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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15화 (15/102)

15화. 을의 횡포

2018.05.25.

“믿어질지 모르겠지만, 나랑 하룻밤을 보낸 여자는 엄연히 홍예원 씨가 처음이거든.”

“…….”

“그러니까, 책임져요.”

그리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쓸데없이 진지했다.

하. 억지도 이런 억지가 있나.

예원은 그를 상대할 의지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보세요, 현민혁 씨!”

“왜요.”

“…….”

“책임지기 싫습니까?”

당연히 싫지. 근데 싫고 자시고 그런 걸 떠나서 나는!

“애초에 책임질 것도 없었거든요!”

“…….”

“아, 됐어요! 됐고요. 쓸데없는 소리 마시고 본론이나 들으세요.”

흥분을 애써 가라앉힌 예원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남자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 같은 꼴이 될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녀도 생각해놓은 바가 있었다.

“그 일하고는 별개로, 사장님이 하셨던 말씀,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

“생각해볼수록……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아요. 없던 일로 하고 무시하기엔 상황이 생각보다 너무 커져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게 긍정적인 그 말에, 민혁은 순간 반색했다.

“맘 정한 겁니까?”

“……네. 단, 한 가지 조건만 더 들어주신다면요.”

조건?

그가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매사에 똑부러진 여자는 아마도 딜을 걸 작정인 모양이었다.

다름 아닌 ‘현민혁’을 상대로.

“……그게 뭡니까?”

예원은 대답도 하지 않고 대뜸 물었다.

“제가 만든 커피들, 어떠셨어요?”

“……커피?”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계약 얘길 하다 말고 갑자기 커피 얘기라니. 질문의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 글쎄요.”

“…….”

“그냥, 맛있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맛있었으니까,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말이 없을 수밖에.

하지만 예원은 방금 전의 그처럼 턱,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연예인 현민혁의 답변이었다면 이해했겠지만, ‘카페사장’ 현민혁의 답변이었다면 실망스러운 말이네요.”

“…….”

“커피 맛을 평가할 땐, ‘그냥 맛있다’ 정도론 안 돼요. 당도는 어떤지, 향기는 어떤지, 스팀우유의 온도는 적당한지, 베이스 맛에 커피가 죽지는 않는지. 이쪽 일을 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쯤은 기본적으로 평가할 줄 알아야 된다고요.”

아.

여자의 말을 찬찬히 듣고 있던 민혁은 순간 깨달았다.

여자가 지금껏 제게 직접 만든 커피를 마시게 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카페엔 그 사장만의 철학이 담겨 있어요. 그 카페의 커피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사장의 몫이니까요.”

“……그건.”

“알아요, 사장님은 어차피 그냥 떠맡았을 뿐이지, 커피 쪽엔 별 관심 없으시다는 거.”

그쯤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것들만큼이나 이 카페를 잘 굴리는 문제도 중요했다.

“그치만 언젠가 남한테 넘겨줄 카페라고 해도, 어쨌든 지금은 사장님 카페잖아요. 사장님이 신경 쓰셔야죠. 직접이요.”

“…….”

“장차 사장님이 어떤 사업을 하게 되실진 모르겠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이 사장님껜 앞으로의 사업 밑천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윤 교수님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맡기셨을 거고요. 안 그랬음, 저한테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죠.”

“…….”

“그러니까 제 말은.”

여자의 미소는 어쩐지 방금 전 그의 것처럼 사악했다.

“앞으로 주에 몇 시간 정도는 꼭 저랑 같이 커피 공부하셔야 된다고요. 여의치 않으면 한 달에 몇 시간 정도라도. 다른 세부사항들도 정해야 하긴 하겠지만, 일단은 그게 이 계약의 필수조건이에요. 좋으면 콜 하시고, 싫으시면 마시고. 택일하세요.”

……커피 공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조건이기에, 그는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제시했던 조건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흔쾌히 오케이 사인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매력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일개 직원 주제에 자기주장 하나는 무척 확실한 홍예원은 역시나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게다가 그 말엔 틀린 말도 전혀 없었다.

‘……젠장.’

비록 울며 겨자 먹기이긴 하겠지만, 등가교환이 전제된다면야 못 들어줄 것도 없는 조건이었다.

단,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좋아요. 다 좋은데, 홍예원 씨도 알다시피 난 본업이 따로 있어서. 그런 것까지 하기엔 아마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텐데요.”

