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5. 하나씩 알아가는 것들(3)
***
어린 나이에 가수가 되고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던 은희경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사회의 쓴맛만 잔뜩 봐야 했다.
불행하다면 불행한 삶에 그나마 잃은 것은 많지 않았다. 포기할 때 포기할 줄 알고 지킬 것은 확실하게 지키는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능력도 백도 없는 그녀에게 몸을 요구하는 은밀한 제의가 있었다. 딱히 요조숙녀도 아니었고 2차를 나가진 않았지만 노래방 도우미도 했으니 말이다.
또한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건 아니었는데 다만 즐기기 위해서, 혹은 사랑해서가 아닌 뭔가를 이루기 위해 몸을 파는 건 싫었다.
즐기는 것과 파는 것이 뭐가 다르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은희경에겐 달랐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뵀을 때 떳떳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은희경이 꿈을 포기하고 서울을 떠나려 할 때 때마침 같이 도우미를 하던 이의 소개로 악양으로 오게 되었다.
흔히 ‘다방 레지’라 불리며 창녀 취급을 받는 직업이었지만 숙소를 구하기 위해 약간의 선불금을 받고 2차 없이 원할 때 언제든지 그만둔다는 조건으로 하고 있었기에 다른 힘든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좋았다.
푸다다다다!
은희경이 탄 50㏄ 오토바이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다방 앞에 섰다.
그녀는 방금 오토바이 가게에 커피 배달을 마치고 오늘 길이었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배달용 오봉(쟁반)을 뒷좌석에서 꺼내려던 그녀는 무릎에 힘이 없는지 순간 휘청했다.
“에구구! 마사지를 받고 여러 차례 오르가즘을 느끼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앓는 소리를 하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곤 얼굴을 붉혔다.
“미친년! 거기서 신음 소리를 내다니··· 으~ 쪽팔려.”
두삼이 혈을 자극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녀는 자책을 하며 다방으로 들어갔다.
“언니, 나 왔어요.”
오봉과 함께 커피값과 티켓비의 일부를 주방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리고 빈자리에 가서 눕다시피 앉았다.
“얘, 넌 배달도 많이 밀렸는데 뭐 한다고 이제야 온 거니?”
주름을 감추려고 다소 진하게 화장을 한 중년 여성이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언니 좋아하는 돈 벌어오느라 늦었죠. 티켓비 두 시간 언니 몫은 거기 뒀어요.”
“넌 티켓 끊으면 오히려 손해야. 너 찾는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원, 언제는 티켓 팔라고 그렇게 성화더니 정작 하고 왔더니 뭐라 하는 건 뭐예요?”
“이런 티켓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마담은 만 원짜리 두 개를 흔들며 투덜댔다.
성매매를 하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마담 몫으로 3, 4만 원이 떨어졌다. 한데 일반 티켓의 경우 시간은 시간대로 많이 잡아먹으면서 버는 게 적으니 투덜대는 것이었다.
“언니!”
“알았다, 알았어. 기지배 말도 못 하니. 네가 마음만 먹으면 목표로 한다는 2억도 금방이겠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은 은희경의 새로운 꿈은 2억을 모아 고향으로 가 부모님 집을 사주고 작은 가게를 내는 것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그래, 누가 네 고집을 꺾겠니.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얼른 배달이나 가.”
“휴우~ 나 너무 피곤해요. 제발 1시간만 편히 쉬게 해줘요. 그 다음엔 열심히 할게요.”
“뭘 한다고 피곤···! 너 설마······?”
마담은 티켓비를 삥땅친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로 은희경을 바라봤다.
“아니거든요!”
은희경은 발끈하며 외쳤다. 그때 다방 문이 열리고 다른 아가씨가 들어오며 말했다.
“피곤해 보이면서도 얼굴이 활짝 핀 게 어디 가서 숫총각이라도 잡아먹은 얼굴인데? 다녀왔어요, 언니. 여기 돈. 근데 이 동네에 숫총각이 있었던가?”
“수현 언니, 고생했어.”
“응. 근데 진짜 아냐?”
비슷한 처지라고 처음 왔을 때부터 알뜰살뜰 챙겨줬던 송수현의 물음이었기에 마담에게 했던 것처럼 대답할 수는 없었다.
“커피 시킨 사람이 마사지산데 갑자기 티켓을 끊더니 마사지를 해줬어.”
“에? 너 주무르려는 변태 아냐?”
“아냐. 서울에서 몇 번 받아본 적 있는데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실력이 좋더라고.”
“그래? 근데 마사지를 받은 얼굴이라기엔 너무 이상한데?”
“사실······.”
은희경은 오늘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상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얘기가 끝나자 놀라움은 뒤에 있던 마담에게서 나왔다.
“정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해요. 직접 겪어보세요. 아! 그리고 혹시 관심이 있으면 속옷은 꼭 두툼한 걸로 입고 가세요.”
“속옷은 왜?”
“···아무튼 그러는 게 좋을 거예요. 전 피곤하니까 조금만 쉴게요.”
뭔가를 말하려던 은희경은 말하기 민망했는지 입을 다물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곤 얼른 일어나 쪽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
주변의 산 때문에 일찍 해가 지는 매계리는 겨울이 되면서 더욱 밤이 길어졌다.
두삼은 저녁을 먹고 배영옥의 저녁 치료가 끝나면 할 일 없이 TV나 인터넷을 하거나 할아버지가 남긴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빠를 땐 10시였고 느려도 12시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이젠 5시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전에 절로 눈이 떠졌다.
