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네, 좋아해요
2018.10.23.
“그러니까, 제수씨가 너한테 삐친 것 같다고?”
“그렇다니까.”
아무리 미우니 고우니 해도, 고민이 있을 때는 정재하를 찾는 것이 제일이다.
그것이 민혁의 오랜 신념이었다.
“참나.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이 도출된 건데?”
해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재하가 컴퓨터를 만지며 건성으로 대꾸하자, 멀찍이 앉아있던 민혁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잘만 웃어주는데, 나한테는 이상하게 쌀쌀맞아. 말도 안 걸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도 않고.”
“네가 워낙 노잼이라 그런가 보지.”
빠직. 그의 이마에 빗금이 섰다.
“내가 무슨 소리만 하면 빵빵 웃던 여잔데 무슨. 요 며칠 갑자기 그런다니까.”
“그럼 또 뭐. 뭐가 문젠데.”
잠시 생각하던 그가 생각 많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나만 보면 시무룩해져. 꼭 무슨 고민 있는 사람처럼.”
“지원이 때문에 걱정돼서 그러는 거 아니야?”
“오디션 합격하고 한창 잘 나갈 일만 예약된 애가 뭐가 걱정스러워. 아니야, 지원이 문제는.”
“흐음.”
그제야 재하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
“좀 이상하긴 하네. 너 제수씨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나도 그게 제일 의심되긴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어. 그게 문제야.”
“그럴 리가 있나. 제수씨 같은 사람이 그냥 그럴 린 없잖아. 뭐라도 이유가 있겠지. 아니면, 네가 괜히 착각하는 걸 수도 있고.”
“……당해보면 아마 그런 말 못할 거다.”
이유도 모르고 찬바람 맞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저께 에덴에서 그녀를 본 뒤, 그의 의심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저에게는 냉기가 뚝뚝 흐르던 그녀가, 그 연석인가 뭔가 하는 알바생 앞에서는 얼마나 살갑고 다정해지던지.
분명,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그게 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어쨌거나, 백날 나한테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 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봐, 차라리.”
“……나도 그러고 싶지.”
“근데? 왜 못하는데.”
“…….”
왜? 왜냐고?
사실, 그 스스로도 그게 의문이었다.
그냥 가서 띡 하고 물어보면 되는 것을, 그거 하날 못 해서 이렇게 빌빌대고 있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만 서면 자꾸 용기가 없어졌다.
그 가라앉은 얼굴이 덫처럼 턱, 턱 걸렸다.
그래서 자꾸만 딴 소릴 하게 되고 중요한 얘기는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 알 수 없는 기류가 시작된 시점은 그녀와 세 번째 키스를 나누었던 그 즈음이었다.
아니, 그 전부터 좀 이상하긴 했는데. 갈수록 증상이 더 심각해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 키스가 문제였던 걸까?
하지만, 그때 그녀는 분명 그의 키스를 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엔 그녀가 먼저 그의 볼에 입맞춤까지 하지 않았던가.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요즘은 그냥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이런 복잡한 고민 따윈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짧은 볼 뽀뽀 뒤,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애달픈 얼굴이 아직까지도 선했다.
그 입맞춤의 의미는 뭐였을까.
날 볼 때마다 그 여잔,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쯧쯧쯧. 하여튼 네가 이런 걸로 고민하는 걸 다 보고. 진짜 내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너, 내가 전에 말했던 거 혹시 기억하냐?”
“뭐?”
한 템포 쉰 재하가 가볍게 덧붙였다.
“남녀 사이에 자존심은 독이라는 말.”
“…….”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해줄 충고는 그것밖에 없어. 원래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소통의 부재로부터 오는 거야. 부부 사이에서도 당연히 그렇고. 겨우 그런 거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네가 뭔 가장이냐. 정신 차려, 인마.”
이럴 땐 확실히, 그보다 정신연령이 몇 살은 높아 보이는 재하였다.
민혁은 내심 공감하고 수긍하면서도, 외려 고까운 투로 대꾸했다.
“몸소 경험해봤다는 듯한 말투다?”
“내가 그럼, 너 같은 연애 하수랑 같겠냐.”
“……어쭈? 이게.”
내가 고작 연애 하나 때문에 이 자식으로부터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나.
그는 일순 자괴감이 들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제수씨한테나 가 봐. 가서 오늘 저녁엔 데이트 하자고 해.”
“……알았어.”