민혁이 나름의 핑계를 댔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마저 염두에 두었다는 듯 곧바로 받아쳤다.

“괜찮아요. 좀 늦으셔도 봐드리죠, 뭐. 그래도 정 힘들다 싶을 땐 알아서 얘기하세요, 감안해드릴 테니까. 이래봬도 제가 그 정도 융통성은 있거든요.”

“…….”

이런.

그의 눈초리가 실처럼 가늘어진 반면, 예원은 속으로 살짝 웃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나만 혼자 당할 순 없다’는 심보에서 나온 계략이었다.

‘날 그렇게 순순히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좋아, 나도 당신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해 먹을 거라고.’

거기엔 물론 에덴을 좀 더 잘나가게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젠가 제 몫이 될 카페라면, 제 입맛대로 기틀을 다져두고 싶었다.

한데 그와 동시에 이 사장 놈을 골탕 먹이기까지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방법이 아닌가!

“그럼, 동의하신 거죠?”

“……그러죠, 뭐. 까짓 거.”

몇 주 새 누구와는 파혼을 해놓고, 또 다른 누구와는 결혼을 결정했다.

결혼이란 게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예원은 제게 휙휙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 실은 아직도 다 꿈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남잘 사장으로 만난 일부터, 전민혁과 있었던 일들까지……

모든 게 다.

“암튼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봐요. 후회하셔도 전 진짜 몰라요.”

어쨌거나, 그녀가 짜놓은 계략에 제가 꼼짝없이 말려든 줄도 모르는 민혁은 그저 기분 좋게 웃었다.

“난 후회 같은 거 안 한다고 했잖아요.”

쳇. 살짝 입술을 비죽이던 그녀가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그에게로 다가가 손을 쭉 내밀었다.

“자요.”

“……?”

멀뚱히 보고만 있는 민혁을 보며 예원은 답답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악수하자고요.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다들 이렇게 하든데.”

“…….”

“이래봬도 계약은 계약인데, 흉내는 한 번 내봐야죠.”

참, 유난은.

민혁은 그닥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지만, 결국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를 본 예원이 만족스럽게 빙긋 웃더니, 맞잡은 손을 아래위로 붕붕 흔들었다.

“아무쪼록 잘해봅시다, 현민혁 씨.”

누가 보면 회사 인수합병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그 모양이 이상하게 귀여워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던 그도 종내에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기분인데, 한 번 맞춰주지 뭐.

“……나도 잘 부탁합니다. 홍예원 씨.”

그들은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타결을 마쳤다.

저들에게 앞으로 어떤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 * *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온 스타 생생 인터뷰! 오늘의 주인공은, 멋진 ‘가을 남자’로 돌아온 국민 남친! 배우 현민혁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와, 그새 더 멋있어지신 것 같아요. 우리 ‘연예집중’ 시청자 여러분들께 오랜만에 인사 한 번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연예집중’ 시청자 여러분. 오랜만에 찾아뵙는 것 같네요. 배우 현민혁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벌써 지난달이었나요? 드라마 <못 말리는 청혼>이 시청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사랑과 함께 종영을 맞았는데요. 촬영이 끝난 후에,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음…… 일단 잠이 많이 모자랐기 때문에 밀린 잠을 좀 잤고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운동도 하고. 그렇게 별 일 없이 잘 지냈습니다.」

「‘별 일’……이 없으셨다고요?」

남자의 말꼬리를 자연스레 잡아챈 리포터가 장난스럽게 그를 흘겼다.

「에이, 이제는 전 국민이 다 알고 계시는데. 설마 지금, 모른 척 하시려는 건 아니죠?」

「예?」

그는 진정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끔뻑였고, 리포터는 짓궂게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나중에 드리려고 했는데, 말이 나온 김에 그냥 드릴게요. 그렇~게 촬영으로 바쁘셨던 와중에도, 또 틈틈이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 오셨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최근에, 현민혁 씨의 첫 스캔들이 아주 장안의 화제였잖아요.」

「아…….」

남자가 그제야 알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부끄러운 듯 웃어보였다.

