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76화 (76/102)

76. 못 참을 것 같아

2018.12.25.

그 일이 있기 몇 시간 전.

예원이 자리를 비켜준 거실에서는 윤 교수와 은아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애들 식 올리기 전에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이거 제가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

“아유, 아닙니다. 일 때문에 계속 미국에 계셨는데 달리 도리가 있으셨으려고요……. 이제라도 이리 뵙게 되었으니 된 거지요.”

가벼운 미소를 지은 은아는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건너편의 남자를 스캔했다.

비로소 처음 만나게 된 민혁의 외삼촌이자 예원의 은사, 윤 교수는 이목구비가 일부 민혁과 닮아 있긴 했지만 다소 평범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웃는 모습이 유난히 따뜻해 보이는 것이, 예원에게 인자한 시아버지 역할을 잘 해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부모 탓에 맘껏 사랑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조카.

그런 아이가 혹여 시가 쪽의 사랑마저도 받지 못할까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남자를 만나보고 나니 약간은 안심이 되고 있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저 없는 새에 요 녀석들이 깜찍한 짓을 해놔서. 처음 소식 듣고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아, 예. 아무래도 좀…….”

뭐 그때는,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을 정도였지.

문득 지나간 기억을 떠올린 은아는 그의 말에 수긍하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우리 현 서방이 워낙 잘생기고 반듯한 청년이라, 실제로 만나 보니 더없이 맘에 들더라고요. 우리 예원이한테도 가장 좋은 배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하하하, 그러셨군요.”

윤 교수는 금세 흡족해진 눈초리로 말을 받았다.

“실은…… 저도 사돈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예? 어떤……?”

“새아기 말입니다.”

그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호선을 그렸다.

“대학 시절부터 워낙 특출했던 아이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함께 일을 해보면 해볼수록 더더욱 놓치기 아까운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쁘고 착하고 당돌하고. 딱 우리 민혁이 색시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그럼, 설마 그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예, 사실은 다 제 의도대로 된 겁니다.”

“어머. 정말요?”

민혁에게 사장을 넘겨준 것부터, 예원에게 점장 자리를 주어 둘을 붙여놓은 것까지.

그게 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니.

은아는 살짝 놀랐다.

“물론 그땐 그냥 제 바람에 불과했지요. 일이 이렇게 빨리 성사될 줄 저라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민혁이 그 놈은 원체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했었고…… 무엇보다 그땐, 예원이한테도 남자친구가 있었을 때였으니까요.”

“……아, 네.”

“저도 처음 소식 들었을 땐 좀 놀랍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는데…… 이렇게 직접 와서 확인하고 나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습니다. 사돈께서도 이제 예원이 걱정일랑은 마시고, 마음 푹~ 놓고 지내십시오.”

“……예, 그래야지요.”

허허 하며 웃던 윤 교수가 물 한 모금을 홀짝 들이켰다.

한데, 은아의 표정은 어쩐지 그만큼 시원치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예?”

“아니, 사돈 얼굴이 영 밝지가 않으신 것 같아서.”

“아…….”

아무래도 애들을 가르치던 사람이라 그런가, 눈치를 살피는 솜씨가 꽤나 수준급이었다.

흠칫 놀란 은아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대꾸했다.

“실은, 전 아직 좀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예? 어떤 부분이요?”

“……그게, 다른 건 아니고…….”

이걸, 이쪽한테 말해도 되려나.

주저하던 그녀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걔들이 아직……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고요.”

“아. 아이요?”

“네.”

“…….”

“촬영이다 카페다 둘 다 원체 바빠서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결혼한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게 좀 걸리네요. 따로 말은 안 하지만, 혹시나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닌가 싶고…….”

“…….”

“물론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전 그냥, 지레 좀 걱정이 돼서…….”

일전에 예원에게 직접 물은 적도 있었으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다시 묻지도 못하고 속이 답답해지고 있던 차였다.

가능하면 하루빨리 좋은 소식을 듣고 싶건만.

슬쩍 목소리가 작아지는 은아를 보며 윤 교수는 흠 입술을 다물었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 문제라면 애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란 생각은 드는데……. 뭐 그래도 정 걱정이 되신다면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요.”

“……예?”

혹시나 하고 꺼낸 이야기였는데, 꽤나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사방에 제 편 하나 없던 판국에 갑자기 든든한 동지가 생긴 듯한 느낌.

은아는 곧바로 반색해 물었다.

“그런가요?”

