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몰라서 이러는 거야?
2018.12.21.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와중에도, 성환이 운전하는 밴은 늘 그렇듯 민혁의 집 앞으로 매끄럽게 도착했다.
“오늘도 고생했어, 형. 얼른 들어가 봐.”
“그래, 너도 들어가서 쉬어.”
“응.”
차에서 내린 민혁은 습관처럼 대문을 열려 했다.
그런데 그때, 성환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현민혁.”
“어?”
“무슨 고민인지 몰라도, 상담을 할 거면 나 말고 예원 씨한테 해.”
“…….”
“그게 더 명쾌하고 빠를 테니까.”
그러고서 성환은 빙긋 미소를 지었고, 민혁은 잠시 멈칫했다.
그래. 원론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으면 나도 진작에 했겠지.’
지금은 그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그 말뜻이 뭔지 알면서도, 속 모르는 소리 말라는 말이 바로 목젖까지 튀어나왔다.
“……어, 알았어.”
“그래, 내일 보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민혁을 뒤로하고, 성환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대문을 열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면서, 민혁은 집 안의 풍경을 상상했다.
지금 시간쯤이면, 아마도 그녀는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은 먼저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 쉬고 있을지도.
기왕이면 전자가 더 기쁘긴 하겠지만, 후자라면 오히려 맘은 더 편할 수도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일까.
그는 절로 떨려오는 맘을 누르며 번호 키를 눌렀다.
그런데,
“현 서방! 이제 왔어?”
도어 록이 풀리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그를 반긴 인물은, 예원이 아닌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이모님?”
곱게 진 주름, 예원의 것을 빼다 박은 듯한 눈웃음.
그를 향해 웃고 있는 여자는 분명 예원의 이모, 은아가 맞았다.
게다가 그녀는 댁에서 뵙던 것처럼 야무지게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는 채였다.
“이모님이, 어떻게 여기에…….”
생뚱맞은 은아의 등장에 그는 일순 혼란스러워졌다.
뭐지. 오늘 무슨 날인가?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얼른 들어와. 안 그래도 언제 오나 했어.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좀 그렇잖아.”
“손님……이요?”
갑자기 웬 손님 얘기일까.
제 집임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다소 어색한 발걸음으로 거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문제의 ‘손님’이 누군지 곧바로 알아보았다.
“어, 현민혁. 왔냐?”
다소 키가 큰 인영이 방금 전의 은아와 마찬가지로 주방 쪽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군데군데 희끗한 머리와 짙은 눈썹, 반무테 안경.
거기다 저리 넉살좋게 웃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삼촌?”
민혁의 눈이 잔뜩 커졌다.
* * *
“그래도 시간을 딱 맞춰 와서 다행이다, 현 서방. 음식 다 식고 나서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호호.”
“사돈어른도 참.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 먹자니까요.”
“아휴, 그래도요. 이렇게 예쁜 사위 쏙 빼고 어떻게 우리끼리만 먹겠습니까.”
하하하, 호호호. 식탁 위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기막히게 죽이 잘 맞는 윤 교수와 은아가 주거니 받거니 말을 주고받는 사이, 민혁은 옆에 앉은 예원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게?”
하아. 그의 눈치를 본 예원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성의 없이 대답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으니까.
내내 이 곳에 있었던 예원조차도, 여기까지 흐른 전개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예원아. 조금 이따 이모님한테 전화 넣어봐라.’
‘네? 이모는 왜요……?’
‘왜긴. 상견례도 못 했는데, 늦게라도 얼굴은 뵈어야 할 것 아니냐.’
아까 전, 윤 교수의 거듭되는 요청에 못 이긴 예원은 결국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이모는 웬만해선 거절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예상대로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날렸고.
그리하여 만나게 된 양가의 두 어른은 잠시 예원을 제외한 채 독대의 시간을 가졌더랬다.
그런데 그때 대체 뭔 얘기를 한 건지, 두 어른은 언제 처음 본 사이었냐는 양 급속도로 친해졌고,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이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모든 게 처음부터 예정돼 있던 것처럼 착착 진행된 후였다.
