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녀만을 위한 콘서트
2018.10.09.
“자꾸 찾아와서 이러시는 거…… 좀 많이 불편해요, 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표정과 말투.
그녀에게서 생전 처음 보는 얼굴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우진은 조금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되물었다.
“민혁이가 혹시…… 나랑 말도 섞지 말라고 하던가요?”
“……아뇨.”
“그럼…… 나에 대해서 무슨 얘기라도?”
“아뇨, 그런 거 다 아니에요.”
예원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제가 내키지 않는 거예요. 제가 누구와 말을 섞고 안 섞고는 제 자유죠. 그 사람이 제게 이래라 저래라 할 건 못 돼요. 이건 전적으로 제 생각이니까…… 그 사람하고 결부지어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아, 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의 단칼 끝맺음에, 우진은 조금 허탈해진 얼굴을 했다.
그 사이,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언제나 활달하고 밝던 그녀는 왠지,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워진 느낌이었다.
굳이 저를 향해서가 아니라도.
“예원 씰 불편하게 만들려던 의도는 없었어요. 난 그냥, 예원 씨가 워낙 똑부러지고 좋은 사람이라…… 막연히 친해지고 싶은 맘에 그랬던 건데.”
“…….”
“예원 씨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나, 엄연히 옆 카페 사장인데. 잠깐, 이렇게 와서 얘기하는 것도 안 됩니까? 그것도 싫어요?”
그녀의 살갑지 못한 말에도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물었다.
딱히 이유를 묻지도 않고 순순하게 받아들여 그나마 다행이다.
덕분에 차가웠던 예원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좀 심했나?’
하기야, 계약결혼이라는 사정을 모르는 남자의 입장에서 그녀는 한낱 유부녀에 불과할 터였다.
별 생각 없이 접근했을 수도 있는데. 제가 괜히 오버를 한 것일지도.
머쓱해진 예원이 뒷목을 슬쩍 긁었다.
“……사적인 이야기만 하지 않으신다면 상관없어요. 다만, 옆 카페 사장으로서의 태도만 지켜주세요. 밥을 먹자거나 따로 밖에서 만나자거나, 그런 것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그녀가 살짝 유해진 투로 말하자, 남자의 얼굴은 금세 다행이라는 듯 풀어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점장님……?”
그때, 마침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매니저님. 오셨어요?”
미들타임 출근이 예정 돼 있던 가윤이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바 바깥으로 나와 있는 예원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가윤은 옆에 선 우진을 보자 곧바로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헉.”
뭐야, 왜 저래?
마치 귀신을 보기라도 한 듯한 반응.
그것이 너무도 뚜렷한 나머지, 예원도 아는 체를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요?”
“아, 아뇨…….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참, 이쪽은 우리 옆 카페 사장님이세요. 우진 씨, 이쪽은 저희 카페 매니저님이세요.”
“아, 예. 반갑습니다.”
“안녕…… 하세요.”
그녀답지 않게 쭈뼛거리는 태도가 희한하기 그지없다.
물론 눈앞의 남자가 일반인답지 않은 외모인 것은 분명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매니저가 원래 저러는 사람이 아닌데…….
예원의 눈썹이 티 나지 않게 들썩였다.
“저, 매니저님도 오신 김에. 저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아까부터 가질 못해서요.”
“……아, 예. 그럼, 저도 이만 가보죠.”
“…….”
“다음에 봐요, 예원 씨. 매니저님도,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에…….”
다시 본래의 태도로 돌아온 우진은 씩 웃은 뒤 자리를 떴고, 가윤은 웬일인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 있어요?”
예원이 은근하게 묻자, 가윤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찾은 듯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얼른 화장실 다녀오세요, 점장님. 제가 바에 있을게요.”
“……네.”
왜 저러지? 혹시, 저 남자한테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건가?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사이, 앞치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앗.’
이럴 때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혹시나 그 남자일까 봐서.
머뭇거리던 예원은 천천히 폰을 꺼내 확인했다.
[누나. 오늘 저녁에 잠깐 만날 수 있어?]
[할 얘기 있는데.]
다행히, 그것은 동생 지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어라. 예원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무슨 일이지.”
요즘은 통 연락이 잘 없던 동생이었다.
할 얘기가 있다니.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각을 잡는지 알 수가 없네.
‘뭐, 별 거 아니겠지. 그 놈한테 뭔 대단한 일이야 있으려고.’
잠시 뚱하게 입술을 내밀던 예원은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 * *
“어, 누나. 여기.”
남매가 만난 곳은 본가 근처의 카페였다.
집이 코앞인데 왜 하필 이곳에서 보자는 건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예원은 흔쾌히 승낙했다.
