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조우
2019.03.08.
“……뭐, 뭐, 뭐라……고요?”
“친오빠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외삼촌도……. 다. 알고 있어.”
박제된 것처럼 굳어 있던 민영의 얼굴이 점점 펴졌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은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다래졌다.
“……언니가 어떻게, 아니…… 어째서…….”
말도 안 돼. 어떻게 홍지원의 누나가 내 가족을……?
여자의 말마따나 당최 믿기지가 않는 이야기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민영은 곧바로 경계의 눈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여자의 바로 다음 말 때문이었다.
“네 오빠, 곧 여기로 올 거야. 내가 여기로 불렀어.”
“……네?”
“좀 급하긴 하지만, 될 수 있는 한으로 빨리 만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 네가 이해 좀 해줘.”
“……아, 아니, 전…….”
친오빠를 알고 있다는 소식도 갑작스러워 죽겠는데, 이제는 또 당장 친오빠가 여기로 온단다.
이렇게 갑작스러울 데가…….
일순 패닉 상태가 된 민영은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하는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바로 그때였다.
“여보, 나 왔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훤칠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말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 집의 또 다른 주인이 도착했음을 알아본 민영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원과의 깜짝 콘서트 이후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 안녕. 웬일이야?”
“아, 전…….”
임신한 예원을 위해 그는 잔뜩 장을 보고 온 모양이었다.
습관처럼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민혁이 민영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반면, 민영은 우물쭈물한 채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예원은 그런 두 사람을 중간에서 번갈아 보았다.
순간 울컥, 이상야릇한 감정이 일었다.
이 둘은 과연 알고 있을까.
당신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순간이, 마침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는 걸.
“민영아, 인사해.”
“네? 방금…… 인사했는데.”
“아니, 그런 인사 말고.”
어리둥절해하는 민영을 향해, 예원은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는 것처럼.
“민영아.”
“…….”
“여긴, 현민혁 씨. 내 남편이자, 지원이 매형이고.”
그리고…….
작게 달싹거려지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네 친오빠이기도 한 사람이야.”
임신 사실 고백에 이은, 또 한 번의 천기누설이었다.
“……!”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같은 핏줄을 가진 두 남녀의 눈빛이 맞닿았다.
누가 봐도 남매인 양 꼭 닮아 있는 두 얼굴에는, 동시에 충격과 혼란스러움이 가득 번졌다.
* * *
꽤나 밤이 깊어진 시각.
예원의 배려로 단 둘만 남아 있게 된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쉽사리 입을 열지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아까 전, 좀처럼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원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미 자신이 철저히 다 알아보고 말하는 것이니 안심하라며, 좀 더 일찍 말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난 빠져줄 테니 둘이서 그간 못 했던 이야기들을 맘껏 하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이고 간 채였다.
“…….”
“…….”
하지만, 이 방법은 아무래도 예원이 틀린 것 같았다.
아무리 친남매라 해봤자, 20년 가까이 멀어져 있던 그들의 사이가 순식간에 좁혀질 리는 없었으니까.
저 하늘의 별과도 같은 톱스타지만, 친구 매형이라 우연찮게 만나게 된 남자.
처남의 친구이기에 우연찮게 만나게 된 여자아이.
겨우 그 정도로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예원이 전해 준 이야기는 청천벽력, 아니, 그 이상이었다.
둘 사이의 공백을 채운 어색함이 까딱하면 눈으로 보이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그 상태로 그렇게 얼마쯤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무겁게 내려앉은, 하지만 초유의 용기를 낸 민혁의 목소리가 먼저 허공을 갈랐다.
“……미안……하다.”
“…….”
“……너무 늦어서.”
새삼스러운 사과였다.
눈을 크게 뜬 채 입술을 꾹 누르던 민영은 슬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뭐, 얼마 전에야 알았는걸요.”
내가 입양아라는 걸. 당신네에게서 버림받았었다는 걸.
괜찮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 사실을 상기하자 눈물이 눈치 없이 비어져 나오려 했다.
금방이라도 붉어지려는 눈가를 억지로 다잡으며, 민영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잘…… 지냈어?”
