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랑 결혼 한 번 해볼래요?
2018.04.27.
“……뭐?”
“…….”
“야! 너…… 너 지금, 설마…….”
“알아요!”
민혁의 표정을 확인한 막내가 황급히 덧붙였다.
“저도 알아요, 형은 저한테 손톱만큼도 관심 없으시다는 거. 그래도 따로 만나다 보면…… 마음이 변하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
“처음엔 아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말할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였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결심했어요. 형 얘기 듣고 난 뒤부터요.”
“내 얘기?”
그제야 얼굴을 든 남자애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형도, 저랑 같은 취향이시라면서요. 그럼 저한테도 기회는 있는 거니까…….”
‘취향’이라 함은…….
멍해있던 민혁은 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우거지상을 했다.
……오 마이 갓, 또 시작인가?
이미 그를 게이라 철썩 믿고 있는 것 같은 남자애는 특유의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혁은 더더욱 난감해졌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그나마 여기가 방음이 잘 되어있는 곳이라는 게 다행인 건지.
“……정수야.”
결국, 그가 내뱉을 수 있었던 말이라고는 고작……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이런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난 게이가 아니라고. 남자 안 좋아해, 네버!
바로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저를 좋아한다고 어렵게 고백한 아이에게 이런 솔직한 말은 크나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아, 젠장.
“어, 그게…….”
그런데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민혁 씨.”
입을 열다 말고 무심코 문 쪽을 쳐다본 민혁의 얼굴은 대번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어? 손님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다지 좋지는 않은 반응에도, 문 앞에 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엔 고혹적인 미소만이 띄워져 있을 뿐이었다.
“뭐야, 남자 둘만 있는 대기실이 뭐가 이렇게 단란해?”
또각또각,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꼬리는 삐딱하게 호를 그렸고, 그녀의 나른한 시선은 무척 당황한 듯 보이는 이름 모를 남자애를 겨냥하고 있었다.
“보아하니까 말단 스태프 같은데, 여기서 지금 이러고 있어도 돼요? 다들 엄청 바쁜 것 같던데.”
“…….”
“촬영 준비해야죠?”
쉽게 보기 힘든 톱 여배우. 그만큼 한 마디 한 마디의 위엄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막내는 여자의 시선을 회피하며 땀에 젖은 손을 옷자락에 슥슥 닦았다.
“……전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형.”
훤히 열려있던 대기실 문이 닫히고, 여자는 희한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쟨 누구길래 민혁 씨한테 와서 저래? 생긴 건 귀여운 것 같은데, 영 감이 없네. 여기가 지 맘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인가?”
“넌 뭔데 여기 들어와.”
우뚝 선 민혁에게서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여자는 그마저도 익숙한 듯, 미소를 지으며 민혁에게로 다가섰다.
“이 대기실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여자, 정도 될까.”
“…….”
“저런 애들은 좀 내쳐. 저렇게 앞뒤 구분 없이 들이대는 애들 다 상대해주면, 민혁 씨만 피곤해진다니까.”
글쎄, 진정 상대해줄 가치가 없는 이는 따로 있지.
곧장 떠오른 말을 삼킨 민혁은 거울 앞 의자에 도로 앉으며 대본을 들었다.
“남의 촬영장에 와서 뭐하는 짓이야.”
“아…… 근처 스튜디오에 볼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여기 자기 있다길래.”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당장 꺼지는 게 좋을 텐데.”
일관되게 냉정한 말투에 여자는 탐스런 입술을 비죽였다.
“……쳇, 용건 있어서 온 사람한테 너무하네.”
문전박대 따위는 이제 별 효과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로 바짝 다가선 여자는 서늘한 손을 그의 어깨에 살포시 얹어 약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요즘 많이 바쁘지? 쉬엄쉬엄 해. 그러다 몸 상할라.”
하지만 그는 여자의 손을 탁 쳐내고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용건만 말해.”
성격 급한 건 예나 지금이나 참 여전한 남자.
속으로 웃음을 삼킨 여자가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벌써부터 소문 돌더라. 민혁 씨, 박혜정 작가한테서 신작 제의 받았다며.”
“…….”
“그것 땜에 왔어. 할 생각 있음, 하지 말라고.”
그제야 그는 반응을 보였다.
미간을 좁힌 민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정면에 놓인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여자의 손은 어느 새 그의 탄탄한 윗가슴 언저리를 뱀처럼 노닐고 있었다.
“내가 거기 들어가기로 했거든, 여주로. 난 이미 확정이니까, 빠지려면 자기가 빠져야지. 안 그래?”
“…….”
“어차피, 나랑 한 프레임 안에 담기기 싫다고 했던 건 당신이었잖아.”
거울 속의 그녀가 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다시금 몸을 일으켜 그녀를 향해 돌아보았다.
