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이상하게 눈에 밟혀
2018.12.04.
다음날.
지원에게는,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D-day가 밝아 있었다.
‘흐음.’
이 정도면 됐겠지.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점검한 지원은 이내 커다란 기타 가방을 등에 자랑스럽게 둘러멨다.
이모도, 누나도 없는 텅 빈 집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한적했다.
아침 일찍 꽃집에 나가야 했던 이모와는 일찍이 어젯밤에 미리 인사를 나눈 뒤였다.
‘잘하고 와. 응? 너희 엄마아빠가 다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왕 하는 거 최대한으로 잘하고 와. 알았지?’
그렇게 거듭 당부하던 이모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생생하게 울렸다.
맨 처음 ‘가수’라는 꿈에 쌍수를 들고 반대했던 누나 예원과 달리, 이모 은아는 다행히도 그의 결정을 순순히 존중하고 따라주었다.
하기야, 이모의 반응은 애초부터 예상된 일이었으니까.
너희들이 이만큼 잘 커주었으니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며, 앞으로는 니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누누이 말해주었던 사람이 바로 이모였으므로.
어쨌든 잠깐잠깐 학교 행사 등으로 집을 비운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아예 장기 외박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떠나고 나면 아마 당분간은 절대 이 곳 구경을 하지 못 하게 되리라.
아니, 제가 꼭 그렇게 만들어야만 했다.
‘제발, 최대한 나중에 보자.’
이만큼 일을 크게 벌여놓았으니, 창피하게 며칠 만에 귀환하는 일은 없어야지.
아쉬움 반, 초조함 반으로 마당에 나온 지원은 그곳을 괜스레 잠시 서성이다 곧 대문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오오, 홍지원~? 너답지 않게 일찍 가네?”
“……누나?”
전혀 생각지 못한 두 사람이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한 쪽은 그의 누나 홍예원이었고,
다른 한 쪽은…….
“누나가 웬일이야, 여기까지?”
“웬일은? 이 누나님께서 하나뿐인 동생을 친히 배웅해주려고 왔지. 왜. 뭐, 꼽냐?”
“……참나.”
예원 특유의 너스레에, 지원은 살짝 긴장을 풀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시선은 금방 누나의 옆쪽으로 향했다.
“……누나도, 왔네요?”
“어?”
그 말에, 옆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지영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어어. 안녕.”
“내가 불렀어. 그래도 나름 응원 겸 배웅한답시고 오는 건데, 혼자는 좀 허전하잖아. 잘했지?”
“……어, 잘했네.”
그러게. 누나가 최근에 한 짓 중에 최고로 잘한 짓이다.
샘솟는 기쁨을 숨길 수 없는 나머지, 지원의 입꼬리는 금세 위로 향했다.
안 그래도 가기 전에 한 번은 더 보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평소엔 좀 투덕거리고 으르렁거려도, 이럴 때는 참 고맙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는 누나.
게다가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렇게 특별히 ‘응원’씩이나 와 주고.
“준비는 제대로 잘한 거야? 빠뜨린 거 없어?”
“당연하지. 다 확인했어.”
“흐음…… 그래. 어쨌거나, 기껏 응원했는데 금방 똑 떨어져서 오면 무지막지하게 쪽팔린 거 알지? 누난, 부디 네가 우리 홍씨 가문에 누를 끼치진 말았으면 한다, 동생아? 응?”
근데 이게 응원이 맞기는 맞나?
웃음기를 띠고 있던 지원의 표정은 금세 살짝 일그러졌다.
“쓸데없는 걱정은. 알았어.”
“하하. 암튼, 자. 선물.”
“……이게 뭔데?”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웬 작은 파우치 하나가 그에게 내밀어졌다.
고개를 갸웃거린 지원은 얼른 그 안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뭐야, 카포(기타를 연주할 때 음의 높낮이를 조절해주는 기구)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타의 음을 조율할 수 있는 튜너와, 꽤나 값나가 보이는 재질의 기타피크(손가락 대신에 기타 줄을 튕길 수 있는 작은 조각), 여분의 기타 줄 등까지.
파우치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죄다 기타를 온종일 품에 끼고 사는 그를 정확히 겨냥한 맞춤형 선물들이었다.
“합격 기념으로 뭘 주고 싶긴 한데, 대체 뭘 줘야 하나 고민되더라고. 뭐 너 정도면 이미 다 가지고 있는 것들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쓸모 있을 것 같은 걸로 샀어. 특히 카포 같은 건 많이 쓸 거 아냐. 여자애랑 듀엣 하는데.”
“……그건 그렇지.”