「예.」

「얼마 전에 보니까, 아예 여자친구분과 공개 데이트를 하는 사진까지 인터넷에 떡하니 올라와 있더라고요. 데뷔 13년 만에 드디어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되신 소감을, 한 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의 입가에 대번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어, 소감……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것 같구요. 그냥 조용히, 예쁘게 잘 만날 테니까. 지금까지처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근데 알려진 바로는 여자친구 분께서 일반인이시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여쭤보고 싶은 질문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래도,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제일 궁금해 하실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나요?」

질문을 받은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질문이…… 좀 어렵네요.」

「하하, 편하게 대답하세요, 편하게. 있는 그대로.」

「음…….」

그는 리포터의 성화에 못 이긴 척,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본인의 일을 무척 좋아하는 여자예요. 평소에는 잘 모르겠다가도 그런 프로페셔널한 면을 보면 참 멋있다, 하고 생각하게 되구요. 가끔은 살짝 억척스러운 면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제게는 오히려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뭔가,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느낌이었다고 해야 될까요. 심성도 워낙 착했고.」

「으음. 설마, 그게 전부이신가요?」

「네? 아…… 물론, 예쁘죠. 당연히.」

‘닭살’이라는 자막과 함께 그의 뺨 위로 핑크빛의 홍조가 CG로 덧입혀졌다.

「역시 그랬군요. 좋습니다. 그럼, 어디가 특히 예쁘던가요?」

「음…… 웃을 때, 눈이 이렇게 초승달처럼 휘어지는데. 그게 참 예쁘더라고요.」

「아아, 그 미소에 반하셨단 얘기인가요? 눈웃음?」

「네, 뭐. 그런 셈이죠.」

멋쩍은 웃음에서 묻어나는 은근한 팔불출의 향기.

「이제 조만간 새 작품을 또 시작하실 텐데, 새 작품은 배우 조혜인 씨와 함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라고요. 혹시, 여자친구 분께서 소식 듣고 질투하시지는 않던가요?」

「하하, 글쎄요. 질투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조혜인 씨보다는 자기가 더 낫지 않느냐고 은근슬쩍 물어보기는 하더라고요.」

「어머,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 신경이 아예 안 쓰이진 않으시나 본데요?」

리포터는 재미있는 건수라도 하나 문 것처럼 야단을 떨었다.

「조심하셔야겠어요. 여자친구분이 촬영장으로 감시하러 가시는 거 아니에요? 김밥 같은 거 막 싸들고?」

하하하.

두 사람이 즐거운 듯 웃던 그 순간, 별안간 튀어나온 검지가 휴대폰의 ‘뒤로’ 버튼을 연타했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영상 속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약혼남’의 최근 인터뷰를 모니터링하던 예원의 감상은 퍽 쌀쌀맞은 것이었다.

그녀는 휴대폰에서 곧장 눈을 떼고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휙 째려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웃겨, 진짜.”

“……저번에 그러지 않았나.”

“언제요. 언제요!”

기껏 ‘사랑에 빠진 남자’ 콘셉트로 인터뷰 했건만, 당사자의 반응은 역시 좋지 않았다.

이럴까봐 내가 안 보여주려고 한 건데.

민혁은 영상 속 남자의 얼굴과는 180도 다른 얼굴로 성가시다는 듯 대꾸했다.

“이런 건 원래 그냥 다 지어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사실대로, 질투는커녕 눈도 깜짝 안 하더라, 그럴까요?”

여자는 언제나처럼 또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말을 지어내는 법이 어딨어요. 우리 사이 아는 사람들은 내가 진짜 그런 줄 알 거 아니에요.”

“정 그럼 홍예원 씨도 에덴 사람들 앞에서 지어내요. 천하의 현민혁이 나한테 아주 사족을 못 쓴다고.”

“……뭐요?”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런 소리를!

예원은 문득, 얼마 전 카페 식구들을 전부 모아놓고 남자와의 열애 사실을 고백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얼이 빠져있던 것은 잠시였을 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원을 맹렬히 취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설사 내가 살인을 저질렀어도 이렇게까지 추궁 당하진 않겠다.’

그런 놈들 앞에서 다시 이 남자 얘기를 꺼낸다는 건, 제가 학습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 아닌가.

예원은 또 한껏 가자미눈을 했다.

“뭐 어쨌든, 연기 잘하시네요. 역시 ‘탁월~한’ 연기자세요.”

“천만에요.”

그래도 배우는 배우라고, 남자의 연기는 매번 뻔뻔하고 능숙했다.

모든 사실을 아는 그녀조차 가끔은 깜빡 속아 넘어갈 뻔할 정도로.

‘뭐, 눈웃음이 예뻐?’