만날 일만 하다가, 오랜만에 남이 만들어주는 음료를 맛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오래 기다렸어? 퇴근하자마자 바로 온 건데.”
“아냐, 나도 방금 왔어.”
“밥은?”
“난 학교에서 먹었지.”
“아아, 참…… 그렇겠구나.”
성적이 매우 우수한 편인 지원은 담임선생님과의 상의 하에 야간자율학습 여부를 유동적으로 조정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보단 집에서 공부가 훨씬 잘된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 이면엔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맘이 담겨 있다는 것을 예원은 알고 있었다.
워낙 걱정을 안 시키는 동생이기에, 그쯤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봐주고 있는 것이고.
어쨌든 오랜만에 동생 얼굴을 보니 착잡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다.
예원은 모처럼 활기차게 물었다.
“근데 웬일이야, 네가? 누나한테 보자는 말을 다 하고.”
“……웬일은. 누나한테 할 말 있어서 그런다니까.”
흠,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홍지원. 너, 솔직히 말해 봐.”
“뭘?”
“……너 여자친구 생겼지?”
누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지원은 뜨끔한 얼굴로 소리쳤다.
“뭐?”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머릿속엔 순식간에 지영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아, 아냐 그런 거! 여자친구는 무슨!”
“아니긴? 근데 그렇게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 집, 학교 말고는 갈 데도 없는 놈이?”
“…….”
“그러지 말고 바른대로 딱 말해. 어떤 여자애야? 예뻐? 착해?”
그의 하나뿐인 누나는 아니나 다를까, 그가 설마 공부 외에 딴 맘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 하고 있는 눈치였다.
순간 까마득해진 지원은 질근, 눈을 감았다 떴다.
이 이야기를,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실은……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어? 뭐. 누나한테 연애 상담이라도 하려고? 알잖아, 누나 그런 거 잘 못해!”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단단히 작심하고 온 건데도 왜 이리 떨리는지.
저를 이제껏 철석같이 믿어왔던 누나를,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이야기를 하기 전, 지원은 초조한 마음에 후,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나, 실은…….”
그리고 마침내 그가 천천히, 조심스레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봐온 모습 중, 제일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하지만 웃음기를 띠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지원의 말이 계속됨과 동시에, 서서히 밀랍처럼 굳어져갔다.
“……뭐?”
얘가, 지금 무슨 소릴……?
예원의 눈이 잔뜩 커졌다.
* * *
꽤나 묵직한 종이가방 하나가 식탁 위로 턱, 올려졌다.
민혁은 흐뭇해 마지않는 얼굴로 종이가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선, 때깔 고운 닭강정들이 크래프트지 소재의 박스에 담겨 그를 반기고 있었다.
“……좋아하겠지?”
설마 싫어하려나.
며칠 전, 혹시나 하는 맘에 뒤늦게 인턴들 사이에 껴서 한 입 맛보았던 닭강정은 꽤나 맛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벤트 기간을 놓치는 바람에 한 마리당 만 오천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매할 수밖에 없었지만, 맛을 보고 좋아할 여자를 생각하니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그나저나 이 여잔 왜 아직도 집에 없는 걸까.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인적 하나 없이 싸늘해진 집이 그는 어쩐지 낯설었다.
“……아직 에덴에 있나.”
짚이는 데라고 해봐야 그 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벌써 저녁 여덟시를 넘어가고 있는 시각이다.
오픈조인 날은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서 TV를 보거나 뒹굴뒹굴거리는 것이 일상인 그녀가, 이 시간까지 거기서 미적거릴 이유가 없는데.
‘뭐, 정 안 오면 데리러 가면 되지.’
그렇게 그가 잠시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던 사이, 마침 현관문이 세차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예원 씨. 이제 왔어요?”
그가 얼른 반가운 체를 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쿵쾅쿵쾅. 소리가 날 것 같은 난폭한 걸음으로 그의 앞에 바짝 다가온 예원은 다짜고짜 물었다.
“지원이, 어떻게 된 거예요?”
“네? 갑자기, 지원이는 왜…….”
상황파악이 안 된 그가 반문했다.
“……저 방금 지원이 만나고 왔어요. 근데 걔가, 웬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상한…… 얘기라뇨?”
아. 그제야 민혁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금방 깨달았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지원이 그와의 통화에서 그렇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저, 며칠 안으로 누나한테 얘기하려고요.’
겁이 좀 나긴 하지만, 이제는 오디션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말할 수밖에 없겠다고.
별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던 자신이 떠오른 민혁은 순간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여자는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기에.
“무슨…… 얘기 말입니까?”
그가 모른 척 묻자, 예원은 그런 그를 한 번 쏘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가수가 되겠대요. 자기도 현민혁처럼 유명한 연예인이 될 테니까, 나 보고 좀 지켜봐 달라고. 조만간 오디션에도 나갈 거라던데.”