“늬들은 뭘 그렇게 둘이서 노닥대? 그러지 말고 우리도 좀 알자.”
“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으유, 얘들이 이렇게 극성이라니까요. 늙은이들만 왕따 시키고.”
왕따는 무슨. 이모는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으면서.
예원이 소리 없이 삐죽거렸다.
그때, 민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삼촌은…… 대체 언제 오셨어요? 왜 저한테 연락도 안 하시고…….”
“어어, 오늘 아침에. 연락이야 너 바쁠까 봐 못 했지. 오늘도 내내 촬영이었다면서.”
“아…… 네.”
“너 아니어도 오늘 예원이랑 잘 쏘다녔으니까 걱정 마라. ……참, 매출 자알 봤다?”
‘매출’이란 소리에, 민혁의 눈도 아까 전의 예원처럼 띠용 커졌다.
“매, 매출이요?”
“그래. 뭐 초짜들이 맡아서 한 것치고는 썩 나쁘지 않더라마는. 그래도 노력 좀 해야겠어, 현 사장. 어?”
……하아. 그새 카페까지 다녀오셨을 줄이야.
민혁은 마치 숙제 검사 받는 아이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념하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요즘 촬영이다 뭐다 해서 카페 운영에 살짝 해이해져 있던 차였는데, 비로소 정신이 확 드는 순간이었다.
“아유, 그러지 말고 다들 일단 수저부터 들어요. 얘기하다가 다 식겠네 그냥.”
“아, 예. 너희들도 얼른 들어라.”
“……네.”
“잘 먹겠습니다.”
은아와 윤 교수의 성화에, 민혁과 예원은 마지못한 듯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우선 식탁 위를 스캔한 민혁의 눈썹이 살짝 팔자를 그렸다.
“근데…… 뭐 이런 걸 다 하셨어요?”
“뭐. 이게 왜.”
“아니…… 메뉴 구성이 약간, 특이해서요.”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은아와 윤 교수의 주도로 차려졌다는 이 밥상은 그야말로 양식과 일식, 한식이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갈비찜, 잡채 등 손님용 상차림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메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 중 일단 제일 이질적인 건 단연 ‘카프레제’였다.
토마토 사이사이에 모차렐라 치즈를 끼워놓은 형태의 그것은 에피타이저 치고는 양이 무시무시하게 많았다.
특히 토마토의 양이.
또 그 옆으로는 장어구이가 있었는데, 한 가지가 아니라 무려 간장과 양념 두 가지였다.
게다가 거기엔 삼겹살에나 어울릴 법한 구운 마늘이 대량 곁들여져 있고.
무엇보다 화룡점정은, 각자의 옆에 놓인 주스였다.
보랏빛 액체인 것으로 보아 끽해야 포도주스인 줄 알았건만, 그것은…….
“……이건 뭐예요?”
“아, 그거.”
남자가 먹으면 소변 줄기로 요강을 엎을 수도 있다는.
“복분자 주스. 어때, 맛있지?”
“…….”
……바로 그 전설의 명약이 아닌가.
주스 잔을 손에 든 민혁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밥상에 담긴 노골적인 의도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삼촌.”
“응?”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내가 뭘?”
민혁의 물음에, 윤 교수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열 몇 시간 비행기 타고 이제 기력 보충 좀 하려는데 왜. 뭐가 잘못됐냐?”
“…….”
“가뜩이나 오늘 사돈어른도 처음으로 뵙는데, 반찬이 이 정돈 되어야지. 귀한 거 가져다 줬으면 고마운 줄이나 알고 드시오, 조카님.”
“…….”
얼핏 들으면 꽤나 그럴 듯한 핑계가 아닐 수 없다.
민혁은 차마 대꾸할 말을 잃었다.
물론 평소였다면 그저 하해와 같은 은혜에 넙죽 감사하며 먹었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어차피 그녀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 그의 정력을 부추겨서 좋을 게 무어란 말인가.
