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6. 길을 뚫어라(1)
백만수와 나물 할머니가 소문을 내주면서 늘어났던 손님들은 다 나아서 오지 않거나 가격 부담 때문에 오지 않으면서 이젠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지리적인 여건과 추운 날씨도 한몫했겠지만 인구수가 많지 않은 좁은 동네라는 점과 마사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두삼은 손님이 줄었어도 일이 줄진 않았다. 여유가 생긴 시간만큼 온전히 배영옥에게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이게 내가 찾던 거야. 양도 충분하고. 고생했어.”
마른 쑥을 오물오물 씹던 두삼은 우하란이 남겨둔 경비원 겸 운전기사인 나문덕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말했다.
나이도 동갑에 인적 드문 시골집에서 삼시세끼 같이 먹다 보니 금세 친해져 말을 트고 지냈다.
“정말? 우와! 드디어 끝난 거야? 운이 좋았어. 한 할머니가 여름 쑥이라 독이 있다고 집 한쪽에 방치를 해뒀더라고. 혹시나 싶어 싹 긁어왔지.”
나문덕은 두 손을 불끈 쥐며 좋아라했다.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이, 두삼이 햇볕에 바싹 말린 여름 쑥을 구해오라고 해서 그걸 구하느라 나흘 내내 쉴 틈 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어제도 그제도 원하던 쑥을 구해왔었다. 그러나 양이 너무 적었다. 한데 오늘 몇 달은 족히 써도 될 만큼 충분히 구해온 것이다.
“근데 파는 사람들도 제대로 모르는 쑥을 넌 어째 단번에 아냐?”
“맛보면 알아. 나흘간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이만 가서 쉬어라.”
“그래야지. 근데 저 많은 쑥은 어쩔 거냐?”
나문덕이 가리킨 부엌 한쪽엔 쑥 자루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가 나흘 동안 부지런히 나른 쑥이었다.
“좋은 건 여성한테 좋은 약으로 만들거나 먹고, 나머진 뜸과 입욕제 만들면 돼.”
“여자한테 좋은 약? 만들면 챙겨주라.”
“어머니 드리게?”
“아······! 엄마 것도 챙겨주면 고맙고. 헤헤헤!”
여자 친구에게 줄 생각이었나 보다.
나문덕이 가고 두삼은 그가 구해온 양의 기운을 가진 쑥으로 새끼손톱만 한 뜸을 만들어 커다란 사각 쟁반에 질서정연하게 놓았다.
“휴우~ 꽤 힘드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만들자.”
미리 구해둔 이십 개의 쟁반에 수천 개의 뜸을 만들어놓으니 꽤 볼 만했다. 그러나 10일도 되지 않아 없어질 양이었다.
잠깐 쉬었다가 어제 만들어둔 뜸으로 치료를 하기로 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몸을 가볍게 풀며 대나무 길을 걷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배영옥이었다.
“선생님도 산책 나왔어요?”
“네. 그런데 정 간호사는 어딜 가고 혼자 산책 중이세요?”
“졸고 있기에 내버려 두고 왔어요.”
“어째 정 간호사는 갈수록 잠이 느는 것 같습니다?”
하는 일도 많지 않는데 환자를 홀로 내버려 둔 것에 대한 핀잔이 섞인 물음이었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이곳에 오기 전에 제일 고생이 많았던 사람인걸요. 고통에 밤새 잠 못 들 때 내 손을 잡아준 사람도 정 간호사였고요.”
“제가 고용한 사람도 아닌데 뭐라 할 수 있나요. 다만 홀로 다니는 건 위험합니다.”
“날이 좋아서 발걸음이 절로 이쪽으로 향했네요. 앞으로 주의할게요. 얼마 남지 않은 앞이지만요.”
배영옥은 아무렇지 않게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삼은 치료하는 사람으로서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런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확률만 가지고 희망 고문 하는 것도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런 씁쓸한 표정으로 보지 않아도 돼요. 고통스럽지 않게 지낼 수 있고 이렇게 걸을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선생님껜 감사드려요.”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그나저나 하란 씨가 한 이틀 늦는다면서요?”
