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19화 (18/122)

# 19

6. 길을 뚫어라(3)

***

“···언제 미국에서 돌아왔니?”

두삼이 막아뒀던 혈의 일부를 풀자 배영옥은 잠을 자다 깬 사람처럼 깨어났다. 그리고 누워 있던 일주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요. 몸은 좀 어떠세요?”

“글쎄다. 힘이 없고 계속 졸리구나. 그래 미국에 갔던 일은 잘 해결됐니?”

“네. 깔끔하게 해결했어요. 이제부터 한국에서 머물 생각이에요.”

“엄마가 미안하다. 나 때문에 일 잘하고 있는 널······.”

“미안하다는 말 이제 그만해요.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진즉에 돌아왔으면······.”

“후후후······. 그래. 이제 둘 다 미안하다는 말은 고만하자. 몸이 움직인다면 우리 딸 한번 안아봤으면 좋겠는데 자는 사이에 몸이 안 좋아진 모양이네.”

“···제가 안으면 되죠.”

하란은 배영옥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래, 그래. 우리 아가. 부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못난 애미지만 네가 결혼할 때까진 함께해 주고 싶은데··· 이제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배영옥은 자신의 몸 상태에서 죽음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소리 말아요. 아무도 없는 결혼식 따윈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아이 낳으면 엄마가 봐주셔야 해요.”

작별 인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하란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야··· 할 텐데······. 너무 졸려서 잠깐 자야 할 것 같구나.”

맥이 급격히 느려지고 있었기에 두삼은 이제 끝내야 할 때임을 눈빛으로 알렸다.

“그, 그래요. 깨서 다시 얘기해요, 엄마.”

“···사랑한다, ···아가.”

“저도 사랑해요, 엄마.”

옆에서 보고 있던 두삼도 뭉클해지는 장면이었지만 하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혈을 다시 막았다.

“이제 그만 시작할까요.”

멍하니 배영옥의 옆에 앉아 있는 하란에게 비켜달라는 말을 돌려서 했다.

“···아! 미안해요.”

하란은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서서 두삼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말은 안 했지만 잘 부탁한다는 의미리라.

“약속한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겁니다.”

두삼은 농담으로 가라앉은 기분을 환기시켰다.

지금은 죽음에 대한 생각도, 모녀의 슬픔도, 고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모두 잊고 집중할 때였다.

“하란 씨는 가급적 떠나지 말고 제가 부르면 바로 올 수 있게 옆방에서 대기해 주세요.”

며칠 전 그녀의 손목을 잡았을 때 그녀의 몸 안에 상당한 음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다른 사람과 달리 손목을 잡았음에도 몸에 있는 음기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딱히 필요할 것 같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 대기시켜 두는 걸 잊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까진 해보자고요. 하란 씨 결혼식을 보고 싶다면서요. 힘내세요.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잠든 배영옥에게 중얼거린 후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지금은 최단 거리로 기를 보내야 했고 허락을 받을 수도 없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살아나신다면 이번 일에 대해선 사과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기를 보내 임맥의 막힌 부분을 살짝 눌러 얼마나 말랑해졌는지 확인했다. 계속해서 뜸을 뜬 효과가 있는지 누르는 대로 움푹 파였다.

‘이 정도면 됐어. 뚫어볼까!’

장갑을 얻고 기를 다루다 보니 기가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삼은 드릴을 생각했고 손에서 나간 기는 드릴이 되어 임맥이라는 길을 뚫기 시작했다.

‘어쩌면······.’

순조로웠다. 일주일 가까이 뜸을 뜨고 기를 이용한 무한 마사지 덕분인지 잠깐 사이에 아랫배에서 배꼽까지 뚫고 올라갔다.

그러나 샴페인을 빨리 터뜨린 모양이었다. 명치까지 올라가면서 서서히 속도가 늦어지더니 중간쯤에서 멈춰서며 연결이 끊어져 버렸다.

‘이게 뭐야! 연결이 왜 갑자기 끊어져?’

두삼은 어이없는 상황에 다시 드릴을 만들어 보냈다. 한데 처음 뚫기 시작한 곡혈부터 다시 막혀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사실 모든 것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이니 의문을 가져본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삼은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드릴로 뚫어나갔다.

이번엔 뒤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는데 그에 드릴이 왜 멈추고 연결이 끊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임맥을 꽉 막고 있던 이물질은 콘크리트처럼 부서지면 작은 조각이나 가루가 되는 고체가 아니라 점성이 강한 액체로 뚫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드릴이 못 움직이게 만들어 버렸다.

“젠장! 뜸으로 막힌 혈맥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나?”

할아버지의 기록을 보며 예상한 치료 방법이 잘못됐다면 이건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다시 시도해 본다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두삼은 손을 놓고 생각에 빠졌다.

‘침과 뜸을 이용해 막힌 혈을 뚫는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말자. 그마저 부정하면 정말 포기해야 해. 일단 침과 뜸의 역할이 달랐다고 본다면?’

포기하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뜸을 교체한다고 밤을 샐 때 하란이 치료실에 설치해 둔 TV를 본 것이 기억났다.

터널 공사에 종사하는 이들의 얘기로 한참 뚫는 것에 꽂혀 있을 때라 유심히 봤었는데 그중에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산을 폭파시키던 장면이 떠올랐다.

‘다이너마이트! 할아버지는 침을 다이너마이트처럼 이용한 게 아닐까?’

침의 역할이 뚫는 기능이 아닌 폭파시키는 기능을 가졌다고 가정을 하니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당장에 다이너마이트라 생각하며 기의 침을 꽂았고 드릴이 아닌 폭발물이라고 생각하며 기를 보냈다.

