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내 여잔 내가 알아서 해
2018.07.31.
“……그럼 그렇지.”
그 시각, 밴드부실 문을 열어젖힌 민영의 첫마디는 언제나처럼 단출했다.
지원은 허리춤에 손을 척 올린 민영을 흘낏 쳐다보고는 금방 다시 눈을 돌렸다.
“웬일이냐.”
“웬일은? 너 밥도 안 먹고 이러고 있을 거 같아서 함 와본 거지.”
아니나 다를까, 홍지원은 오늘도 애지중지하는 통기타를 품에 꼭 안고 있는 채였다.
평소 즐겨 연주하는 건 일렉 기타이면서도, 혼자 있을 땐 꼭 저렇게 통기타를 고집하는 놈.
‘저게 저렇게도 좋을까.’
민영은 혀를 끌끌 차더니, 뻔질나게 드나들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밴드부실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자습도 없는 토요일에 학교를 자진해서 오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넌 애가 진짜 왜 그러냐?”
‘나까지 귀찮아지게.’
가장 중요한 말이 생략된 잔소리.
하지만 얼굴을 찡그린 지원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알면서 묻지 마.”
보나마나 빤한 이유. 민영도 그를 모르지 않았다.
자타공인 모범생 홍지원이 저놈의 기타를 맘 놓고 칠 수 있는 곳은, 좁아터진 여기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기껏 찾아온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기타에만 몰두하고 있는 저런 꼴을 보면, 배알이 안 꼴리려야 안 꼴릴 수가 없었다.
“내일모레 고3인 주제에 이러고 있는 거 알면 너네 누나가 잘도 가만있겠다. 하여튼 열정 뮤지션 나셨어요.”
“…….”
“됐고, 이거나 처먹어.”
거칠게 내던져진 까만 봉지가 지원의 옆에 있던 의자로 탁 안착했다.
대답 없이 기타줄만 튕기고 있던 지원은 별 일이라는 얼굴로 봉지를 살짝 들췄다.
그 안엔 떡볶이와 순대, 튀김 등이 담겨 김이 하얗게 서린 봉지가 봉해져 있었다.
지원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웬 거냐. 많이도 샀네.”
“맛있겠지? 이 누나가 또 손수 사왔다. 어제 간만에 아빠한테 보너스 받았거든.”
“너나 먹지, 그럼.”
헐.
팍 실망해버린 민영의 눈이 단박에 세모꼴을 그렸다.
“나 다이어트 중이거든! 어제 말했잖아!”
“아, 그래. 뭐, 고맙다. 잘 먹을게.”
이놈은 꼭 이런 식이다. 잘해줘도 지랄.
금세 가자미눈을 뜬 민영은 지원을 한껏 흘겼다.
“근데, 이거 갖다 주려고 온 거냐?”
“아니? 나도 볼 일 있어서 왔지.”
“볼 일? 무슨 볼 일.”
사실이었다. 물론 진짜 볼 일은 따로 있었긴 했지만.
이곳저곳을 떠돌다 결국 드럼 앞에 멈춰선 민영은 그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야, 대식이 드럼 관뒀다며? 그럼 드럼 자리 비는 거야?”
“어? ……어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인데…….
지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지원은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명지고등학교 밴드부의 보컬 겸 기타를 맡고 있었다.
별다른 직책이랄 건 없는 동아리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엄밀히 말해 회장격의 인물이었다.
모범생인 그가 소속돼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로부터 온갖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시시콜콜한 교내 행사는 물론이고, 나름 규모 있는 외부 행사들까지 꿰차며 꽤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던 그들에게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지금껏 함께 활약해준 드러머 대식이, 돌연 관둔다고 선언해왔던 것이다.
밴드에 드럼이 빠진다는 것이 웬 말인가!
갑자기 들이닥친 날벼락에 그들은 그야말로 멘붕 사태에 빠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달리 방도를 찾지도 못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음. 그럼, 혹시 생각해놓은 애라도 있어?”
“아니. 이제 찾아야지. 그래도 아직 급한 건 아니니까.”
“그래? 그럼 혹시…… 여자도 괜찮냐?”
“……여자?”
현재로선 죄다 남자로만 구성되어 있는 밴드이긴 했지만.
여자멤버가 굳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실력만 있다면야 누구든 받지 못할쏘냐.
그리고 저리 묻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다.
혹시 염두에 둔 애가 있을지도 몰라.
