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위안이 되는 사람
2019.01.22.
“현민혁, 설명해 봐.”
“…….”
“이거 사실이야?”
오랜만에 찾은 소속사 사무실의 공기는 퍽 가라앉아 있었다.
제게로 툭, 던져진 장 대표의 휴대폰을 들여다본 민혁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신인배우 현민수, 알고 보니 현민혁의 이복 형?」
「현민혁, 외동이라더니…… 현태균·현민수와 얽힌 사연은?」
「현태균 측, ‘현민혁 내 아들 맞다’ 발 빠르게 인정」
대체 언제부터 준비되었던 건지, 기사들은 이미 손 쓸 새도 없이 다 나가버린 상태였다.
하얀 바탕에 파랑색 텍스트로 빼곡히 차 있는 온갖 헤드라인들이 곧장 눈에 총알처럼 박혀들었다.
“왜 말을 못해. 사실이냐고 묻잖아!”
이미 다 까발려진 마당에 발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혁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사실이에요.”
“……이 실장. 이 실장도 알고 있었나?”
“예?”
반대편에 앉아 있다 얼떨결에 지목 받은 성환도 흠칫 놀라 대답했다.
“……아,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
그들을 잠시 허망한 눈으로 번갈아보던 장 대표는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민혁이 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내가 너한테 이 정도밖에 안 돼?”
“…….”
“딴 사람한텐 다 거짓말해도, 그래도……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했어야지! 어?”
서로 알고 지낸 세월만 10년이 넘는다.
생각지 못한 소식을 기사로 접한 그의 맘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죄송해요. 영영 밝혀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데, 제가 아무래도 경솔했습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쯤 대서보지도 않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듯 순순히 사과만 해오는 민혁을 장 대표는 화나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돌로 나름 이름을 날렸지만, 배우로는 까마득한 신인이었던 그를 직접 발탁해 이 자리까지 키운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입사 초 그는 분명 양친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했다.
덕분에 의지할 데라고는 외삼촌 정도밖에 없었던 민혁의 처지를 늘 안타깝게 여긴 장 대표였다.
최대한 살뜰히 챙기고 돌봐주려 노력했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각별하게.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장 대표인만큼, 오늘 일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민혁만을 탓할 수도 없었다.
이번 일에 가장 상처 받은 건…… 아마도 당사자인 그 본인일 테니까.
“현민혁.”
“…….”
“실은, 얼마 전부터 이니셜 기사가 하나 떠돌았다. 우리 사무실로 확인 전화까지 왔었지.”
한숨과 함께 이어진 장 대표의 말에 민혁은 놀란 눈을 했다.
“예? 무슨…….”
“유명 톱스타 a군이 알고 보면 유명 정치인의 아들이라던데, 혹시 그게 너 아니냐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그냥 적당히 부인하라고 했다만, 지금 생각하니…….”
다른 일엔 굼뜨고 멍청하기만 했던 기자들이 어떻게 이번 일만 그렇게 귀신같이 냄새를 맡았을까.
그 배후에는, 분명 누군가의 장난 같은 손길이 더해졌을 터였다.
진작 알아채고 조치하지 못한 스스로가 장 대표는 한탄스러웠다.
“어쨌든 간에, 저쪽에서 이미 다 인정해버렸으니 우리는 도리가 없어. 그냥 닥치고 이 꼴을 구경하는 수밖엔.”
“…….”
“이 시점에서 이딴 카드를 꺼내든 의도야 빤한 거 아니겠냐.”
선거를 위한 이슈 몰이, ‘스타 가족’이라는 타이틀로 후광 얻기 정도일까.
아예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바는 아니었지만, 민혁은 어쩔 수 없이 쓴 웃음을 삼켰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환멸이 올라오고 있었다.
“당분간은 이 건으로 좀 시끄러울지도 몰라. 네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형이란 놈까지 나온 거 보니까 아주 작정한 것 같은데. 일단 지금 우리로선 조용히 있는 게 베스트니까, 섣불리 괜한 짓 하지 말고 마음이나 단단히 먹어.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그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말로 오랜만에 들른 본가─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은 곳이지만─였다.
언제나처럼 상석에 앉은 채 평온하게 차를 들이키고 있는 제 아버지를 향해, 민혁은 잔뜩 날이 선 눈빛을 번뜩였다.
“왜, 약속 안 지키신 겁니까.”
“…….”