“이거, 안 그래보여도 다 엄청 고급이다? 잘못하다 잃어버리기만 해. 선물이고 뭐고 다시는 국물도 없을 테니까.”
예원이 파우치 안을 빼꼼 들여다보며 무척이나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치, 이런 누나를 둔 네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알라는 것처럼.
‘원래부터 안 사줬으면서 생색은…….’
하지만 세심한 배려가 담긴 선물에 약간 감동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못마땅한 마음을 누른 지원은 누나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누나. 생각도 못했는데.”
“고마우면 잘하고 오기나 해. 일단 본선진출만 목표로 달려. 알았지?”
“알았어, 걱정 마.”
좀 우습긴 하지만 어느샌가 불안감과 초조함은 한결 가셔 있었다.
한바탕 반대를 하던 것은 언제고, 이제는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 된 제 누나를 향해 부러 다짐하듯 대답한 지원은 슬쩍 옆을 보았다.
“저, 지영 누나.”
“응? 왜?”
“가기 전에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나, 나랑……?”
뜻하지 않은 지목을 받게 된 지영이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쟤가 또 뭔 얘길 하려고 저러지?
‘아으, 이럴 줄 알았어.’
실은 이런 곤란한 상황을 대비해 부득불 나오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배웅은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던 예원의 말이 왠지 모르게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막상 보면 이렇게 불편해질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도 참, 정말…….
“왜, 뭔데. 네가 얘랑 뭔 얘기를 해?”
어쨌든 역시나, 옆에 선 예원은 어리둥절해진 얼굴이었다.
“누난 잠깐 좀 있어봐.”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누나를 뒤로 한 지원은 지영에게 눈짓한 뒤 조용히 걸음을 옮겼고, 지영도 별 저항 없이 멈칫멈칫 그 뒤를 따랐다.
“……늦겠다. 얼른 해, 할 말 있으면.”
“……누나.”
“응.”
작은 소리는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예원에게서 떨어졌을 무렵.
지원은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때 내가 누나한테 했던 말, 아직 안 잊었죠?”
“……어?”
그 말을 들은 지영은 순간, 이상하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얘가 뭐라고 했었지?
“사실 이 말, 며칠 전에 만났을 때 하고 싶었는데……. 그땐 상황이 상황이라 미처 말 못 했어요.”
“…….”
“나, 혹시나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침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살짝 흔들렸다.
그런 그를 보는 지영의 눈동자도 미세하게 같이 흔들렸다.
“그때, 누나한테 정식으로 다시 고백할 거예요. ……아니, 우승 못 해도 할 거고, 꼴랑 일주일 만에 떨어진대도 할 거예요. 그러니까…….”
“…….”
“그땐, 내 고백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줘요.”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그새 살짝 잊혀 있었던 그의 지난 고백.
‘나,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누나가 꼭 지켜봐줬으면 좋겠어요.’
‘누나 보라고 하는 거니까. 다.’
어린애의 한때 치기일 뿐이라고, 그렇게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엔 그 마음이 척 봐도 너무나 절절하고 진중하기 짝이 없었다.
지영은 졸지에 할 말을 잃은 채 지원을 바라보았다.
비록 정식 고백은 나중에 한다지만, 이 또한 지난번처럼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 아닌가.
“지원아…….”
뭐라고 말을 해주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헛된 기대 말라고 딱 잘라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중요한 일을 앞둔 상황임을 고려해 저번처럼 또 유야무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야 할지…….
“……누나.”
한데 그런 그녀의 심경을 눈치 챘는지, 지원은 금세 분위기를 바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근데…… 이왕 여기까지 와 준 김에, 찐하게 응원 한 번 해주면 안 돼요?”
“……뭐?”
가만, 찐하게……라는 건…….
‘설마, 뽀뽀 같은 거 말하는 건가?’
어머. 얘가 지금 무슨 소릴?
“야! 너 무슨……!”
순간적으로 지영은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만 자식이 제게 입술 도장을 콱! 찍어버리는 고약한 상상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작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입술이 아니라, 두툼한 팔의 온기였다.
“……야!”
별안간 겹쳐진 두 팔이 등허리를 에워싸고, 무거운 목소리가 귓전을 댕 울렸다.
“와줘서 고마워요 누나. 나, 진짜 잘하고 올게요.”
“…….”
생각지 못한 깜짝 포옹.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되는 주제에, 품은 웬만한 성인남자만큼이나 너른 듯했다.
졸지에 그의 널따란 어깨에 고개를 걸치게 된 지영은 그대로 정지한 채 눈만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놀란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너네 지금 뭐하냐? 낯 뜨겁게.”