“……네, 그럼요.”
“…….”
“우리 부모님, 엄청 좋은 사람들이에요. 여동생도 하나 있는데 엄청 예쁘고 귀여워요.”
“…….”
“……물론, 나랑은 안 닮았지만.”
떨어뜨렸던 고개를 든 민영이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닮았다 소리를 지겹도록 들을 때는 도통 모르겠더니, 이제 보니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저와 닮아 있는 이목구비였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 했을까.
솔직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분명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핏줄끼린 당연히 끌리기 마련이니까, 텔레파시처럼, 블루투스 신호처럼……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뭔가 특별한 느낌을 받을 거라고 누누이 생각했고 확신했다.
그런데 웬걸. 그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저 잘생긴 얼굴을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일말의 느낌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건 저를 본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피차 알아보지 못 했던 주제이면서도, 민영은 왠지 모르게 그가 야속해졌다.
그렇게나 오래 찾아다녔다면서, 어떻게 날 못 알아볼 수 있지. 어떻게 모르고 지나칠 수 있지.
양심적으로 먼저 알아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몰랐던 그가 미웠다.
하다하다 말도 안 되는 억지까지 쓰고 싶었다.
“사실은요. 실제로 만나면, 되게 업신여기고…… 그럴 생각이었거든요.”
“…….”
“날 그렇게 버려놓고 잘 살았냐, 두 발 뻗고 편히 잤냐. 따져 묻고 싶었어요. 알고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게 살았길, 기도했어요. 그러면서 또, 행복하게 잘 큰 날 보면서 후회하고 부러워하길 바랐어요.”
“…….”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으면, 굳이 안 찾았을 텐데.”
내 친오빠란 사람이 이렇게 톱스타까지 되어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누구인지 모를 내 가족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 반드시 그 코를 납작 눌러 주리라 다짐했던 것은…… 결국 아무 소용도 없어진 셈이었다.
눈물이 울컥 솟아오른 민영이 섬세하게 쌍꺼풀 진 눈을 내리깔았다.
민혁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양을 뜯어보았다.
여자아이라 그런가, 그 모습이 영락없이 엄마를 빼닮아 있었다.
슬프게도, 또 기쁘게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네 말이 아주 틀리진 않아.”
잠시의 정적 뒤, 그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나, 불행했어.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훨씬 많이.”
나직하면서도 참담한 목소리.
민영은 눈망울 가득 눈물을 담은 채로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엔 아무것도 맺혀있지 않았으나, 그도 어쩐지 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널 찾는 게 과연 옳은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어. 내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건가. 내가 너무 미워서, 찾아도 안 보겠다고 하는 건 아닌가. 수없이 상상하고 예상해 보면서 나 자신을 괴롭혔어. 근데…… 그런데도…….”
“…….”
“……어떻게든 찾고 싶었어. 정말로.”
비록 이런 방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가 허무한 듯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에 나 기자회견 한 거 봤지? 우리 친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야. 자기 뜻을 위해서라면 처자식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사람. 철저히 제 맘대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우린 그런 아버지의 씨를 받고 태어났고, 난 그 사실을 죽도록 저주했어. 네가 내 곁에 없는 동안, 내내 그렇게 살았어. ……난.”
“…….”
“내 탓이 아니었다고 변명하지 않을게. 네가 거슬린다면 사과도 안 할게. 그런데…… 네가 오빠를 좀 이해해주면 안 될까.”
문득, 모든 건 당신 탓이 아니라던 예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거기서 힘을 얻어, 그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하게 뱉어냈다.
제 입을 통해 나가는 말인데도 왠지 제가 하는 말이 아닌 것만 같았다.
“먼저 알아보지 못 해서 미안해. 너무 늦어서, 또 미안해.”
“…….”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
“…….”
“……민영아.”
그가 그 이름을 부른 순간, 민영의 볼을 타고 가느다란 눈물줄기가 또르륵 흘러내렸다.
불가항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제 여동생을 보며 희미하게 웃던 그의 시선이, 치맛자락 아래로 살짝 보이는 무릎으로 옮겨졌다.