“이런 짓만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
그야말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웬만하면, 아니…… 실은 절대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런 지긋지긋한 가정사 따위.
제2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장 대표에게, 양친이 돌아가셨다는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현민혁’이라는 멀쩡한 이름 대신 ‘현태균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자신이 싫었다.
또 그걸 보면서, 자꾸만 잊고 싶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될 자신도 싫었다.
그래서였다. 그 나름대로 딜을 보기로 했던 것은.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아버지의 일을 저의 일과 결부시키진 말아주세요. 제가 아버지 아들이란 거, 절대 이 세상 누구도 알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그때, 태균과 라희는 다행히 별 저항 없이 동의했었다.
너 또한 너저분한 과거에 대해 발설치 않고, 이대로 가만히 입 다물어 주겠다면 네가 뭘 하든 상관 않겠노라고.
앞으로도 지금 같이 남남처럼 지내주겠노라고.
선심이라도 쓰는 양 뻔뻔하게 공언하던 이들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선연했다.
……허나 지금.
막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그저 그를 향해 피식 웃음 지을 뿐이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도 있는 게다. 너처럼 그렇게 순진하게 굴면, 이 세계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어.”
“…….”
“너도 다 알고 있지 않니. 그때의 너랑 지금의 너는, 상당히 많이 다르다는 거.”
차의 여운을 머금고 있는 태균의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이 띠었다.
명석한 부모님의 두뇌를 닮아 얄궂게도 똑똑한 민혁은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이용가치가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건가?’
그래서 기껏 한 약속도, 손바닥 뒤집듯 깨버린 거고?
“…….”
민혁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태균을 노려보았다.
어릴 적, 나름 따스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표와 인기를 먹고 사는, 능구렁이 같은 프로 정치인.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모습이 왜 이리 새삼 역겹게 느껴지는지.
종일 들어간 것도 없는 속에서 신물이 다 올라오는 것 같았다.
“……형은, 대체 언제부터 ‘현민수’가 된 겁니까.”
한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민혁’과 ‘현태균’이라는 이름으로 점철돼 있던 기사들의 약 70퍼센트 정도에는 꼭 ‘현민수’라는 이름이 꼽사리처럼 끼어 들어가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이름에 잠시 당황했으나, 알고 보니 그건 제 하나뿐인 빌어먹을 이복형의 예명인 모양이었다.
현민혁, 현민수.
친아버지에게서 받은 이름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던 형이,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마냥 저와 흡사한 이름을 꿰차고는 배우를 하겠다고 나섰다.
누가 봐도 의도적인 작명이 아닐 수 없었다.
“네 형, 미국에서 연기 공부를 꽤 오래 했어. 이번 기회에 한국에 아주 들어와서 제대로 시작해보겠다고 하더구나. 뭐, 배우가 가명을 짓는 게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
“…….”
“그러게 형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 일이 이렇게까지 된 데는 일정 부분 네 탓도 있어.”
……허.
그가 기가 막혀 입을 벌렸지만, 태균은 아무렇지 않게 곧바로 이어 말했다.
“네가 그쪽에서 먼저 자리 잡고 있으니, 뭐 이참에 네 덕 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밝히라고 했다. 보아하니 너희 처남이라는 아이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던데.”
“…….”
“아니냐?”
생판 남이었던 걔도 가족이라고 널 이용하는데, 우리라고 널 이용 못하리란 법 있느냐.
간단히 말해 그런 뜻이었다.
……최대한 차분히 얘기하고자 했는데.
민혁은 갈수록 자제력을 잃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내가?”
“…….”
“하하, 글쎄다. 나한테 그리 말하는 너도 그리 똑바른 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
“이래저래 다 우리에게 이로운 방법이야. 내가 서울시장을 넘어 대통령까지 되면, 너는 대통령 아들이 되는 거고. 그 하찮은 배우 나부랭이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일 아니냐.”
“…….”
“누가 뭐래도 난 네 아버지다. 그 전엔 우리끼리만 알던 사실이지만, 이젠 전 국민도 다 아는 사실이지. 어리광은 이제 그만부리고 현실을 받아들여.”
다시금 여유롭게 차 한 모금을 들이킨 남자가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잠자코 있던 라희도 얼른 거들었다.
“그래, 그쯤 했으면 됐어. 언제까지 아버지한테 그리 오만방자하게 굴 거야? 너도 이제 그만 굽히고 들어오렴. 형이랑도 좀 사이좋게 지내고. 너도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잖니.”