두삼은 화제를 돌렸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건 좋지만 기운 빠지는 얘기를 계속해서 좋을 건 없었다.
“나 때문에 오랫동안 회사를 비워서 처리할 일이 많을 거예요. 자신이 만든 회사라 괜찮다고는 했는데··· 혹시 방치해서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배영옥은 우하란에게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배 여사님 눈엔 걱정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볼 때 따님이 워낙 똑똑해서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네. 설령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이틀이면 해결할 정도로 사소한 문제일 겁니다.”
“호호. 선생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참! 선생님 말엔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는 거 아세요?”
“에······? 처음 듣는 얘긴데 왠지 모르게 으쓱해지네요. 하하하.”
두삼은 겉으로는 힘이 난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지만 영혼이 없는 리액션이었다.
솔직히 누군가가 자신을 믿는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믿음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 그에 부응하고자 필요 이상 노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일이 어긋났을 땐 믿음의 크기만큼 원망으로 돌아올 수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됐다.
두삼은 배영옥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대나무 숲길을 한 바퀴 돈 후에 치료를 위해 집으로 내려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두삼은 뜸에 불붙이는 걸 도와주기 위해 서 있는 정소라 간호사와 임맥 치료를 위해 누워 있는 배영옥과 눈을 마주하며 치료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의 일은 임맥이라는 몸속 큰 도로를 꽉 막고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양의 기운을 가진 쑥뜸으로 돌처럼 굳어버린 이물질을 부드럽게 하고, 침으로 부드러워진 이물질에 꽂아 균열이 나게 한 후, 안마로 균열된 이물질을 잘게 쪼개는 방식이었다.
물론 두삼은 침 대신 지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뜸에 불을 붙여주세요.”
두삼의 지시에 정 간호사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 뜸을 건넸고 두삼은 그것을 임맥의 시작하는 혈인 곡골, 중극, 관원, 석문에 놓았다.
‘부드러워져라! 부드러워져라!’
얼마 전에 뚫어둔 회음을 통해 보낸 기로 곡골을 두드리며 때를 기다렸다.
“뜸에 살이 타는 것 같은데요?”
고깔 모양의 뜸이 3분의 2쯤 타고 들어가자 피부가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뜸을 주세요.”
얼른 뜸을 교체했다.
임맥의 길을 막고 있는 이물질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탄탄했다. 같은 위치의 뜸을 다섯 번째 교체하고 나서야 비로소 연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압으로!’
엄지에 기를 바늘처럼 뾰족하게 만든 후 경락을 따라 0.5센티미터 간격으로 꽂았다. 그리고 다시 둥글게 기를 두른 손가락으로 경락 주변을 따라 꾹꾹 누르면서 이물질을 부순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아! 게다가 이제 시작인데 생각보다 기의 소모도 심하고. 짧게, 짧게 끊어가려던 생각을 바꿔야 하겠는걸.’
원래 계획은 곡골에서 석문까지 뚫어볼 작정이었으나 현재 상태로는 가진 기를 다 쓴다고 해도 어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달리 생각해 둔 이물질의 벽을 무르게 만든 후에 한꺼번에 뚫는 방법을 실험해 봐야 한다는 것인데 이 방법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무르게만 만들다가 배영옥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거지.’
두삼은 머뭇거리는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바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들어갔다.
“제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뜸에 불을 붙여주세요. 이제부터 지루하고 긴 시간이 될 테니 편하게 앉아서 제 말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그럴게요.”
정 간호사는 싫은 내색 없이 묵묵히 답하며 뜸에 불을 붙여 건넸고 두삼은 정면의 정중앙선을 따라 위치한 임맥의 혈에 뜸을 놓았다.
치료실은 금세 쑥 타는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잘 생각한 겁니다, 헬렌 우. 당신의 회사, 아니, 이젠 우리 회사의 일부가 된 헥사네트워크는 앞으로 잘 키워 나가겠습니다.”
우하란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웃으며 손을 내미는 사내의 얄미운 모습에 그의 수염을 라이터로 불태워 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가 애지중지하며 가꾸는 수염이라는 알기에 수염을 없앤다는 상상만으로도 지금 느끼는 묘한 패배감을 덮을 수 있었다.