‘폭파! 터져! 쾅! 제발 폭발하란 말이야!’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가져도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폭발은 무리수였나? 그럼 할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걸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꺼림칙한 마음만 최소화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과거 그날처럼 절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놓치고 있는 게 분명 있어. 그게 뭘까?’

일주일간 고생해서 풀어놓은 이물질들이 빠르게 굳어가고 있어 애가 탔지만 한편으론 생각하길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은 덕분일까 다행히 한 가지 방법이 더 떠올랐다.

이물질이 액체이니 뜨거움으로 증발시켜 버리면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번엔 실현 가능 한 생각이었을까. 머릿속으로 뜨거운 불을 생각하는 순간 장심에서 나가는 기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운이 더해지면서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기운은 이물질과 만나자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돼, 됐다!”

게다가 기의 침은 예상처럼 다이너마이트와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장심에서 보낸 뜨거운 기운과 만나면서 더 넓게 이물질을 날려 버렸다.

두삼은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냈음을 알았다.

그에 지금까지 끌었던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신나게 길을 뚫어갔다. 뒤도 잊지 않고 살폈는데 증발을 시켜서인지 금세 막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명치까지 일사천리로 뚫고나가던 그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이물질을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릴 정도의 강력한 열기를 유지하는 데 기의 소모가 너무 심했다.

‘이래선 내가 가진 기로는 임맥도 제대로 뚫지 못하겠는데······. 과연 독맥까지 뚫을 수 있을까?’

걱정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쇄골과 목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천돌혈에서 기가 떨어졌다. 남아 있는 건 음기와 합쳐지지 않은 기운뿐이었다.

“하란 씨, 얼른 이쪽으로 건너오세요.”

“네. 어떤 걸··· 도와 드릴까요?”

기다리고 있었는지 부르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다 배영옥의 아랫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걸 보곤 잠깐 머뭇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의 옆에 앉았다.

“제 손 좀 잡아주시겠어요? 느낌이 많이 이상할 수 있습니다.”

“설마··· 정 간호사에게 했었던 음양의 교환 그런 건가요?”

“예. 기분이 이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참을 수 있으시면 참아도 괜찮고 못 참겠으면 소리를 질러도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거겠죠?”

“예! 치료를 위해선 반드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만 여의치 않군요.”

두삼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치료라는 말에 고민 없이 손을 맡겼다.

연인이 손을 잡듯 깍지를 끼자 음기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여자 음기가 순수하면서 강해.’

다른 여자들의 경우 음기를 촉발시켜야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는데 하란의 경우는 몸에 있는 음기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근데 꽤 잘 참네.’

기분이 상당히 묘할 텐데 눈을 감고 입술을 꼭 다문 채 작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잠시 신기하게 보던 두삼은 쓸 수 있는 기가 생기자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한데 잠깐 쉬는 사이에 뚫어뒀던 경락에 다시 이물질이 쌓이고 있었다.

‘역시 임맥과 독맥을 뚫어 순환이 되게 만들어 자정 능력을 복원시켜야 할 모양이네. 과연 독맥의 절반을 뚫을 수 있을지 의문이군.’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경락이 뚫려 기의 흐름이 원활하면 웬만한 병은 자연 치유가 되었다. 문제는 남아 있는 기였다.

‘뚫었다!’

임맥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턱에 위치한 승장까지 뚫은 두삼은 곧바로 한껏 뜨거워진 기를 생식기 밑에 있는 회음으로 보내 등 쪽 독맥으로 돌렸다.

하란이 가진 순수한 음기 덕분이었을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장강혈부터 신주혈까지 절반 가까이 뚫었음에도 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뚫기에는 아슬아슬한 수준,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계속 해나갔다.

‘대추, 아문, 뇌호··· 강간··· 후정······.’

독맥의 19번째 혈인 후정을 뚫고 기를 억지로 쥐어짜며 백회로 보냈다.

터엉!

지금까지와 달리 백회혈의 이물질은 증발되기는커녕 두삼이 보낸 기운을 밀어냈다.

게다가 이상한 건 튕겨져 나오는 소리가 두삼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듯했다.

‘다시 한번!’

터어엉!

기운을 더해 다시 부딪혔다. 한데 부딪힌 힘만큼 반탄력이 되돌아왔다.

‘크윽! 이게 무슨 일이야. 손만 대고 있는데 나에게 영향이 미치다니······.’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시도하기도 싫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두삼은 어찌 보면 미련했다. 아니, 머리가 나빴는지도 모른다.

방금의 충격을 잊고 다시 시도했다.

터엉! 터엉! 터엉! 터엉!

누군가가 머리를 방망이로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연속적으로 느껴졌지만 백회혈을 계속 두드렸다.

‘으득!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멍한 상태에서도 두삼은 입술이 터지도록 물며 이성을 차렸다.

하란이 준 음기를 이용해 변환시켰던 기운도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황. 이성은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을 기를 몽땅 쏟아 부었다.

‘젠장! 무사하다면 이젠 정말 두 번 다시는 무리하지 않을 테다.’

실패했을 시 반탄력으로 일어날 고통을 생각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두삼은 기를 백회혈로 돌진시켰다.

터어어어엉!

타종하는 보신각 종 속에 들어가 있으면 이럴까. 폭탄이 옆에 터지면 이럴까.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머리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온몸에 전해졌다.

“두삼 씨, 코, 코피가!”

갑자기 코피를 쏟은 두삼을 보며 하란이 놀라 소리쳤다.

두삼은 들을 수는 있었지만 말할 힘이 없었다. 한데 코피를 줄줄 흘리며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는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난 최선을 다했어! 그날도··· 오늘도.’

두삼이 무리하면서까지 배영옥을 고치려 했던 이유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여기까진가 봅니다.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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