 열어서 확인해 보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규식이 말하니 일단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환자를 두고 헛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결정을 내린 전철희의 손속은 빨랐다.

복강 내 피를 빼내기 위해 끼워둔 배액관을 뺀 후 구멍 난 배를 조금 더 절개했다.

“리트렉터. 석션.”

시야를 확보한 그는 손가락을 이용해 배대동맥을 찾았다. 그리고 찾은 순간 그의 눈은 찢어질 듯이 커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찢어진 동맥이 보였다. 한데 투명한 막이라도 있는 듯 혈액이 찢어진 것을 무시하고 흐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