우하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미 회사를 넘기기로 사인을 한 이상 어떤 미련도 없었다.
“조나단, 당신이 2년 전에 했던 말이 사실이 되었네요. 축하드려요.”
처음 회사를 만들고 6개월이 되던 날, 조나단은 다짜고짜 헥사네트워크로 찾아와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시하며 그녀가 만든 주식 예측 프로그램을 팔라고 말했었다.
당장 억만장자라 불리며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 액수.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를 주더라도 절대 팔지 않을 거라 장담하며 거절했었다.
그는 끈질겼다. 웃는 얼굴로 서너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액수를 조금씩 높여 불렀고 거절하면 반드시 팔게 될 거라며 그녀를 긁고 돌아갔었다.
한데 마침내 2년 만에 그의 말이 사실이 된 것이다.
“사실 헬렌, 당신이라면 절대 팔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국에서의 일 때문에 5개월을 넘게 회사를 비우고 있다는 얘길 듣지 않았다면 올해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랬나요? 저도 회사에 이렇게 마음이 떠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젊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의 모든 열정이 담긴 회사였다.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이름난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에 쏟은 열정의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신경을 썼어야 했다.
성공을 함께 나누고 싶던 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걸을 방치하게 만든 곳이라 생각하자 오만정이 떨어져 버렸다.
“아무튼 당신의 끈질김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오늘은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해서 곤란하니 다음에 미국에 오면 식사나 같이해요. 제가 대접 거하게 할게요.”
“그날이 오길 기다리죠. 그리고 부디 어머니 일은 잘되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조나단.”
계약을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오자 스무 명 정도의 직원들이 사무실 여기저기서 서성거리다 일제히 그녀를 바라봤다.
“계약은 생각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끝났어요.”
“오오~”
“우와!”
직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판다고 했을 때 반대하던 이들도, 찬성했던 이들도 같은 반응이었는데 오늘부로 일부는 천만장자가 되고, 일부는 백만장자가 되었으니 당연했다.
“마무리 부탁드려요. 그리고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나흘 동안 이미 충분히 헤어질 준비를 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보고도, 인사도 짧았다.
우는 사람 없이 모두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뒤로 하고 우하란은 바로 공항을 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14시간의 비행 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시원섭섭하시겠습니다.”
대기 중이던 최익현이 그녀의 짐을 받아 들며 위로를 했다.
“저보단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최 실장님에게 죄송해요.”
본래 최익현은 한국 헥사네트워크 지사를 설립할 생각으로 올 초 한국에 들어올 때 데리고 온 직원이었다.
“1년도 일하지 않았는데 퇴직금이라 할 만큼 두둑하게 챙겨주셨잖습니까?”
“그야 열심히 하셨잖아요. 그리고 현재 실장님이 지내는 곳은 제 명의로 사둔 곳이니 편하게 머물다가 빼도 돼요.”
“하하하! 다행이네요. 사모님이 나을 때까진 계속 돕고 싶었는데 쫓겨나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최익현은 너스레를 떨며 계속 돕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다.
현재 사람이 많이 필요가 없어 최소한으로 줄일 생각이었다. 한데 자진해서 돕겠다는 사람마저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서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구해주세요.”
“왔다 갔다 하겠습니다. 막연히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요.”
“편한 대로 하세요.”
두삼이 구해달라는 것이 무엇일지, 언제 구해달라고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것처럼 대기하라는 것도 그에겐 곤욕일 수 있겠다 싶었다.
“자, 그럼 악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냥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주셔도 되는데······.”
“모셔다 드리는 게 제가 편합니다. 편하게 쉬세요. 한숨 자고 나면 도착해 있을 겁니다.”
최익현은 연인과 드라이브라도 하는 양 신이 나서 차를 몰았다.
우하란은 들뜬 그를 보며 표정을 살짝 굳혔다. 딱히 여지를 준적도 없는데 때때로 자신에게 구애의 눈빛을 보내는 그가 부담스러웠다.
‘괜한 말을 했네. 엄마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확실히 선을 그어야겠어.’
지금은 사랑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설령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최익현에겐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