지원은 당장 반색했다.
“괜찮지. 어차피 오디션 볼 거긴 한데. 왜, 아는 애라도 있어?”
“……뭐, 아는 앤 아니고.”
가볍게 대답한 민영은 심벌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리더니,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나야.”
순간,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잠깐만. 뭐라고?”
“나라고. 네가 찾는 새 멤버가.”
다시 들어도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고민영이 드럼을 친다니. 그녀를 알게 된 이후 완전히 처음 안 사실이었다.
“네가, 드럼을 칠 줄 알아?”
“어. 사실은 키보드도 칠 줄 알아. 어렸을 때 피아노를 좀 배웠거든. 전천후 인재지.”
“…….”
“그 오디션인가 뭔가, 언제 보면 되는데? 지금 당장 보여줘? 아, 아니다. 다른 애들도 같이 봐야 되는 거면 당장 월요일에 봐야 되는 건가?”
아무래도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었다.
민영은 절로 신이 난 나머지 말을 다다다 쏟아내었지만, 지원은 그런 민영을 제지했다.
“……아니, 월요일은 안 돼.”
“이씨, 왜.”
“나 그날 과외 있어.”
“과외?”
홍지원이 과외라니. 이건 또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소리일까.
그녀의 상식선에선 쓸데없는 돈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누굴 가르치는 거면 몰라도, 가르침을 받는 건 홍지원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닌데.
“네가 과외를 왜 받아? 뭐 배울 게 있어야 과외를 받지. 솔직히 웬만한 대학생들은 네가 찜쪄먹지 않냐?”
그 말에 잠시 주춤하던 지원은 이내 낮게 대답했다.
“……있어, 그런 게. 하여튼 월요일은 안 되고, 다음 주 중에 날 한 번 잡든지. 애들한텐 내가 전해줄 테니까.”
수상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는 민영을 애써 외면하며, 지원은 미소와 함께 다시금 기타를 손에 들었다.
배울 게 없긴. 배울 게 너무 넘쳐나서 탈이다.
누구 덕분에.
* * *
클럽 헬른. 그리고 그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즐겨 찾는다는 프라이빗 룸.
그 안에서 예원은 여전히 한껏 꾸민 상태로 조용하고도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우.”
졸지에 ‘누구’ 플러스 ‘누구 친구들’과 함께 있게 된 예원은 솔직한 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여길 따라와?’
테이블에 쫙 깔린 고급 음식들과 술.
그리고 그 테이블을 빙 둘러싼 번쩍거리는 무리들을 둘러보니 절로 착잡한 표정이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아까 전의 자신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어, 저, 저는…….’
처음엔 당연히 안 간다고 말하려 했다.
그것은 단순히 남자에게 보답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를 한 번 세워주기 위함이었던 소기의 목적을 상당 부분 거스르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기껏 말하려는 그녀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옆에 있던 그가 먼저 나서는 것이 아닌가.
‘예원 씨는 안 돼. 가도 나 혼자 갈 거니까, 예원 씨는 놔둬.’
알아서 가드 쳐주는 걸 응당 고마워했어야 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순간 기분이 팍 상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나는 두고 자기 혼자 가겠다고?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달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에이, 자식. 그래도 기왕 만났는데, 같이 가면 안 될 건 뭐냐? 벌써부터 단속해?’
‘……하여튼 안 돼. 그냥 다음에…….’
‘아뇨! 갈게요. 저도 갈게요.’
그렇게 무작정 내질러버렸던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이.
당황스러워하는 듯한 남자의 눈빛이 뒤따른 것은 물론이었다.
“…….”
예원의 큰 눈이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그녀는 확실히 이곳에서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자리엔 민혁과 친구들 외에도 못 보던 이들 몇몇이 더 참석해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대화를 잘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잠시 그녀를 향해 진득한 시선을 두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결혼식장서부터 강렬한 눈빛을 보내던 그 여자도 마찬가지.
진정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다.
철장만 없다 뿐이지, 손발조차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딱 그 수준이었다.
“……에휴.”
연이은 한숨.
다만 처음 것은 대화들 속에 묻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두 번째 것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왜요. 어디 불편해요?”
“……괜찮아요.”
아뇨, 사실은 괜찮지 않아요. 당신 따라 여기 온 걸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랍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자존심이 그녀의 안에서 빼꼼 고개를 들었다.