물론, 그 꼴을 아무것도 모르는 홍예원이 가만 두고 볼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채, 마지막으로 지영을 있는 힘껏 꽉 껴안은 지원은 다행히 그녀를 금방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응원 받은 거야, 응원. 그쵸, 누나?”
“……어, 어. 그래.”
……응원 좋아하시네.
그놈의 응원 두 번 해줬다가는, 뼈다귀고 뭐고 다 으스러지겠다.
“뭐래 이 자식이? 야, 암튼 빨리 가. 이러다 도로 늦겠다.”
“알았어. 누나랑 지영 누나도 얼른 가.”
“어, 그래야지.”
“야, 홍지원!”
그러던 그때, 별안간 세 사람의 시선이 뒤쪽으로 한데 쏠렸다.
“……고민영?”
저 멀리서, 길쭉하고 시원시원한 실루엣 하나가 그들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야, 네가 왜 여기까지 왔어?”
“쳇, 어차피 갈 거 너랑 같이 가려고 왔지.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기껏 왔더니 이놈은 반응이 왜 이 모양이야.
맘에 안 드는 듯 입술을 삐죽이던 민영은 예원을 발견하더니 금방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저 기억하시죠? 지난번에 인사드렸던 고민영이라고 합니다.”
“아……. 응, 잘 지냈어?”
“헤헤, 그럼요.”
그러다 멈칫, 지영에게로도 향하는 시선.
“언니도……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예원에게 건넨 인사와 달리, 지영에게 건네진 인사는 어딘지 모르게 살짝 어정쩡한 감이 있었다.
지원에겐 몰라도 다른 쪽으로는 눈치가 기막히게 빠른 지영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수 없었다.
‘뭐지?’
어쩐지, 내가 그다지 안 반갑단 눈초린데.
쟤가 왜 날……?
“야, 빨리 가자. 내가 너 이렇게 뭉그적거리고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온 거 아냐.”
“참나, 내가 뭘 어쨌다고……. 누나,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대회 끝나고 다음에 또 뵐게요 언니.”
“으응. 조심히들 가. 가면 연락하고.”
“히히, 네. 야, 같이 가!”
다시 한 번 명랑하게 인사한 민영은 앞서가는 지원의 곁을 종종걸음으로 좇아갔다.
영락없는 풋풋한 고교생 커플 같은 모습.
제자리에 남은 예원과 지영은 빠르게 멀어져가는 둘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야. 근데 쟤가 뭐래? 뭐 중요한 얘기하는 것 같던데.”
“……아,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냥, 와줘서 고맙다고…….”
“참내. 그걸 뭐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해? 갑자기 안기는 또 왜 안고. 깜짝 놀랐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너만 놀랐겠냐? 아마 내가 제일 놀랐을걸.
지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 가늘어진 눈으로 그들을 관망하고 있던 예원이 불쑥 말했다.
“근데 그건 그렇고……. 쟤네, 둘이 은근 잘 어울리지 않아?”
“……어?”
“그렇잖아. 둘이 키 차이도 적당하고, 얼굴도 비슷하게 잘생기고 예쁘고. 뭣보다 둘이 저렇게 내내 붙어 다니는데. 쟤네 저러다 틀림없이 정분나지, 암.”
“……정분?”
“뭐, 여자친구냐니까 기어코 아니라고 하긴 하던데……. 누가 알아? 저러다 또 둘이 좋아 죽을지. 어쨌든 여자애 성격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싹싹하고 귀여워 보여.”
“……응.”
“아무튼 쟤네 잘해야 될 텐데. 괜찮겠지?”
“그럼, 잘……하겠지.”
“하긴 뭐…… 못 해도 어쩌겠냐.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인데. 아으!”
대수롭지 않게 금방 시선을 거둔 예원은 찌뿌둥한 몸으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출근하기 싫냐. 에휴,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어, 그래…….”
하지만 두 남녀의 인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도, 지영의 시선은 잠시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럴 순 없는데. 결코 이래선 안 되는데.
‘왜 이러지?’
이상하게도, 그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눈동자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 * *
“진짜요? 가윤 매니저님이?”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카페 에덴.
밀린 설거지 중이던 채린이 뒤를 돌아 예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니까. 직접 와서 전해주고 갔대. 일해주시는 이모님이 대신 받아주셨어.”
지영과 헤어지고 느지막이 출근을 한 예원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건의 발단은 오늘 아침, 지원을 보러 본가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예원 양, 잠시만.’
‘네?’
지나가던 예원을 불러 세운 아주머니가 웬 고급스럽게 포장된 박스를 건네며 말했다.