“…….”
“혹시, 현민혁 씨는 알고 있었어요?”
겉으로 듣기엔 질문이었지만, 그것은 기실 확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여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왔다.
민혁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예원 씨, 그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신 거예요?!”
예원은 결국, 그에게 들끓는 화를 표출하고 말았다.
“지원이한테 다 들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해하고 있던 차에, ‘매형’이 준비하는 거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고. 내가 언제 그런 거 부탁했어요? 착실히 공부 잘하고 있는 애한테, 왜 그런 바람을 넣느냐고요!”
“홍예원 씨, 잠시만 진정하고 내 말 좀…….”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얘기를 하다 만 예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지원이, 부모님도 없이 평생을 고생만 하고 자란 애예요. 집에서 별다르게 해준 것도 없지만, 기특하게 혼자 공부 하나는 잘해서, 그나마 이제 앞으로의 걱정은 없겠구나 싶었다고요. 그런데, 그런 애가 갑자기 구렁텅이나 다름없는 길을 제 발로 들어가겠대요. 민혁 씨가 나라면, 그런 소릴 듣고 진정을 할 수 있겠어요?”
예원의 거듭되는 공세에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누나로서 동생을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원 씨, 그러지 말고 내 얘기부터 좀 들어 봐요. 예원 씨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지원이…… 충분히 재능 있어요. 초반엔 조금 고생할는지 몰라도 금방 꽃피고 유명해질 거라고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그걸 대체 누가 장담할 수 있는데요?”
그의 회유 시도에도, 예원은 지지 않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전에 현민혁 씨가 말한 적 있죠. ‘분칠한 사람들’은 믿지 말라고. 그리고 또 뭐랬더라? ‘성격파탄자’들도 더럽게 많고, 안 그런 사람은 살아남기가 힘든 바닥이 연예계라고……. 분명히 저한테 그러지 않았어요? 제가 잘 못 들었나요?”
순간, 민혁은 덜컥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은연중에 정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젠장.’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민혁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괜스레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어서는.
그런데, 뼈저린 후회가 드는 와중에도 그는 문득 멈칫하게 되었다.
‘그걸, 어떻게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제가 스쳐지나가듯 한 말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녹음기처럼.
곤란한 상황에도 그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 민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장 그 오디션 나가서 붙기라도 하면, 몇 개월을 학교도 못 나가고 합숙해야 한대요. 걔 고3이에요. 그러다 수능 망치기라도 하면요. 그럼 어떡해요? 이제껏 노력한 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리잖아요!”
“…….”
“난, 내 동생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꼴 못 봐요.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모를까, 앞길이 창창한 애더러 왜 굳이 그런 힘든 길을 가라고 해야 돼요?”
이건, 어떻게든 동생을 출세시켜 콩고물이라도 하나 얻어 먹어보려는 치맛바람 욕심 같은 것이 아니었다.
힘들고 외롭게만 살아온 제 동생이,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그저 평안하고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누리기만을 바라는 마음일 뿐.
“난 절대로 찬성 못 해요. 민혁 씨도 이제 그만, 더 이상 그 애 부추기지 마세요.”
“…….”
“힘든 건, 나 하나로도 족하니까.”
민혁은 그런 예원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며칠 만에 제대로 본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아내로 사는 일이…… 이 여자에겐 무척 힘든 일인 걸까.’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별안간 그는 불쑥 물었다.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싫습니까?”
“……네?”
예원의 눈에 곧장 의아한 빛이 띠었다.
“뭘…… 도와줘요?”
“……내 처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방송사에서도 그렇고, 아마 언론에서도 꽤 눈여겨 볼 거예요. 물론 지원이라면 그런 후광 없이도 잘해내겠지만, 예원 씨가 혹시나 걱정이 된다면 그런 방법도 있다고요. 최소한의 부스트 효과는 나겠죠.”
“…….”
“난 홍예원 씨 남편이고, 홍예원 씨는 엄연히 내 아내예요. 내가 지원이를 도와주는 건 엄연히 계약서에 명시된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잠깐, 잠깐만요.”
그때, 그의 말꼬리를 예원이 싹둑 자르고 들어왔다.
그녀는 어쩐지 멍해진 얼굴이었다.
“민혁 씨가…… 왜요?”
“…….”
“민혁 씨가 왜…… 그런 일을 해요?”
“……네?”
여자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어딘가, 차갑고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 계약결혼이잖아요. 1년 시한부. 잊었어요?”
“…….”
“저하고 평생 살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내서, 어떡하시려고요?”