어째, 점점 생각지도 못한 구렁텅이에 빠져 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참. 근데, 아까 보니까 집에 무슨 침대가 세 개씩이나 되던데. 뭐 하러 침대가 그렇게나 많아?”
“응?”
다음으로, 이번엔 은아의 일격이었다.
민혁과 달리 군말 없이 젓가락만 놀리고 있던 예원은 이모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어~ 그, 그게…….”
“…….”
“소, 손님용이야, 손님용! 민혁 씨가 워낙 이래저래 지인들이 많다 보니까…… 혹시나 해서 갖다 놓은 거지. 하하하.”
“아아, 그래?”
그때, 이제 좀 가만있나 싶던 윤 교수가 한 마디를 슬그머니 보탰다.
“거 잘됐네, 그렇잖아도 오늘 다 같이 술이나 한 잔 하려고 했더니. 어차피 댁에 가셔도 혼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건데, 사돈어른도 오늘은 편히 노시다가 아예 주무시고 가시지요.”
“……네??”
아니. 이건 또 웬 말?
민혁과 예원의 눈은 동시에 땡그래졌다.
“어머, 그럴까요? 호호, 그럼 나야 좋지 뭐.”
“…….”
“현 서방. 실례가 안 된다면, 나도 여기서 자고 가도 되나……?”
은근하게 묻는 투였지만, 그것은 곧 통보와도 다를 게 없었다.
“……아, 예. 얼마든지요.”
저렇게까지 물어보시는데 어찌 거절을 한단 말인가.
나 같은 나약한 조카사위 따위가.
“호호호! 내가 조카사위 집에서도 다 자 보고, 오늘 소원 다 풀겠네.”
“자, 여기 복분자주도 있으니까 한 잔 하자고. 여기 한 잔 받으시지요, 사돈어른.”
“좋지요.”
두 어른 사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 후로도 점점 가실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민혁과 예원은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 * *
쏴아아-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이어 드라이어가 위잉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민혁에 앞서 먼저 씻은 뒤, 두 어른의 잠자리를 각자 봐주고 온 예원은 침대 맡에 앉아 욕실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아이 씨…… 이모만 아니었어도.’
아까 전, 자고 가겠다는 이모를 말리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가 되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그와 한 방을 쓸 일도 결코 없었을 텐데.
하지만 예원은 이내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안에 윤 교수가 있는 이상, 그들이 대놓고 각방을 쓸 수는 없었을 테니까.
이모가 자고 가나, 안 자고 가나.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었다.
‘아오…… 이제 어쩌지.’
그와 한 방을 쓴다는 게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
언젠가는 당연히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둘 중 어느 쪽도 딱히 합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기에 원래의 각방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온 그들이었다.
며칠 전 그 일이 있은 후로는 그것이 더더욱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지금 이 느낌이라면, 어쩌면 오늘밤은 꼴딱 새워야 할지도 몰랐다.
─달칵.
그때, 별안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침대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웅크린 예원은 습관적으로 눈을 감았다.
보나마나 태초의 헐벗은 모습으로 나올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는 그 잠깐 사이에 본 그의 몸은 웬일인지 평소 보던 구릿빛이 섞인 연주황 색깔이 아니었다.
“민혁 씨……?”
“왜.”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최대 상의탈의, 최소 샤워가운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옷차림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단정했다.
편안하고 무난해 보이는 검정 맨투맨에, 헐렁한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
“그러고…… 자려고요?”
“응. 왜?”
“아니…… 아니에요.”
……웬일이지, 저 남자가.
예상과 다른 그의 모습에 예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영 불편해서, 옷 입고는 못 잔다고 하지 않았었나.’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그는 옷장에서 이불을 척척 꺼내고 있었다.
“민혁 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흠칫한 예원이 묻자 그에게선 곧 무덤덤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뭐하긴. 이불 펴잖아.”
“…….”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당신은 침대에서 자.”
“네?”
아니, 잠깐만.
이 남자가 다짜고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당황한 예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치만…….”
“내가 바닥에서 자고 싶어서 그래. 저쪽 방에서 잘 때도 자주 그랬어.”