“전에 먹인 거 또 먹이지 말고. 인터넷 검색해서, 분위기 좋은 데 좀 찾아 봐.”
“알았다. 땡큐, 또 연락할게.”
그나마 해답을 얻은 듯, 훨씬 나아진 얼굴로 떠나는 친구를 보며 재하는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자식은, 저래가지고 대체 결혼을 어떻게 한 거야?”
참나.
픽 웃은 재하가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 * *
“놀랐지, 내가 불쑥 연락해서.”
“……아냐, 괜찮아. 어차피 나도 조만간 연락할 생각이었어.”
거의 모든 손님이 떠난, 한적한 저녁 시간의 에덴 2층.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서, 예원은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상대와 마주하고 있었다.
“실은, 너한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응, 말해.”
다름 아닌 그녀의 첫사랑이자, 죽일 자식.
전민혁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며칠 전에, 아주머니께서 여기로 찾아오셨어. 제발 널…… 한 번만 다시 만나달라시면서.”
담담히 털어놓은 그녀의 말에, 전민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게…… 정말이야?”
“……응, 바로 저기서.”
예원의 손이 건너편 쪽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 눈길을 두자마자, 녹화된 비디오가 재생되는 것처럼 그때의 상황이 자동적으로 눈에 선연해졌다.
‘미안하다, 예원아. 그땐 내가 정말 미안했어. 그런데…… 우리 민혁이, 너 아니면 절대로 안 될 거 같다. 너밖에 없어……. 제발, 응? 내가 이렇게 빌게. 정말 안 되겠니……? 어?’
지난 일들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며, 여자는 예원을 향해 꺼이꺼이 울면서 뒤늦은 사과들을 토해내었다.
그런 여자를 보며 예원은 할 말을 잃었다. 왠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으니까.
예원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은 이 근방에 오래 전부터 공공연히 퍼져있었다. 여자도 분명 그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여자는 굳이 예원을 찾아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홍예원이 아니면 안 되는 일. 홍예원이 아닌 다른 여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일.
뭐, 당연히 그것 때문이었겠지.
일견 무척 딱해 보이는 모습이긴 했지만, 단언컨대 여자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으로, 어쩌면 제 며느리이자 ‘호구’가 될지도 몰랐을 여자애에게, 알량한 동정심으로 호소하고 싶었던 거면 몰라도.
그 전에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결코 그런 식의 사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또한, 예원은 결코 바란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알았어. 이제 아주머니도…… 다 알게 되셨구나.”
“…….”
“네가 말한 거야? 아님, 나한테처럼 또 들킨 거니?”
목적어가 빠져 있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그가 품고 있는 비밀. 그것을 그의 부모님도 알게 되신 거냐는 뜻이었다.
“……내가 말한 거야. 얼마 전에.”
역시 그랬구나.
전민혁에게서 예상한 대답이 흘러나오자, 예원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하는 건가. 판가름이 쉽게 서질 않았다.
솔직히 내가 이러고 있을 입장은 아닌데.
어느샌가, 그와 이리 아무렇지 않게 마주 보게 된 자신이 예원은 새삼 우스워졌다.
어린 시절, 저 놈 앞에서 쿨하고 멋진 여자가 될 수 있기를 얼마나 꿈꾸고 바랐었던가.
그런데, 고작 이딴 식으로 쿨한 여자가 되어버리다니.
“……좀 늦었네. 나랑 헤어진 지가 언젠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미안하다.”
“뭐, 이제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지.”
“…….”
“아무튼, 그것 때문에 만나자고 했어. 다시는…… 그런 일 없었으면 좋겠어서.”
혹시나 경고해두지 않으면 또 불시에 그 여자가 찾아올 것만 같았다.
오늘의 만남은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젠 그런 일 없을 거야. 엄마한테도 내가 잘 말할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래, 그럼 됐어.”
“…….”
“근데 있잖아.”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거 묻는 거, 좀 우습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대답해 줄래?”
“…….”
“너한테 난…… 대체 뭐였니?”
비록, 그가 저를 남자로서 사랑할 순 없는 몸이었다지만…….
예원은 그와 보냈던 지난 10년간, 내내 행복했었다. 지금, 그 남자와 함께하고 있는 시간만큼이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 줬던 거야? 왜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었어?”
“…….”
“응?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어릴 땐 그것이 당연히 사랑일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었다고 판가름 나고 나니, 새삼 궁금해졌던 것이다.