‘아니지. 뭐 어때. 네가 뭐 죄졌어? 저 사람들이나 너나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됐어. 당당해지자, 홍예원. 아자!’
혼란스러운 마음을 속으로 애써 다잡은 예원은 테이블 아래에 있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의지가 되는 건, 오로지 옆에 있는 남자뿐이었다.
“…….”
한편 박해준은 그 모습을 건너편에서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모를 느끼한 미소를 띄운 그는 그녀에게 대뜸 말을 걸어왔다.
“예원 씨, 편하게 있어요 편하게. 부담 가지지 말고. 응?”
……님 덕에 더 부담되는데요.
“……아, 네. 괜찮아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맘에도 없는 말을 하려니 좀이 쑤셨지만, 그는 엄연히 당대 최고의 톱스타 박해준이었다.
물론 그런 게 아니라도,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 수 있는 성격이 못 되는 그녀였지만.
“……이야.”
그런데 잠시 뒤, 해준에게선 영 생뚱맞은 말이 흘러나왔다.
“근데 우리 제수씨는 보면 볼수록 미인이시네. 차분하고, 단아하고. 아무리 봐도 일반인으로 썩히기엔 너무 아까운 외몬데. 안 그래? 어?”
성화에 못 이긴 듯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 저 인간은 아까부터 왜 자꾸?’
젠장.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어쩔 수 없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당사자는 별 생각도 없는데 혼자서 난리 부르스.
역시 또라이는 또라이인 걸까. 제발 신경 좀 꺼줬으면 좋겠는데…….
“지금이라도 배우 해볼 생각 없어요? 진짜 아까워서 그러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으음. 아니, 아니. 진짜 빈말이 아니고 진심이에요. 다들 궁금해 했거든요. 이 목석같은 놈을 사로잡을 여자가 세상에 있긴 할지……. 근데 예원 씨를 보고 나니까, 이건 뭐 인정할 수밖에 없네. 나라도 넘어갔겠어요.”
다소 불경스럽게 뇌까리던 해준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천하의 현민혁이 스캔들이라니, 당연히 안 믿겼거든요. 난 솔직히 이 놈이 고자가 아닌가, 생각까지 했었다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을 거야. 오죽 심했으면 그런 게이 소리까지 나왔겠냐고…….”
“형. 그쯤 하죠.”
옆에 있던 재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말렸다.
반면 당사자인 민혁은 예상외로 무표정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어쩐지 얼음처럼 서늘해서, 누구라도 그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야, 현민혁. 장난인데 뭘 그렇게 정색까지 하냐. 신기해서 하는 말이다, 신기해서. 좋은 날인데 얼굴 좀 풀어라, 인마.”
“…….”
“하여튼 그건 그렇고. 우리 제수씨도 한 잔 하시죠. 여기까지 왔는데, 기분도 낼 겸.”
해준의 능글맞은 멘트와 함께, 짙은 색의 액체가 담긴 잔이 그녀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예원은 잠시 입술을 벌린 채 그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
척 봐도 무척 비싼 술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곧이곧대로 받기에는 어쩐지 머뭇거려졌지만, 원체 애주가인 그녀인지라 내심 구미가 당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 네. 그럼…….”
예원은 결국 할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옆에 있던 그가 잔을 홱 낚아채더니, 테이블 위로 곧장 내려놓은 것은.
“안 돼.”
“…….”
졸지에 눈앞에서 잔을 놓친 예원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얼떨결에 잔을 빼앗긴 해준 또한 무안한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뭐야 이거. 끽해봐야 딱 한 잔인데 뭐 어떠냐. 하, 참. 단속도 단속 나름이지 유난은……. 예원 씨 놀란 거 안 보여?”
그제야 그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민혁은 예원의 눈치를 살피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 난 그냥 걱정돼서.”
“……아, 아니에요.”
작게 대답한 예원도 얼른 그의 눈치를 살폈다.
박해준이 주제도 모르고 나댄 탓일까.
남자는 언뜻 보아도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걱정스런 표정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홧김에 따라 오겠다 나선 것이 다시금 후회가 되었다.
‘안 되겠어.’
잠시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어보인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좋겠지.
생각을 마친 예원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신경 쓰지 마시고 얘기들 나누세요.”
민혁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뜨는 예원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눈에 밟혔다.
“민혁아.”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다시 느긋해진 해준은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마치, 인자한 형으로서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넌 진짜 다 좋은데, 이 ‘센스’가 부족해. 매번 왜 그러냐? 괜히 분위기 싸해지게……. 그러니까 네가 만날 선비 소리나 듣는 거 아니야.”