물주 우하란 덕분에 기름 걱정 없이 보일러를 틀었는데 뜨끈뜨끈한 바닥이 더 자라는 듯 몸을 붙잡는 걸 빼면 일어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어제 먹었을 때랑 맛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자리끼로 준비해 둔 한약을 들이켜곤 밖으로 나갔다.
“이제 완연한 겨울이네. 그나저나 저 여자는 정말 부지런한 것 같아.”
언제나처럼 서리 내린 마당에서 요가를 행하고 있는 우하란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수돗가에서 씻었다.
“으~ 추워. 이젠 안에서 해야겠다.”
지하수라 겨울엔 수돗물보다 오히려 따뜻하지만 추울 땐 따뜻한 물이 아닌 이상 차이가 없었다.
떨떨 떨며 씻기를 마치고 평소처럼 물을 마실 때였다. 물맛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뭐지?”
다시 마시고 입에 머금어 차이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물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물맛······! 아! 아냐!’
포기하고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삼키는 순간 다시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을 더 마셔보지만 정확하게 뭐가 다른지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제 밤에 술 마셨어요? 무슨 물을 그렇게 계속 마셔요?”
요가를 마치고 수돗가로 온 우하란이 두삼의 행동이 이상했는지 물었다.
“···하하. 그냥 목이 말라서요.”
두삼은 설명하지도 못하는 물맛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녀가 쓸 수 있도록 한쪽으로 물러났다.
“몸은 좀 어때요?”
“이젠 괜찮습니다.”
“많이 안 좋아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얼굴이 어제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치료를 시작할 겁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어머니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서야 고맙긴 한데··· 선생님의 몸이 상하길 바라는 건 아니에요.”
걱정해 주는 듯한 그녀의 말에 두삼은 약간의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말처럼 그동안 배영옥을 치료하기 위해 무리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 비견되게 우하란이 도와주는 것도 많았다.
물론 현재 갑의 입장이기에 받을 것만 받고 무리하지 않아도 우하란이 두삼에게 불만을 말하지는 못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염치없는 짓은 하기 싫었다.
맡기로 한 이상 오로지 치료에 전념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가볍네요. 근데 좀 더 무리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두삼은 자신의 노고를 우하란이 알아준다고 생각하니 몸을 생각하며 조금 천천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말했다.
“······! 아, 아무튼 몸 관리 잘하세요. 지금 산에 갈 건가요? 잠깐 드릴 말이 있는데.”
두삼의 말에 약간 당황한 듯한 우하란은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아뇨. 오늘은 어머님 식사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세요.”
배영옥은 쌀뜨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미음과 영양 주사만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는 그가 생각 중인 치료 방법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별도의 영양제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의 암 환자 기록에 여러 가지 영양식이 있어 그걸 참고할 예정이었다.
“내일부터 한 나흘쯤 미국에 다녀오려는데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요?”
배영옥의 상태는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기에 가급적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것이 좋았다.
두삼은 우하란이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는 걸보면 중요한 일이 분명했다.
두삼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가야 할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가시는 게 좋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잘될 거라는 보장도 할 수 없고요. 선택은 하란 씨의 몫입니다.”
개인적으로 나흘쯤은 버티게 할 수 있으니 다녀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00퍼센트의 확신이 아닌 이상 말해선 안 됐다.
“···그렇군요. 생각해 볼게요.”
고민을 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어젯밤에 보던 책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이라기 보단 해가 날 때 말리는 약재들과 시장에서 사온 것들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음, 할아버지는 똑같은 위암 환자인데 왜 다른 약재로 탕약을 만든 걸까? 남녀의 차이인가? 아냐. 똑같은 남자 환자인데도 다르잖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봤을 땐 분명 증상은 같은데 뭐가 다른 걸까?”
한언수의 기록물엔 중요한 단서가 담겨 있었다.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을 합쳐야 비로소 치료가 가능한 기가 된다는 것도 그의 스케줄 표를 보고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한언수는 일주일 간격으로 같은 시간에 항상 여성 손님들을 받았었다.
물론 억측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삼이 보기엔 확실히 음기를 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너무 끼워 맞춘 건가? 아님 아직 볼 눈이 없는 건가? 도무지 모르겠네.”
스케줄 표에도 의미가 담겨 있으니 암 환자용 음식 제조에도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보고 또 봤지만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나와 있는 것 중 배영옥과 증상이 가장 유사한 사람의 음식대로 만들어볼 요량으로 책을 옆에 놓고 약재를 모았다.
그러다 책에 버섯을 떨어뜨렸다.
“아무래도 다 코팅을 해두든가 약품 처리를 해둬야겠네.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어라?!”
버섯 부스러기를 털어내다가 곰팡이라 생각되는 점을 발견했고 그 점을 긁어내다가 어떤 규칙을 찾아냈다.
‘곰팡이가 아니잖아! 우연히 찍힌 것이 아닌 할아버지가 일부러 찍어둔 것이었어! 여자 환자는 거의 찍혀 있다는 건 설마 음의 기운이라고 말하는 건가······?’
점이 찍힌 것이 음의 기운을 나타낸다고 추측을 하면서도 두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같은 약재인데도 점이 찍힌 것도 있었고 없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음을 보충하는 약재인 음의 숙지왕, 당귀, 맥문동에 점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풀린 매듭은 한 가지 가설을 세우자 쉽게 해결이 됐다.
[약재를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따라 가진 기운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구분을 할 수 있지?’
이리저리 만져보고 살펴보다가 입에 넣어봤다.
“!!!”
쓴 한약재가 목으로 넘어가면서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까 물을 마셨을 때와 같은 느낌.
두삼은 약재를 마구 주워 먹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음양의 기운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