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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5화 (5/102)

5화. 저 남자야, 내 애인

2018.04.20.

“……지금 장난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민혁은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성환은 그의 반응이 우스운 듯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형? 자기 일 아니라고 진짜.”

“야, 왜. 괜찮잖아, 그거.”

사실, 그저 장난 같은 말은 아니었다. 저 녀석에게 꽤 오래 전부터 해주고 싶었던 말.

성환은 금세 웃음기를 거두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현민혁. 나 진짜 농담 아니다. 괜찮은 여자 있으면 진짜 연애해. 네 나이도 벌써 서른하난데.”

“…….”

“요즘은 그런 거 딱히 흠도 아니더라. 오히려 애인한테 잘하는 모습 보여주면 그것 땜에 인기가 더 올라가기도 하던데, 뭐. 유부남들도 얼마든지 남자주인공 턱턱 맡는 판에, 뭐가 문제냐.”

……그런가.

졸지에 민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영 틀린 소리도 아닌 것이다.

여자와의 연애.

성환의 말마따나, 게이가 아님을 증명하는 데 그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연애는 무슨.”

지금의 그는 확실히, 한가롭게 연애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고 싶은 맘도 전혀 없었다.

문득, 아까 전 수진의 말과 얼굴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 너랑 결혼할 사람 좀 보고 싶어.’

실은 그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이미 코앞으로 다가와 있음을.

췌장암. 완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설레게 했던 그것은, 다시금 재발해버린 이후 마지막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의사는 생존기간이 아무리 길어봐야 6개월 정도일 거라고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위어가고 있는 수진을 위해서라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짐이었다.

연애도 아니고 다짜고짜 결혼이라니. 그게 과연 가당키나 한 말인지.

‘연기’는 배우에게 있어 평생 따라다니는 숙제와도 같다지만, 그에겐 결혼보다야 차라리 연기가 백배는 쉬울 판이었다.

멜로 전문 배우로서 아무 감정 없는 애정신을 무수하게 찍어왔다. 하지만 어떤 여배우와 연기하든, 정해진 분량만큼 딱 찍고, 뒤돌아서면 바로 끝인 관계를 유지해온 그였다.

결혼도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당장 실행에 옮겼을 텐데.

나를 절대 좋아할 일 없는 여자와, 딱 정해진 시간만큼만 연기하고 빠이빠이한다면…….

그런다면…….

“……!”

……잠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아냐, 아무것도.”

그의 이상스런 반응에, 성환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곤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잘 생각해봐. 루머는 말 그대로 루머란 걸 보여주자고. 별로 나쁠 것도 없잖아.”

“…….”

“……‘조혜인’한테도, 보란 듯이 보여줄 수 있고.”

‘조혜인’이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룸미러를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렇게 하나, 둘, 셋.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늘 그렇듯이, 먼저 피한 쪽은 민혁이었다.

이제는 제 스타의 눈빛만 보아도 심경을 훤히 알 수 있기에, 성환은 2절까진 하지 않기로 했다. 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하여튼. 결정은 네가 해라. 그렇게 또 까이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사는 거고.”

“…….”

민혁의 날선 눈빛이 또 한 번 성환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내 예의 시니컬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입술을 지그시 감쳐문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 * *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이젠 아예 입에 붙어버린 멘트와 함께 캐리어에 담긴 커피 두 잔이 픽업대에 올려졌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예, 그런데 저…….”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예원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그제야 남자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여기 원두가 어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또 오랜만이네.

약간 의외였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원산지를 말씀하시는 거면 딱 어디 거라고 말씀드리기가 애매해요. 여러 군데 것이 섞인 블렌딩 원두라서요.”

“아, 그래요?”

남자가 머쓱한 듯 살짝 웃었다.

웬만한 남자연예인은 쌍 싸대기를 후려칠만한 미소였다.

“실은, 제 아내가 여기 커피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그럼 혹시 따로 구입할 수도 있나요?”

“아, 예. 원두만도 따로 판매하고 있구요. 더치커피 원액도 원하시면 구매 가능하십니다.”

남자는 궁금했던 점이 풀린 듯 미소를 지으며 캐리어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 다음엔 원두 사러 와야겠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다정히 대답을 마친 남자는 주머니에서 진동하고 있던 휴대폰을 얼른 꺼내들더니, 전화를 받았다.

“네, 은수 씨. 방금 커피 샀어요. 아니, 지금 곧 갈 테니까 기다려요. 네. 은성이는 별 일 없죠…….”

팔불출스러운 통화내용과 함께 그가 매장을 빠져나갔고, 그냥 넘기기엔 너무나 멋진 그 자태에 예원은 속으로 감탄했다.

‘와, 진짜 잘생겼네.’

“……겁나 잘생겼다, 진짜.”

어라?

누가 제 속마음을 그대로 더빙해주는가 했더니, 출입문 쪽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채린이 그 주인공이었다.

예원은 남자의 뒷모습을 좇던 것도 잊고 픽 웃었다.

“뭐야. 너 저 손님 알아?”

“알죠, 그럼.”

채린의 손가락이 회사들이 밀집된 앞쪽 단지를 가리켰다.

“아마 조~ 앞에 라프레즈 직원분이실 걸요.”

헐, 얘 좀 봐.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채린은 도리어 그걸 왜 모르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분 단골이잖아요. 만날 봐서 알죠. 보통은 아침에 오시던데, 오늘은 웬일로 저녁에 오셨네.”

“그래?”

그럼 나도 분명히 봤을 텐데, 왜 난 기억이 안 나지.