응? 민혁아.
진짜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가 퍽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껏 민혁이 보여 온 행동은 그저 어린 날의 치기에 불과했다는 듯한 말투.
그 덕분일까. 그의 인내심은 어느새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
젠장.
여길 찾아오기로 한 것 자체가 크나큰 실수였다.
잠시간 멍하니 여자를 쳐다보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조만간 반박기사 나갈 거예요. 판을 벌리신 건 아버지니까, 이제는 제 식대로 할 겁니다. 말리지 마세요.”
“허튼 짓 하지 마라. 그럴수록 너만 다쳐.”
“글쎄요, 저만 다치지는 않을 텐데.”
“…….”
“‘하찮은 배우 나부랭이’가 다칠 게 뭐 있겠습니까. 이 싸움에서 잃을 게 많은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새어머니예요.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죠.”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린 민혁이 부러 차갑게 웃었다.
그건 무엇보다, 자신의 지옥 같은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만 갑니다.”
휙 돌아선 그는 곧장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너희 요즘, 무슨 문제 있는 것 아니냐?”
별안간 튀어나온 한 마디가, 그의 발길을 돌려세운 것은.
“……뭐라고요?”
“너랑 새아기 말이다. 아무 일 없어?”
“……무슨 뜻이죠?”
이 타이밍에 저딴 질문을 왜 하는 걸까.
저도 모르게 등골에서부터 쎄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너는 항상 나를 너무 얕보는 경향이 있어. 네가 보기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이더냐?”
영문을 모른 채 흔들리고 있는 민혁의 눈을 넌지시 올려다본 태균은 비릿하게 웃었다.
“요즘 너희를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 내가 말 몇 마디만 슬쩍 흘려주면, 그걸 갖고 기사 열댓 개를 뚝딱 써낼 인간들이 사방 천지에 있지. 안 그래도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기사거리가 많이 궁한 모양이더구나.”
그리고 그 순간, 태균의 얼굴에선 희미한 웃음기마저 사라졌다.
보통 때 라희를 앞세워 놓고 잠자코 있었던 그는, 어느새 완전한 정적(政敵)을 대하는 듯한 얼굴이 된 채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깟 대비도 없이 이 판을 벌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성마르게 움직이다간 네가 아니라 새아기가 다칠 수도 있어. 허튼 짓 하지 말라는 거, 결코 허투루 한 말 아니다.”
“…….”
“그러니까 조용히 살고 싶으면, 그냥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예전의 너답게.
그러고 난 남자의 얼굴엔 다시금 미소가 피어올랐다.
“…….”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남이라도 이렇지는 않을 텐데.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 빛을 보게 만든 장본인.
하지만 외려 남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비정할 뿐인 제 아버지를,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채로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옷소매 아래로 힘껏 말아 쥔 주먹은 어느덧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아, 왜 이렇게 안 오지?”
두 사람의 신혼집.
1층 거실에 선 예원은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까 전 그가 귀가한다고 했던 시각을 이미 훌쩍 넘겨버린 탓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면 안 되는데.’
오늘 오전, 예원은 지영이 보내준 링크 덕분에 사건의 전말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기야 요즘 안팎으로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기는 했다.
쭉 좋은 추세를 보이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주춤하고 있는 시아버지 태균과 달리, 반대 진영의 경쟁 후보는 요사이 하루가 다르게 민심과 지지도를 얻고 있었으니까.
확실한 반등을 위해서는 그 남자의 인기와 명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선수를 치면, 민혁 쪽에선 아무 말도 못 하고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으리란 계산속이었을 터였다.
‘치사하고 더러운 인간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어리둥절해 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그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라 그 화가 더했다.
상황이 하루아침에 이리 우습게 될 줄이야.
물론 그를 이용해 먹으려는 것 자체에 화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쪽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제 남편의 안위뿐이었다.
“전화라도 해 볼까?”
설마 거기 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기다리다 못한 예원은 폰을 놓아둔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 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때마침 현관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혁 씨!”
예원은 화색을 띤 얼굴로 달려가 얼른 그를 맞았다.
그런데…….
“민혁 씨……?”
집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엄청나게 위태로워 보였다.
꽤나 떨어져 있는 거리임에도, 어쩐지 희미한 알콜 향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왜,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술 마셨어요?”
비로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른한 기운을 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제게로 바짝 다가온 예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예원아.”
힘겹게 예원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그는 버팀목을 잃은 것처럼 그녀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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