그래.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좀 뭐하지만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웃을 때 눈이 휘어지는 것도 맞고, 웃는 것이 예쁘단 소릴 자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었다.

그저 연기를 위한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을 멘트.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예원이었기에, 이제는 그런 말 하나하나에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대본에 써진 대사를 읊는구나.’ 정도로 이해할 뿐.

“그나저나 이 정도면, 이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았겠죠?”

“아마도요.”

“음, 그럼…… 이제 그 공개 데이튼가 뭔가, 그건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왜요.”

눈썹을 치켜 올리는 그에게, 예원은 괜히 우물쭈물 변명했다.

“아니…… 자꾸 불특정다수한테 얼굴 팔리는 것도 좀 신경 쓰이고……. 어쨌든 저한테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잖아요. 나중에 혹시 무슨 발목이 잡히기라도 하면…….”

그러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한테 내 얼굴을 보여주는 건 좀 그렇다, 이거지.

벌써 공개 데이트를 한 것만 몇 번인가.

명동, 인사동, 덕수궁 돌담길…… 기타 등등.

남자는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한다며, 인파가 많은 곳들로만 골라 데이트 장소를 정했다.

게다가 심지어 티를 내야 한다는 이유로 마스크도 못 하게 했다. 모자로 가려본다 한들 얼굴 전체를 감추긴 역부족이었다.

이미 사방팔방에 얼굴이 팔린 그야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일반인’인 예원에겐 그 모든 일이 당연히 괜찮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무지막지한 희생을 감수했는데도,

“평생 호호할머니로 살다 죽을 거라면서요. 이제 와서 혼삿길 걱정하는 겁니까?”

이 남잔 고작 이딴 소리나 하고 앉아있으니.

“…….”

예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것은, 남자가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그녀의 눈초리를 보며, 민혁은 타협한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알았어요. 어차피 이제 꼭 필요한 경우 말고는 밖에서 만나는 일 없을 겁니다. 그럼 됐죠.”

“……네.”

“그럼 이제 그만 들어가 봐요. 피곤할 텐데.”

“네, 사장님도 얼른 가세요.”

가볍게 대답한 예원이 미련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불현듯 뭔가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난 것처럼 그녀가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참. 여기요.”

“이게…… 뭐예요?”

웬 종이가방? 선물인가?

하지만 예원은 꿈 깨라는 것처럼 바로 덧붙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난 그냥 본인 물건 그대로 돌려주는 것뿐이니까.”

“……아.”

그는 종이가방을 살짝 벌려보고 나서야, 그것이 제가 그녀에게 빌려주었던 셔츠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번 까먹고 못 갖다드려서 죄송해요. 오늘은 나오기 전에 두 번 생각해서 안 잊고 챙겨왔어요.”

“……잘했네요.”

“아, 그리고 이것두.”

예원의 손길이 종이가방 속에 옷과 함께 들어있던 노란 봉투를 꺼냈다.

“이건 또 뭐죠?”

“이래봬도 계약결혼인데, 체계나 기준 같은 게 없으니까 잡음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저 혼자서 나름대로 만들어본 계약서예요.”

“……계약서요?”

흠칫 놀라며 반문하는 남자에게, 예원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드라마 보면 다들 이렇게 하더라고요.”

그건 구두계약으로 마무리 된 게 아니었던가.

그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한 입 갖고 두 말 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뇨, 딱히 그렇진 않은데요.”

고개를 저은 예원은 영리하게 대꾸했다.

“원래 피고용인 입장에선 계약내용을 서면으로 남기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는 거거든요. 그냥,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랄까. 사업하시겠다는 분이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요?”

“…….”

……하필 또 사업을 걸고넘어지니, 그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암튼 확인해보시고, 추가하시거나 빼실 사항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반영해드릴 테니까.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남긴 여자는 바람처럼 자리를 떠버렸고, 차안에는 봉투를 든 민혁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그의 눈길은 자연스레 봉투로 향했다.

‘무슨 계약서를 혼자서 만들어? 드라마도 안 본다는 여자가 만날 드라마 타령은.’

하여간에 맹랑한 여자다.

그래도 어디, 무슨 내용을 썼나 보기나 할까.

꺼내어 보니, 막상 봉투에 든 것은 A4용지 두 장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문제의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보려던 민혁은, 안타깝게도 첫 머리에서부터 인상을 썼다.

“…….”

[홍예원 (갑)  현민혁 (을)]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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