일견 아무 감흥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이면엔 뚜렷한 증오가 서려있었다.
“미안한데 이거 어쩌지. 나도 그 작품 꼭 할 생각이었거든.”
“…….”
“늦기 전에 그만두지 그래.”
하지만 여자는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오늘 벌써 기사도 다 나갔고, 그만둘 명분도 없어. 그만두면, 민혁 씨가 책임져 주기라도 할 거야?”
“…….”
“어쨌든 민혁 씨가 굳이 그 작품을 해야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랑 하는 수밖에.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그 이상한 소문이라도 좀 없애보든지. 내가 노력해 볼 테니까.”
대화가 계속될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고, 반면 여자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
“만날 선비처럼 독수공방하구 시커먼 남자들만 만나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도는 거 아니야. 그러게 신경 좀 쓰지. 내가 다 안쓰럽게.”
“…….”
“요즘도…… 관심 있는 여자 없어? 아님 설마,”
“…….”
“아직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것은 기실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에게, 아직도 자신을 향한 미련이 가득 남아있을 거라는 오만.
예상처럼 그는 인상을 쓴 채 그녀를 쏘아보았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
하지만 잠시 뒤, 남자의 입가엔 무슨 이유에선지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있나. 이제 그럴 땐 지났지.”
그리고…… 회심의 한 방.
“좋아하는 여자, 있어. 최근에 생겼어.”
너무나 태연한 그 한 마디에, 방심하고 있던 여자는 홱 눈을 치떴다.
“……뭐?”
마, 말도 안 돼. 이 남자가 어떻게 날 두고……?
“……자, 잠깐만. 그게 정말이야?”
“그럼.”
“…….”
“내가 너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민혁 씨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기억 속 언젠가,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과 닮아있는 대답. 일부러 비꼬아 말한 것이 분명한데, 정작 남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담백했다.
마치, 미련이라곤 눈곱만치도 남지 않은 것처럼.
진짠가 보다. 그녀의 얼굴은 일순 차갑게 굳었다.
분함을 애써 숨긴 혜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잘 됐네. 자기같이 목석인 남자를 꼬실 정도면, 그 여자도 꽤나 고단수인가 본데.”
“…….”
“누구야, 그 여자? 엄청나게 궁금하네.”
나른한 눈빛과 함께, 굳게 다물어진 남자의 입가에는 비웃음만이 떠올랐다.
* * *
“휴우.”
머신 앞에 서서 젖은 포터필터를 닦아내던 예원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며칠 전 그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 탓이었다.
‘제 사람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갑작스레 훅 끼쳤던 향기와 어깨를 감쌌던 체온.
민혁을 제외하면 어떤 남자와도 닿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그 날의 기억이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게 그 남잔 왜 그 상황에서 자기 일처럼 끼어들어가지구!’
저도 모르게 괜한 사장 탓을 하던 그녀는 이내 제 생각의 오류를 짚어냈다.
‘아참. 내가 먼저 시작한 거였지.’
하기야, 쓸데없이 과하게 잘생긴 사장에게 굳이 죄가 있다면 저의 장단에 너무 잘 맞춰준 죄밖에는 없을 테다.
이제 와서 내가 누굴 탓하리. 이 빌어먹을 놈의 자존심 같으니라고.
“제에발 정신 좀 차리자, 홍예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가 계속해서 시험 추출을 이어나가려던, 그때였다.
“점장님!”
뭘 하다 왔는지, 휴대폰을 손에 든 채린이 사무실에서 부리나케 뛰어나오고 있었다.
또 뭔 일이래. 예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해, 아침부터. 마수걸이도 못 했는데 벌써부터 힘 뺄 일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점장님 혹시 인터넷 보셨어요?”
“인터넷? 아니. 왜?”
채린은 웬일인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거 보세요, 우리 사장님 열애설 떴어요!”
“……뭐?”
이상하다. 왜 이렇게 느낌이 쎄하지?
예원은 포터필터를 곧장 내려놓는 대신 채린의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정말 채린의 말처럼, 포털사이트의 연예 기사란은 현민혁의 사상 첫 열애설로 들끓고 있었다.
제일 처음으로 보도된 것 같은 기사의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단독] 국민 남친 현민혁, 미모의 여성과 다정한 어깨동무 포착’?”
“완전 대박이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예원이 텍스트를 읊자, 옆에 있던 채린이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 사장님 따로 여자친구 있었나 봐요! 전 그것도 모르고 괜히 걱정한 거 있죠.”
이제야 모든 오해가 풀렸다며 꽃이 만개한 듯 싱글벙글해진 채린과 달리, 예원은 일순 패닉에 빠졌다.
‘이게…… 아니, 대체 언제 찍힌 거지?’