“그럼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왜 없겠습니까. 실은 저도 하루빨리 조카 손주가 보고 싶었던 참이기도 하고요.”

“그럼, 어떻게…….”

은아의 얼굴이 금세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제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 마침 사돈도 오셨고 하니…… 말 나온 김에 오늘 당장 실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걸, 그녀에게 굳이 물어 무엇 할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순간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그렇게 조카 손주를 향한 의지를 활활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생전 처음 본 그들이 약 반 나절 만에 급속도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었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가엾은 민혁과 예원은 그 두 사람이 짜놓은 큰 그림에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묻잖아.”

“…….”

“지금, 몰라서 이러냐고.”

양손을 결박당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뜬 예원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냈다.

그새 조금 길어진 앞머리에 살짝 가린 그의 강렬한 눈빛이 지독하리만큼 섹시해 보였다.

“민혁…… 씨…….”

알싸한 술 냄새와 뒤섞인 남자 고유의 체취에, 잠잠해져 있던 가슴이 금방 또 콩, 콩 뛰어대기 시작한다.

나른한 듯하지만 강렬한 눈빛, 왠지 모를 열기가 가득 배인 숨결.

평소의 그가 마냥 부드럽고 다정했다면, 지금의 그는 그야말로 ‘어른 남자’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난…….”

그렇게 얼마쯤 그를 올려다보았을까.

그가 마침내 느릿느릿 운을 떼었다.

“난,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어.”

“…….”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미칠 것 같을 만큼.”

겨우겨우 참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닿고 싶은 맘을 누르고 누르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예원이 옆에 누워 제 팔을 감싸는 순간, 그는 퓨즈가 확 나가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름 괜찮은 편이라 자부했던 인내심은 ‘홍예원’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당신은 날 무슨 성인군자쯤으로 생각하고 있나 본데……. 아니야, 그거.”

아마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요즘 얼마나 미친놈 같은지.

“곁에 없으면 보고 싶고, 곁에 있어도 더더욱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을 품에 안는 상상을 하고…… 그러다가 정신 빠졌다고 성환이 형한테 혼이 나기도 일쑤야.”

“…….”

“당신이 이렇게 순수한 눈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에……. 난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로 음흉한 놈이 된다고.”

“…….”

“알아?”

계속되는 그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말에, 예원의 눈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당신 같은 남잘 매일같이 보는데, 욕정이 끓어오르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고요.

억울해진 예원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것이 미처 그에게까지 전달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

“내가…… 당신을 가져도 돼?”

응?

그가 다시 한 번 나직하게 물었다. 허락을 구하기라도 하듯.

예원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기는 한데.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본드처럼 딱 붙어 좀체 떨어지지가 않는 입술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도, 나도 민혁 씨랑 똑같아요.”

“…….”

“그, 그치만…….”

겨우겨우 간신히 내뱉어 보았자 말끝은 흐려지기만 하고.

“……그치만 뭐. 편하게 말해.”

“…….”

“내 눈치 보지 말고.”

손목을 쥔 손아귀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눈빛 또한 살짝 누그러진 그가 부드럽게 채근하자, 예원은 살짝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 조금 무서워요.”

“…….”

“민혁 씨가 무섭다는 게 아니라, 그냥…….”

……모르겠어요, 나도.

왜 이렇게 무섭고 두려운지.

태어나서 누군갈 이 정도로 좋아해보긴 처음이라서.

또,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이런 벅찬 감정을 느껴보긴 처음이라서.

그래서. 아마도 그래서…….

“…….”

예원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말로 꺼내기엔 쑥스러운, 그를 납득시키기에는 조금 모자란 것 같은 이유들이 마음속에서 두서없이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

그렇게 짧은 정적이 흘렀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강렬하게 느껴지는 터에, 당장이라도 얼굴이 다 타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예원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어?’

그에게 꽉 붙잡혀 있던 양 손목이 일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위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장벽 같은 느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민혁 씨……?”

눈을 뜬 그녀는 곧바로 옆을 보았다.

그곳엔 아까 전과 다를 바 없는 자세로 돌아가 있는 그가 있었다.

“……알겠어, 무슨 말인지.”

“…….”

“나도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는 예원 쪽은 보지도 않고, 부러 허공에다 대고 말을 뱉었다.

“당신이 싫다면 안 해. 무섭다고 하면 더더욱 안 할 거고.”

“…….”

“……기다릴게. 기다릴 거야, 당신이 준비될 때까지.”

그건 그녀에게 말한다기보다, 꼭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다만 그는 경고하듯 덧붙였다.