“…….”
“자식. 이거나 한 잔 해.”
값비싼 술이 또로록 들어찬 잔은 갈색빛으로 영롱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를 내려다본 민혁의 눈썹은 살짝 비틀렸다.
“……운전해야 돼. 예원인 운전 못하거든.”
완곡하면서도 분명한 거절이었다.
해준은 픽 웃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하여튼 애송이는 어쩔 수가 없다니까.
“그거야 대리 부르면 되지. 야, 뭘 그렇게 끼고 도냐? 여자들은 백번 잘해 줘봐야 까딱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끝이야. 너무 애쓰진 말고 적당히 하라고. 신혼 때부터 그렇게 유난 떨어봤자 너만 힘들다. 이 형이, ‘인생 선배’로서 너한테 알려주는 거야.”
방금 전까지 예원에게 일방적으로 극찬을 늘어놓던 놈의 말 치고는 무척 매정한 투.
“…….”
그렇게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민혁은 술잔 대신 물잔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저 여잘 왜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본인이 괜찮다 해도 말렸어야 했는데.
“……형.”
“어?”
어리석었던 자신을 자책하며, 민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눈빛을 했다.
“형이 나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 건 알겠는데, 오늘은 좀 주제를 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걱정 고맙지만, 쓸데없는 충고는 하지 마.”
“뭐?”
민혁의 눈이 해준을 꿰뚫듯 직시했다.
“필요 이상의 관심은 이쪽에서 사양이라고.”
“…….”
“내 여잔, 내가 알아서 해.”
허, 요것 봐라.
해준의 눈초리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연기할 때 주로 나오는 그 특유의 사나운 눈빛이었다.
누구를 상대로 하든 주눅을 들게 할 수 있는 눈.
하지만 민혁은 달랐다.
그의 눈빛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눈이었다.
“…….”
“…….”
그렇게, 날이 선 두 남자의 눈빛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각자 시끄럽던 주위 사람들 또한, 어느 순간부터 그런 그들을 흥미로운 눈, 혹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이 생각보다 재밌게 돌아가는데……?
* * *
프라이빗 룸에 딸린 전용 화장실.
일을 본 뒤 깨끗이 손을 씻은 예원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의 흐름에 살짝 흐트러지긴 했지만, 지영이 공들여 해주었던 화장은 여전히 그녀로 하여금 반짝반짝 광채를 나게 했다.
‘기술이 좋긴 좋아. 고작 이런 거 하나에 사람이 달라지고.’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은 어쩌면 이번 한 번만으로 족할 것 같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예원이 페이퍼 타올로 손을 닦은 뒤 화장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주인을 무심코 확인한 예원은 깜짝 놀랐다.
“……!”
그 여자였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여자.
예원을 힐끗 일견한 여자는 그녀가 비켜난 세면대 쪽으로 다가가 태연히 립스틱을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화장을 고치려는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랬더라. 예쁘긴 진짜 예쁘네.’
모델 출신 연기자라는 여자는 그야말로 바비인형 같았다.
고속도로처럼 쫙 빠진 몸매에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긴 머리칼.
거기다 당장이라도 소멸할 것 같은 얼굴 안에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신기함 반, 부러움 반.
“…….”
예원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던 것도 잊은 채, 여자를 빤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래서였다.
여자의 차가운 말소리를 한발 늦게야 알아챈 것은.
“……구경거리가 생겨서 즐겁나 봐요. 근데 어쩌죠. 당사자는 즐거울 수가 없는데.”
립스틱을 바르던 여자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저를 관찰하고 있는 듯한 예원을 정확히 겨냥한 말이었다.
예원은 그제야, 제가 저지른 무례를 깨달았다.
‘헉, 어떡해.’
악의는 없는 행동이었지만, 여자로선 충분히 유쾌하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은 방금 전까지 제가 피부로 느낀 사실이 아닌가.
“아.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또 한 번 불편한 대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뒤, 립스틱을 꼼꼼히 바른 입술을 두어 번 뻐끔거린 여자는 거울을 통해 나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난 또, 날 유혹하기라도 하시는 건 줄 알았죠.”
“…….”
“민혁이 오빠한테 했던 것처럼.”
“……네?”
뭐야, 저 말은?
순간, 여자와 예원의 눈빛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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