대체 그건 뭐였는지.
혹시나 그 남자도…… 그때의 전민혁과 같은 감정인 건 아닌지.
“…….”
그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전민혁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
“모든 게 다 변명으로 들릴 거 알아. 나라도 당연히 그럴 거고. 그렇지만…….”
“…….”
“널 사랑했다고 한 말, 그건 다 진심이었어.”
그도 예원처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마지막이란 걸.
그래서일까.
전민혁은 작정한 듯 모든 걸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까지 전부.
“물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그런 사랑이었다는 뜻은 아니야. 그런데, 널 향한 마음도 나한테는…… 사랑이나 마찬가지였어.”
“…….”
“애초부터 내 성향, 어느 누구에게도 밝힐 생각 없었고. 그래서 만일 내가 누군가와 결혼을 해서 살게 된다면…… 그 상대는 꼭 너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오래 사귄 여자친구라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서, 제일 친한 친구로서…… 난 널 누구보다 많이 좋아했으니까. 사랑했으니까.”
순간, 예원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전민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지독하게 이기적이었지. 내 행복에 눈이 멀어서, 네가 앞으로 나 때문에 겪게 될 일들은 제대로 생각지도 못 했어. 내 생각이 짧았어.”
“…….”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예원아.”
이제 와 이런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하지만, 예원은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남자도 어쩌면, 지금 나를 그런 식으로라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모든 건 그래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그런 부질없는 희망 같은 것이 들었다.
이 모든 게, 그녀 혼자만의 합리화에 불과할지라도.
“그럼, 강세찬하고는…… 어떻게 된 거야.”
“……걔는 그냥 친구야.”
“……거짓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냐, 정말이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도, 민혁은 세찬과의 관계를 고집스럽게 부정했다.
“네가 그날 본 것 때문에 오해가 생긴 건 아는데, 그때 일은…… 정말로 실수였어.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나갔었던 거지.”
“…….”
“저번에 레스토랑에서 봤던 날도 그랬어. 걔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였는데…… 타이밍이 왜 그렇게 얄궂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랬어.”
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전민혁은 왜인지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모든 걸 털어버리고 난 뒤여서인지, 그는 눈에 띄게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나, 조만간 유학 갈 거야. 가서, 앞으로도 거기서 쭉 혼자 살려고. 그거 말해주려고 만났었어.”
“……뭐? 유학?”
갑자기 유학이라니.
예원은 일순 얼떨떨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디로 갈진 아직 몰라. 어쨌든 거기서 너한테 속죄하는 시간도 가지고,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찾아보려고.”
“…….”
“엄마가 널 찾아왔던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거야. 우리 집 대가 나한테서 끊기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으셨겠지.”
근데 뭐 어쩌겠어. 애초부터 끊길 대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는 실로 오랜만에, 예전의 전민혁 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예원은 그런 그를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명치 언저리가 찌르르 아파왔다.
“먼저 연락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렇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 내가 먼저는 도저히 못 말하겠더라고. 미안해서.”
“…….”
“앞으로도 현민혁 씨랑 행복하게 잘 지내. 나중에 먼 훗날 언젠가는, 다시 만날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땐, 부디 웃는 얼굴로 보자.”
“…….”
“난 이제, 이만 가볼게.”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예원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 곧바로 일어섰다.
그렇게 그녀의 옆을 쌩 지나쳐가려는 것 같던 전민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예원아.”
“…….”
“마지막으로, 나 너 한 번만 안아 봐도 되니?”
안기는 개뿔.
너 같은 거한테 다시는 안기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모질게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도는 나머지, 예원은 제게로 다가오는 그의 팔을 미처 뿌리치지 못했다.
안 좋은 일이 있거나 피곤한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찾곤 했던 그의 품.
일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예원은 이를 악문 채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라는 말.
그 말에 다들 뭘 몰라서 하는 소리라며, 그런 사람들한테는 우리를 좀 보여주고 싶다고 그와 함께 코웃음 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10년의 순정을 다 바쳤던 그녀의 첫사랑은, 비로소 장렬하게 끝이 나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와서야.
“…….”
네 까짓 게 어딜 가든지 말든지.
어디서든, 잘 먹고 잘 살아. 이 더럽게 나쁜 놈아.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 말들을 애써 속으로 삼켜내며, 예원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미안하지만 영화는 다른 데서 찍어줬으면 좋겠는데.”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일순 목덜미가 선뜩해졌다.