‘내가 이걸 바로 전해준다는 걸 깜빡해가지고. 자, 이거.’
‘이게 뭐예요?’
‘그저께인가, 웬 매니저라고 한 명 와서 주고 갔어. 이름이…… 가, 가 뭐시기랬던가.’
‘가, 요?’
매니저, 그리고 ‘가’라는 이름의 한 글자로 유추할 수 있는 그녀의 주변인물은 딱 한 명뿐이었다.
‘……아, 가윤 씨요?’
‘아, 그래. 그 아가씨가 이거 주고 갔어.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전해 달랬는데 내가 그날 청소하느라고 깜빡했지 뭐야.’
‘그래요?’
출근하는 날도 아닌 사람이, 손수 집까지 찾아와 이런 깜짝 선물을 해줄 줄이야.
전혀 생각도 못 한 사람, 일이었기에 그 반향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이건 꼭 자랑해야 해!’
방심하고 있다 폭풍 감동을 한 예원은 기필코 이 미담을 동네방네 소문내리라 다짐했다.
해서, 그 첫 상대인 채린에게 한참 그 이야기를 늘어놓던 중이었다.
“……웬일이시죠, 가윤 매니저님이.”
“글쎄, 나도 모르겠지만……. 출근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니까 신경 쓰이셨나 보지. 아무튼, 나 진짜 놀랐어 오늘.”
신이 난 예원이 열심히 제 소감을 피력했다.
“나 솔직히, 가끔은 가윤 매니저님이 좀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거든. 근데 이번에 진짜 다시 봤어. 내 생각보다 더 착하고 좋은 분이신 것 같아.”
“…….”
“안 그래?”
한껏 업된 예원이 재잘거렸지만, 정작 채린은 어쩐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
어라. 애 반응이 왜 이렇지.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의아함을 느낀 예원이 당장 물었다.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같이 좀 일해 보니까 생각했던 거랑은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요.”
“……어떤 게?”
잠시 뜸을 들이던 채린은 이내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점장님 계실 때는 뭐든 열심히 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랑 있을 때는 폰도 자주 보시고 설거지도 거의 안 하시고…… 2층 라운딩도 거의 안 도세요. 물론, 다 알바인 저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좀…….”
“…….”
“손님 응대하시는 것도 생각보다 까칠하실 때가 좀 있고요……. 아무튼, 점장님 계실 때랑은 좀 달라요. 제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다소 장황한 설명이긴 하나, 종합해 보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
‘그러니까, 사람을 가려가며 행동한다는 건가?’
아랫사람한텐 막 대하고 윗사람에게는 아부하는, 소위 ‘강약약강’이다 이건데.
예원으로선 완전히 처음 안 사실이었다.
“혹시…… 예빈이나 연석이나, 다른 애들도 그런 말을 했었니?”
“……글쎄요. 걔들도 저랑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걔들이랑 겹치는 시간엔 보통 점장님도 계시고 매니저님도 계셨어서. 따로 얘기는 못 나눠봤어요.”
흐음. 예원의 표정은 돌연 심각해졌다.
채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건 꽤 심각한 문제였다.
일선에서 솔선수범해야 할 매니저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니.
계속해서 그런 식이면, 애써 쌓아놓은 카페의 기강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터였다.
“야, 넌 그 얘길 왜 이제 해! 이상한 게 느껴지면 재깍 말했어야지.”
예원의 약한 타박에, 채린은 억울한 듯 항변했다.
“그게, 괜히 죄 없는 분 험담하는 것 같아서요. 그냥 제 느낌일 수도 있는데, 괜히 저 혼자서 오버하는 걸까봐.”
아. 듣고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기야, 얘한테 무슨 죄가 있을까.
그런 세세한 내막도 모르고, 나한테 잘해줬다고 무작정 좋게만 본 내가 제일 문제지.
“……아무튼 알았어. 앞으론 나도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원래부터가 그런 사람인 건지, 아니면 너무 풀어져서 그런 건지.
뜻밖의 소식을 마주한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입안이 왠지 모르게 껄끄러웠다.
“점장님. 전화 왔어요.”
“어? 어어.”
그렇게 잠시, 가윤에 대한 생각으로 얼마쯤 골똘해져 있었을까.
예원은 충전하느라 카운터에 놓아두었던 폰을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무작정 들었다.
“여보세요?”
[응, 여보.]
그런데 그 한 마디에, 외출 나갔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네?”
[여보냐며? 대답했잖아.]
약 24시간 만에 듣는 것 같은 목소리.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그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달콤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