“…….”
“맘 바뀌기 전에 얼른 누워.”
“…….”
“빨리.”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취기와 함께 약간의 강압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쉽게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불 끌게.”
눈 깜짝할 새 바닥에 이부자리를 깐 그는 일사천리로 불까지 끄고 자리에 누웠다.
한 치의 틈도 없는 그 행동에, 예원도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
“…….”
어느새 고요해진 방안에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한 적막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기 어려운 상황.
사방으로 깔린 어둠 속에서 예원은 특유의 큰 눈망울을 요리조리 굴렸다.
언젠가 혹자에게서, 베개에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도 그렇게 바로 잠이 오면 얼마나 좋으련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런 축복받은 타입이 아니었고,
침대에 누우니 오히려 아까 전보다 더 잠이 달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혁 씨.”
그 상태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예원이 먼저 불쑥 입을 열었다.
“민혁 씨, 자요?”
“……아니.”
그새 약간 잠긴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저 남자도 아직 안 자는구나.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옛날 생각나지 않아요?”
“…….”
“크리스마스 때, 우리 집에서…… 이렇게 똑같이 잤었잖아요.”
예원이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덕분에 그도 옛 기억을 떠올린 모양인지, 잠시 뒤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게.”
“그땐…… 민혁 씨랑 내가 이렇게 될 줄 전혀 상상도 못 했는데.”
“…….”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한치 앞도 몰랐던 그때를 떠올리니 괜히 실없는 웃음이 난다.
그리고 괜히, 그에 대한 애정도 새삼 용솟음쳤다.
“민혁 씨.”
“…….”
“바닥…… 안 불편해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딱딱할 텐데. 등도 배기고…….”
“…….”
“그러지 말고…… 이리로 올라와요.”
“…….”
“둘이 자도, 충분한데 여기…….”
그녀가 속삭임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에게선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얼른 자. 내일 아침에 피곤하다고 하지 말고.”
잠시 뒤, 아주 뒤늦게야 들려온 대답.
이제 그는 아무래도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로 한 것 같았다.
예원은 힐끗 바닥 쪽을 내려다보고는 입술을 내밀었다.
문득,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저 남자와 잠을 자나 했는데, 막상 그가 철벽을 치고 들어오니 이상한 청개구리 심보가 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런 일이 있었기로서니, 저렇게까지 냉랭해질 필요가 있나.
그래도 엄연히 부분데…… 등 정도는 맞대고 잘 수 있는 거지.
그를 다 이해하고 있다 생각하면서도, 갑작스레 이상한 오기 같은 것이 생기고 있었다.
“……홍예원.”
“…….”
“……뭐, 뭐하는 거야.”
……그래서였다.
“뭐하긴요. 민혁 씨랑 같이 자려고 하는 거지.”
용기를 낸 그녀가 침대 밑으로 스르륵 내려가, 그의 옆에 충동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민혁 씨가 밑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잠이 통 안 와서 그래요. 맘이 불편해서…….”
“…….”
“이러고 손만 잡고 잘게요. 이것도…… 안 돼요?”
정자로 누워 있는 그의 팔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
제 옆에 바짝 붙어 모로 누워있는 예원을 힐끗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한숨을 터뜨렸다.
“……하아, 예원아.”
“…….”
“지금, 몰라서 이러는 거야?”
“……네?”
어쩐지 살짝 화가 난 듯한 목소리.
예원은 저도 모르게 살짝 쫄아 어깨를 움츠렸다.
반발심에 괜한 일을 벌인 건가, 하는 후회가 일순 밀려들었다.
“아니, 난 그냥…… 이왕이면 민혁 씨랑 같이 자고 싶어ㅅ……!”
─탁!
그러던 그때.
별안간 정자세로 눕혀진 예원의 눈이 잔뜩 팽창했다.
“……묻잖아.”
“…….”
“지금, 몰라서 이러냐고.”
자유롭던 그녀의 양 손목은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머리 위로 결박돼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눈빛이 코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섬광처럼 번쩍 빛났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