“좋은 분위기를 굳이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남의 사업장에서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
“전민혁 씨.”
졸지에 현장을 발각당한 두 남녀는 화들짝 떨어졌다.
깜짝 놀라 커진 예원의 눈이 남자를 한가득 눈에 담았다.
“미, 민혁 씨!”
저, 저 남자가, 어떻게 여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종잇장처럼 찢어진 지 오래였지만, 남자의 조용하게 살벌한 얼굴은 여전했다.
“이 시간에 지금 여기서 뭐하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내 카페에서, 내 아내와.”
“그, 그게…… 저…….”
거기다 당황한 전민혁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자, 그의 분노는 곧바로 극에 달했다.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잖아, 이 자식아!”
─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강펀치를 얻어맞은 전민혁은 그대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이럴 수가!
기함한 예원이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민혁아!”
어찌나 강타였는지, 충격을 받은 전민혁은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반면, 얼얼해진 주먹을 꾹 말아 쥔 민혁은 보기 좋게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왜. 바람나서 가차 없이 버릴 때는 모르겠더니, 이제 와서 이 여자가 아까워지기라도 한 건가?”
“…….”
“근데 이거 어쩌지. 이제 이 여잔, 내 여자라서 말이야.”
너 같은 새끼는 손도 대지 못할.
그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뇌까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마. 이건 경고가 아니라 명령이야. 알겠어?”
“…….”
“가자, 예원아.”
“저, 저기 민혁 씨……!”
예원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챈 그는, 그 상태 그대로 성큼성큼 에덴을 벗어났다.
* * *
“민혁 씨! 잠깐만, 잠깐만 이것 좀 놔 봐요. 네? 내가 다 설명한다니까요! 민혁 씨!”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의 손목을 감고 있던 손아귀는, 그들이 그의 고급 세단 앞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풀어졌다.
민혁은 곧바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에요. 홍예원 씨, 바보예요? 그 인간을 대체 거기서 왜 상대하고 있어요, 왜!”
레스토랑에서 만났을 땐 잘만 모른 척하더니, 이젠 거기서 아예 포옹을 하고 있어?
홍예원 씨는 어디 있냐는 질문에, 매니저 가윤에게서 ‘2층에 손님과 함께 계시다’는 답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전민혁에게 안긴 채 고개를 파묻고 있는 여자를 보자마자, 퓨즈가 확 나가버렸다.
조심스럽고 아까워서 난 아직 제대로 손도 대지 못하는 몸을, 저 따위 자식이 뭐라고 감히!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요새 저 여자가 그렇게 저기압이었던 게, 사실은 모두 다 저 자식 때문이었던 걸까.
저 자식이 그리워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말보다도 주먹이 먼저 튀어나갔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너무도 거센 나머지, 그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겪고도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린 겁니까? 아직도 저 자식한테 미련 남았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다 설명하겠다니까요!”
“됐어요, 집으로 가요.”
“민혁 씨!”
“그런 꼴을 보여 놓고 대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데!”
저 자식이 그렇게도 좋단 말인가. 그렇게 상처를 받아놓고도 다시 저 품에 안길 만큼?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가 씩씩거렸다.
한편,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여자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설명하게 해 줘요. 다 오해예요.”
“오해? 무슨 오해. 그 자식이 당신 두고 바람피운 게 아니라는 오해?”
“그런 거 아니에요!”
여자의 목소리에 낮은 울먹임이 깔렸다.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댔다.
“민혁 씨 맘 충분히 이해하지만, 화낼만한 상황 아니었어요. 나, 당신 아내예요. 어째서…… 날 못 믿는 거예요?”
애처로운 눈빛과 군데군데 번진 눈물에 마음이 절로 약해졌지만, 날카로운 가시가 한껏 불거진 마음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꾸 뾰족한 말만 내뱉게 만들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막말로, 당신이 내 진짜 아내도 아니잖아.”
“…….”
“당신, 나 좋아해?”
왜, 후회는 항상 꼭 늦게야 찾아오는지.
생각나는 말을 필터링도 없이 막 뱉어낸 그는 잠시 멈칫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1초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진 순간.
덜덜 떨리던 여자의 입술이, 이윽고 천천히 열렸다.
“……네, 좋아해요.”
그가 전혀 생각지 못한 말과 함께.
“내가, 현민혁 씨를…… 좋아해요.”
눈물범벅이 된 여자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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