그 곳엔,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작고 붉은 나비 한 마리가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아주 선명하게.
“진짜…… 그대로네. 아직도.”
혹시나 했는데, 모든 게 다 그대로였다. 저런 작은 흔적조차도.
그 사실이 그는 눈물겹게 기뻤다.
“……예쁘다.”
“…….”
“너무 잘 컸다, 내 동생.”
나 없이도 잘 커줘서…… 정말 고마워.
그 말에, 민영은 결국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갓난아기 시절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보였다. 정말 우습게도.
망설임 끝에,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민혁은 가녀린 그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리고 토닥였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포옹과 함께, 민영은 그간 쌓여 있던 것들을 남김없이 쏟아냈다.
울분도, 아픔도, 슬픔도. 모조리 다.
“……흡, 흐흑…….”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더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 처음 안긴 오빠의 품은.
* * *
민혁은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민영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어쩌다가 그녀가 입양 됐던 건지, 그동안은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등등.
다행히 민영은 그를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성장과정 중 큰 탈 없이, 둘 다 무사히 잘 커서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그녀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 주고 온 민혁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예원을 찾았다.
그리고 취조 아닌 취조를 시작했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렇게 시간이 많았는데.”
“……혹시나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안 되니까요. 완전히 확실해지면 얘기하고 싶었어요.”
깨끗한 침대 위, 이제는 잠옷도 나름 익숙해진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예원이 조용히 항변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갑자기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
“뭐 어쨌거나, 나 때문에 잘 풀렸잖아요. 그럼 됐죠. 나도 혼자서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정공법이 제일일 것 같았어요.”
성환과 영덕에게서 확신한 답변을 얻고 난 후, 나름 혼자서 치열한 고민을 거듭한 예원이었다.
그에게는 먼저 사실을 알려 둘까 하다 그만두었다.
차라리 두 쪽 다 모르면 모를까, 한 쪽이 알고 있는 상황에선 그 부자연스러움이 더욱 배가 될 것 같았으므로.
결과적으로 예원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민영이 아까 많이 운 것 같던데. 그동안 속상했던 게 많았나 봐요.”
“……그러게.”
“민혁 씨도 울었죠?”
“……아니, 난 안 울었어.”
“에이, 진짜?”
“그럼. 내가 언제 우는 거 봤어?”
난 배우치고 눈물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야.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남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그는 제가 눈물을 흘렸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 앉아있는 예원은 그저 코웃음 칠 뿐이었다.
아까 눈곱 떼는 척, 은근슬쩍 눈가 훔치는 거 내가 다 봤는데, 무슨.
“쳇, 수진 어머님 돌아가시고 며칠을 울고 짜고 하던 사람이 누군데.”
“그, 그야…… 그땐 특수한 상황이니까 그랬던 거고.”
“그럼 오늘은요? 오늘은 특수한 상황 아니었어요?”
“오늘은…… 기, 기쁜 날이잖아. 슬픈 날이 아니라.”
그다지 납득이 가지는 않는 논리였으나, 픽 웃은 예원은 그런 그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뭐. 본인이 아니라는데. 아니라고 쳐주지 뭐.
“어쨌든 봐요. 맞죠? 내가 앞으론 좋은 일들만 있을 거라 그랬잖아요.”
“……그럼,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죠, 안 지가 언젠데. 주가윤 씨랑 그 일 있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그 여자 얘긴 하지 말자.”
곧바로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탓인지 그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런 그를 달래듯, 예원은 힘을 주어 제 남편을 꽉 끌어안았다.
“드디어 만났으니까, 민영이한테는 앞으로 잘해 주면 돼요. 괜히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말고요.”
“……어떻게 잘 해주지?”
“글쎄요. 그거야 오빠님께서 알아서 생각하실 문제죠.”
“……오빠?”
순간, 그가 멈칫하더니 예원을 내려다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요?”
“방금, 나한테 오빠라고 한 거야?”
“……네?”
아, 아니. 얘기가 또 왜 그쪽으로 튄담?
생뚱맞은 질문에 그녀의 얼굴이 대번 당황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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