그녀가 기억하기로 현장엔 분명 두 민혁과 예원, 셋뿐이었다. 누구라도 있었다면 필시 기척이 들렸을 테니까.
그런데, 이 선명하게 찍힌 어깨동무 사진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사장의 얼굴은 누가 봐도 ‘이 사람이 내 여자친구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채였고, 어찌나 꽉 끌어당겨 안았는지 키도 크지 않은 편인 예원은 거의 그의 품에 안겨있는 태세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녀의 얼굴 위로 씌인 모자이크가 매우 촘촘하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잖아도 그 날, 전민혁이 어째 너무 쉽게 물러나는 것 같아 의아했었는데. 이 정도였다면 아무 말 못하고 꼬리를 내리던 그 모습도 이해가 갈 지경이다. 나라도 아무 의심 안 했겠네.
예원이 어쩌고 있거나 말거나, 그녀의 곁에 선 채린은 관련 기사들을 열심히 탐독 중이었다.
“‘일반인으로 보이는 이 여성의 정체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돌고 있으나, 측근 내지는 연인에 가까운 사이임이 확실하다는 관계자의 증언이 나온 상태다. 한편 현민혁의 소속사에서는 이 사실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알렸으며, 현민혁의 사상 첫 열애설이 사실로 인정될지에 대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와, 누굴까요. 누군지 몰라도 진짜 부러운 여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민혁의 여자친구라니……. 분명히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그놈의 전생 타령.
채린은 여전히 철저하게 가려진 모자이크를 벗겨내기라도 할 기세로, 휴대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면 그걸 보고 있는 예원의 얼굴은 그라인더에 든 원두색깔만큼이나 어두워졌다. 제게 일어난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
내가 하루아침에 현민혁의 여자친구가 되다니! 전생에 나라 구한 년이 되다니!
‘미쳤지. 이건 미친 거야!’
이게 설마 현실일 리가 없다.
순간 예원은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옆에 놓여있던 의자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 *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신문 한 부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고, 그 앞에 선 직원들은 즉시 깨갱했다.
거기엔 민혁, 그리고 모자이크에 가려진 예원의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왜 우리한테 미리 상의도 없이 기사부터 내보내? 최소한의 상도덕도 없는 거야, 뭐야!”
요즘 잠잠하던 장 대표가 이 정도로 펄펄 날뛰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그 바람에 꼭두새벽부터 사무실에 불려 나와야 했던 성환은 쩔쩔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민혁이 열애설은 워낙 희귀한 거라, 그쪽에선 무조건 내보내야 한다고 얘기가 됐나 봅니다. 게다가 이건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대중한테 못 내보낼 이야기도 아니라서…….”
“뭐, 또 그놈의 게이인가 뭔가 그 얘기?”
장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갖고 줄창 떠들어대더니, 여자 사귄다니까 이건 또 덥석 물어야겠다 싶었나 보지?”
“…….”
“하여튼 잘 나가는 놈을 골로 보내려고 작정들 하셨어. 당장 후속기사 막고, 부인부터 해.”
장 대표의 태도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단호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밀려드는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현민혁과 열애설이라니. 도통 붙어 나올 수 없는 조합이었다.
신인 시절,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민혁과 계약한 이후 이렇게 떠들썩한 일은 아예 처음이었기에, 그로서도 다른 배우들을 케어할 때처럼 이성적이지가 못했다.
그냥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
그가 속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때, 성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제게 생각이 하나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무슨 생각.”
조금 머뭇거리던 그가 대답했다.
“……저는 그냥, 부인하지 말고 인정했으면 하는데.”
“뭐?”
장 대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지금이 걔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긴데. 부인하긴 커녕 이걸 인정하자고? 지금 제정신이야?”
그러나 성환은 어딘가 확신에 찬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 그게 나을 거라고 봅니다.”
“어째서지?”
주름진 눈살을 잔뜩 찌푸린 장 대표를 향해, 성환이 설명을 시작했다.
“대표님도 아실 겁니다. 요즘 민혁이를 둘러싼 소문들이 심상치 않다는 걸요. 처음엔 이쪽에서나 암암리에 돌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꽤 널리 퍼진 모양이더라구요. 심지어 일반인들에게까지.”
“…….”
“워낙 다른 데 한 눈 안 팔고 착실하게만 지내왔던 애라, 이상한 소문이 돌아도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지내는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대표님 말씀대로 게이니 뭐니 하는 소문들…… 그게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치명타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
“요즘은 없는 열애설도 필요에 따라 일부러 만드는 시댄데,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참에 이상한 소문 같은 거 훌훌 벗고 새 출발하면 될 것 같은데요. 이미지 메이킹도 싹 다시 하구요.”
“…….”