“근데, 방금처럼 괜한 자극은 하지 마.”

“……왜요?”

완고해 보이는 그의 턱 끝이 살짝 떨렸다.

“나도 날 못 믿겠거든. 지금.”

철문처럼 꼭 다물어진 입술이 그가 어떻게든 참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예원은 문득 피식, 웃었다.

그는, 그녀를 상대로 냉랭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타오를 수 있는 대로 타올랐으면 모를까.

‘이렇게까지 애를 쓰고 있는 사람한테…….’

대체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서운하긴 뭐가 서운해. 눈치도 없이, 진짜.

“……사랑해요.”

“…….”

“사랑해요, 민혁 씨.”

순간 생뚱맞은 고백이 튀어나왔다.

흠칫한 그는 퍼뜩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사랑한다고요.”

“…….”

“너무, 너무 많이 사랑해요.”

고작 이런 말로 표현해야 하는 게 아쉬울 만큼,

그리고 민혁 씨는 상상조차 못할 만큼…… 정말 많이.

“혹시 오해라도 할까봐 말해두는 건데……. 일부러 민혁 씰 자극시키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그냥…… 나도 순전히 민혁 씨가 좋으니까. 옆에 있으니까 안고 싶고, 자꾸 신경이 쓰이니까.”

“…….”

“그래서…… 그런 거예요.”

갑작스런 사랑해요 폭탄에, 저렇게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귀엽게 종알대기까지.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찮게 변했다.

하지만 예원은 물러나지 않았다.

“민혁 씨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나도 아는데…… 근데, 그래도 그냥 이렇게만 있으면 안 돼요?”

“…….”

“나…… 오늘은 진짜로 민혁 씨 옆에서 자고 싶은데.”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녀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있던 인내의 끈은 뚝 끊기고 말았다.

“……하아.”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그녀를 품안에 홱 끌어안았다.

“헉, 민혁 씨?!”

순식간에 그의 품에 가둬진 예원이 새된 소리를 냈다.

하얗게 드러난 정수리 위로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아.”

“…….”

“미치겠다, 진짜.”

그가 진심을 담아 나지막이 탄식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예원의 입꼬리는 서서히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이럴 거면서 안기는 대체 왜 안는 건지.

엉겁결에 사이에 끼어버린 팔을 꼼지락꼼지락 빼낸 예원은 그의 등과 허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조금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이렇게 자신을 향해 안달을 내는 것이 싫지 않다.

그만큼 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져서.

차마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게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만 같아서.

“저기. 근데요, 민혁 씨…….”

“…….”

“전에 나한테, 옷 입고는 잘 못 잔다고 하지 않았었어요?”

“…….”

“불편하면…… 벗고 자도 되는데.”

예원이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지만, 그의 대답은 무척 단호했다.

“……안 돼.”

“왜요?”

그녀의 입술과 거의 맞닿아 있는 목울대가 적나라하게 흔들렸다.

“여기서 벗기까지 하면…… 못 참을 것 같아.”

숨 막히도록 치명적인 그 음성에, 예원의 볼은 화끈 달아올랐다.

“……아.”

“그러니까 괜한 소리 말고 이렇게 자. 당장 덮치기 전에.”

“……넵.”

그렇게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은 민혁은 잠자코 예원의 등을 토닥여 주었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예원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소 같지 않은 그가 약간 두렵고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막상 그의 품에 안기고 나니, 그런 감정은 눈 녹듯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오히려 이제는 왠지 모를 용기가 샘솟았다.

이만큼이나 저를 아껴주는 그에게.

머지않아 자신을 기꺼이 허락하고 싶다는, 이상한 용기가.

‘……아! 그래. 그거!’

문득, 이 일로 고민하던 그녀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며 손뼉을 치던 지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교수님이 오시는 바람에 미처 듣지는 못 했지만.

뭐였을까. 그 좋은 생각이란 건.

“…….”

어쨌거나 이 상황에 딴 생각을 하는 것은 사치였다.

예원은 그의 품에 유순히 안긴 채 그대로 잠을 청했다.

대신, 하나만은 다짐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그 ‘좋은 생각’이란 게 무엇인지 지영에게 꼭! 물어보기로 말이다.

* * *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잊지 않고 지영과 통화를 연결한 예원은 영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뭐?”

예원의 입술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껏 벌어졌다.

“야! 넌 ‘좋은 생각’이란 게 겨우 그거냐?”

아나 이 기집애가 정말!

황당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살기가 띠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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