평소에는 맹한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놀라울 만큼 냉철하고 똑똑해지는 홍예원.
그녀에겐 매번 그의 정곡을 찌르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민혁은 졸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얼른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난 당신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데…….
“…….”
그럴 수가 없었다.
순간 여자의 눈에, 설핏 투명한 물기가 맺히는 것 같았으므로.
“전, 그런 뜻으로 지원이를 도와달라고 했던 게 아니에요.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지 마세요.”
“…….”
“……저도, 민혁 씨가 책임 질 일 안 만들 테니까.”
그래도 끝끝내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낮게 읊조린 예원은 그를 뒤로한 채, 곧장 2층으로 향했다.
* * *
지난 이틀간, 예원은 그야말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낮엔 미친 듯 일을 하고, 저녁엔 집으로 들어와 아침까지 꼬박 잠만 잤다.
의욕이 없으니 배도 고프질 않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건, 오로지 그 남자의 목소리와 얼굴뿐이었다.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싫습니까?”
솔직히, 그 순간엔 너무나도 떨리고 설렜다.
동생인 지원을 그렇게 생각해 준다는 건, 그만큼 그가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자꾸만 그런 희망에 기대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자꾸만 본분을 잊어버리니까.
나도 모르게, 그 남자와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까먹어 버리니까.
“……휴.”
한숨을 내쉰 예원은 핑크빛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 모질게 군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렇게 자꾸 착각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싫어.
─Rrrrrr.
그때, 협탁 위에 올려놓았던 폰에서 우렁찬 전화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신자는 한창 마감을 하고 있을 지영이었다.
“……여보세요.”
[어, 나. 지금 집이야?]
“어, 왜.”
[나 이제 곧 마치는데, 오늘 언니랑 한 잔 안 땡길래? 나 오늘 술 되게 땡기는데.]
“……됐어, 난 안 땡겨.”
그러고 보니 술을 안 마신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늘 그의 옆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남잔,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 마시지도 않으니까.
하여튼, 그렇게 재미없는 남자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난…….
[아, 왜~ 그러지 말고 나와라, 응? 계속 그렇게 집에만 틀어박혀서 뭐할 건데. 그러다 우울증만 생기지.]
“…….”
[그러지 말고 나와. 너 어차피 내일 마감조라며? 나랑 같이 오랜만에 달리고, 푹 자고 일어나면 좀 나아질 거야.]
“……그런가.”
글쎄, 그렇게 한다고 나아지는 거면 좋으련만…….
“……알았어, 갈게.”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뭐.
전화를 끊은 예원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약속 장소는 지영이 일하고 있는 카페였다.
마감한 날에는 꼭 어디 멀리 나가는 게 귀찮다며, 그녀를 제 가게로 소환하곤 하는 지영이었다.
“어? 뭐지……?”
그런데, 밖에서 보이는 카페 조명은 모두가 꺼져 있었다.
시간상으로는 분명 아직 마감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뭐야, 빨리 마쳤나?”
의아한 맘에 지영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통화음만 들릴 뿐 감감 무소식이었다.
‘설마, 이게 날 바람맞힌 건가?’
에이씨.
그렇잖아도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더욱 수렁으로 빠진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순 위기감이 든 예원은 무작정 입구로 다가가 출입문을 밀어보았다.
“……어?”
뭐야, 열려 있잖아?
당연히 닫혀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은 너무나 약한 힘으로도 쉽게 밀렸다.
예원은 얼떨떨해졌다.
‘이 기집앤. 아무리 빨리 가고 싶어도 그렇지, 어떻게 출입문 단속도 안 하고!’
카페 사장이 알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 번 다 털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쯧쯧.
어쨌든, 아무리 남의 가게라 해도 문을 이 상태로 둘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예원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 하나도 안 보이네.”
불이 다 꺼진 실내는 너무도 어두웠다.
지영 때문에 퍽 자주 와본 곳이기는 하지만, 항상 손님으로만 왔던 그녀가 스위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 방법은 없었다.
예원은 애써 짜증을 삭이며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벽을 더듬더듬 찾았다.
그때였다.
─탁.
경쾌한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창가 부근에 주황빛 불이 탁 켜졌다.
순간 상황파악이 안 된 예원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을 잘게 끔뻑거렸다.
‘저게…… 누구지?’
무대 같이 보이는 단상 위로, 어딘지 익숙한 인영이 기타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나.”
아니, 저, 저건…….
“……춥지, 어서 와.”
누나만을 위한 콘서트에 온 걸 환영해.
아직은 앳된 남자애의 달콤한 목소리가 성능 좋은 마이크를 타고 전해졌다.
“……!”
그녀의 동생, 지원의 입가에 걸린 해맑은 미소.
그것을 목격한 예원은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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