“한 여자의 믿음직한 애인이자, 진정한 국민 남친으로 말이죠.”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으나,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나름 일리가 있는 설명이었다.
“……흐음.”
하지만…….
“아니, 그래. 다 좋다 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급’이 맞아야 냅두든가 하지. 이 여자 도대체 누군데?”
“아마, 민혁이가 최근에 맡았다는 그 카페 점장일 겁니다.”
“점자앙?”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먼.
장 대표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고, 성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만날 로봇처럼 지내던 녀석이 드디어 여자를 만나는 시늉이라도 하겠다는데.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그간 걱정 많으셨잖습니까.”
“…….”
“무엇보다, 지가 좋다는 걸 저희가 막을 순 없는 노릇이죠. 걔도 이제 사람처럼 살 때가 됐는데.”
……그 또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를 어쩐다.’
알 듯 말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장 대표의 이마에는 고심의 흔적이 더욱 깊어졌다.
바로 그때.
“……여기도 찬성.”
잘빠진 손 하나가 허공에 여유롭게 띄워졌다.
난데없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은 문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갔다.
때와 장소도 못 가리고, 만날 쓸데없이 반짝반짝 빛나기만 하는 얼굴.
“현민혁?”
다름 아닌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야! 이 시간에 네가 여긴 어쩐 일로……?”
잔뜩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는 이들에게, 남자는 예의 백만 불짜리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 그게. 중대발표를 할 일이 좀 있어서.”
* * *
“캬아.”
오늘따라 술이 달다, 달아. 별 거지같은 일을 당해서 그런가.
빈 소주잔을 탁 내려놓은 그녀는 곰장어 한 점을 얼른 입에 집어넣고는 인상을 썼다.
칼퇴근을 한 예원이 집 대신 찾은 곳은 카페 인근의 단골 포장마차였다.
아직 저녁 시간밖에 되지 않은 터라 포장마차 안은 한산한 편이었고, 그 속에서 예원은 외골수마냥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영을 불러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카페에서 일하는 지영은 지금 한창 마감 중일 것이었다.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그녀는 더 이상의 연락을 포기했다.
“……가만 있어봐.”
혹시 무슨 내용이 업데이트 되진 않았을까. 열애설 부인이라든가, 그런……?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낸 그녀는 홀린 듯이 포털사이트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역시나 그 젠장할 소식은 아직까지도 포털사이트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의 게슴츠레한 눈이 얼른 연예뉴스란의 헤드라인을 스캔했다.
[현민혁 측, 열애 사실 인정…… 이런 식으로 알려드리게 되어 죄송……]
……어라? 이게 뭐야.
일시적으로 상황파악이 안 된 그녀가 흐리멍덩한 눈을 잘게 끔뻑거렸다.
그러나 잠시 뒤, 폰을 쥔 그녀의 손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누구 맘대로 인정이야!”
예원은 번뜩 이성을 잃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혹시 술김에 잘못 본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액정 한 편을 메운 그 글자는 빌어먹게도 여전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인정은 아니라고 했었는데…….
왜 그새 인정이라고 바뀌어? 왜? 당연히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허어.”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질 않는다.
창창한 스물일곱. 아직 아홉수도 되지 않았건만, 왜 이런 재수 없는 일들만 자꾸 터지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이 불행은 ‘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그래, 틀림없어. 아니라기엔 타이밍이 너무 딱딱 들어맞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교수님의 미국행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 거였는데!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눈앞에 놓인 어묵탕처럼 펄펄 끓어올랐다.
“내가 아주 현민혁 이 인간을 그냥……!”
“날 뭐 어쩌게요.”
“……!”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비어있던 맞은편에, 정체 모를 누군가가 와 있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쓰고는, 야무지게 마스크까지 낀 남자.
“사장님?”
그는 잠시 사방을 둘러보더니, 이내 마스크를 벗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구분은 하는 거 보니까, 아직 취하진 않았나 보네.”
꼭 주량 약한 신입생 후배를 대하는 듯한 말투.
예원은 한입거리도 안 될 것 같은 술들을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쳇, 내가 겨우 이 정도 갖고 취할 것처럼 보이나?
“여기까진 웬일이세요, 바쁘신 분이.”
도로 자리에 앉은 그녀에게선 저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투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그는 며칠간 카페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오늘 그가 여기 나타났다는 건, 분명 그 말도 안 되는 열애설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뭔가 얘기할 것처럼 무척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쁜데, 그래도 홍예원 씨한테는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뭔데요.”
하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놨으면 뭐라도 할 말이 있겠지.
예원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소주잔을 들었다.
“홍예원 씨.”
“…….”
“나랑, 결혼 한 번 해볼래요?”
……잠깐만. 뭐라고?
“……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정통으로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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