어쨌든 저렇게 잘생긴 남자라면 기억해두는 것이 인간적으로 옳은 것이다.

예원이 혹시나 하고 제 머릿속을 더듬어보는 사이, 입맛을 쩝쩝 다신 채린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멋진 남자가 저렇게 많은데, 왜 그 중에 솔로는 없는 걸까요.”

우문.

“그야, 네가 찾기 전에 발 빠른 여자들이 다 채갔으니까 그렇겠지.”

현답.

“……아.”

과장되게 탄식을 흘리는 채린을 보며 예원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좀 빨리 움직이지 그랬어.”

“……아이씨, 뭐 괜찮은 남자가 보여야 움직이든 말든 하죠.”

“참내. 네 기준에 괜찮은 남자는 도대체 어떤 남잔데? 얼마나 대단한 남잘 찾는데 그래.”

잠시 멈칫하던 채린은 이내 수줍게 설명했다.

“……아니 왜 좀…… 보기만 해도 두근두근하고, 설레고! 그런 남자 있잖아요. 방금 전 그 손님이나, 점장님 남자친구 같은 분들.”

“…….”

“아님 우리 사장니임…….”

그런데, 한창 신나서 말하던 채린은 별안간 ‘사장님’이란 대목에서 말끝을 흐렸다.

“사장님……도, 괜찮긴…… 한데.”

……뭐야. 끝맺음이 왜 저래?

뭔가 이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실물 한 번 본 적 없는 사장에게 무척 열광하던 채린이 아닌가.

그런 것치고는 무척 미적지근한 반응에, 별 생각 없던 예원은 급 호기심이 생겼다.

“괜찮긴 한데? 뭐가 문젠데.”

그녀를 슥 한 번 쳐다본 채린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텐 기회가 없을 테니까, 다 소용없죠.”

물론 연예인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런 비관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아니, 네가 뭐 어때서. 혹시 아냐? 사장님 취향이 너 같은 애일지.”

“……아니에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참내, 왜. 어디서 들은 거라도 있어? 취향이 좀 남다르게 독특한가?”

“……그게요…….”

평소답지 않게 미적거리는 모습이 영 수상쩍다고 느껴질 무렵, 채린이 입을 열었다.

“실은, 제 친구의 언니의 아는 친구가 방송 쪽 일을 하는데요.”

듣기만 해도 복잡한 관계에 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며칠 전에 제가, 우리 카페 사장님이 현민혁이라고 친구한테 막 자랑했거든요. 근데, 걔가 딱 그러는 거예요.”

“뭐라고.”

잠시 머뭇거리던 채린이 누가 들을세라 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그 사람…….”

“…….”

“남자 좋아한다고요.”

……?

“뭐?”

일순 어안이 벙벙해진 예원은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그게, 저도 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은데……. 걔 말론 그쪽 업계엔 이미 소문이 파다하대요. 그래서 가끔 캐스팅도 까이고…… 만나는 사람도 죄다 남자들밖에 없다고…….”

“……정말?”

“네, 암튼 걔 얘긴 그랬어요.”

“…….”

“근데 그 얘기 들으니까, 갑자기 본 적도 없는 사장님이 되게 안쓰러워지는 거 있죠. 에휴, 사장님처럼 멋진 분이 어쩌다 그렇게 힘든 사랑을…….”

말을 하다 만 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다들 알면서 쉬쉬하는 분위기래요. 그러니까 점장님도 혹시나 사장님 앞에서 아는 체 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어어.”

이럴 수가. 예원은 순간 말도 못하게 혼란스러워졌다.

전 남자친구의 비밀을 알게 된 지 불과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새 이렇게 또 다른 한 명의 비밀을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그것도 1년간 사장으로 모셔야 하는 남자의 비밀을!

‘아니, 민혁이란 이름에 뭐가 있는 건가. 내 주위 민혁이들은 어째서 죄다 게이인 거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예원은 뭔가가 탁 걸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제가 실제로 만났던 그에게선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던 탓이었다.

행동이나 말투나, 여자에게 살가운 타입은 분명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성적 취향이 그쪽이라면 무슨 느낌이 오지 않았을까. 직감적으로.

“…….”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저의 현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10년 동안 같이 지낸 놈의 정체도 몰랐는데. 첨 본 사람의 성적 취향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볼 수 있었겠어?’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그 소리에 뭔가 더욱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은 확실히 겉으로만 봐선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녀에게 그런 걸 판별할 눈이 있었다면 이런 꼴이 되기 전에 진작 결판을 냈을 터였다.

아무튼 간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람이 이상하리만큼 꺼림칙하게 느껴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사람을 아주 못 살게 구는 놈인 건 차치하더라도.

“근데 사장님은 진짜 한 번을 안 오시네요. 이젠 오실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참!

한창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는 채린이 내뱉은 한 마디로 인해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사장님 오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언제요?”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 밤에?”

“헐!”

채린은 얼른 자그마한 손거울을 꺼내들고는 제 모습을 재빨리 살폈다.

“그런 거였음 진즉에 말씀해주셨어야죠! 아, 오늘 상태 완전 거지같은데. 어뜩하냐…….”

뭐야, 이제 와서 왜 저래?

“어차피 기대도 안 한다며. 그러면서 꽃단장은 왜 하는데?”

“아이, 그래도! 일단은 잘 보여야죠. 괜한 헛소문일 수도 있잖아요.”

“…….”

으이구. 못 말려, 하여튼.

부산하게 입술화장을 고치는 채린에게서 미련 없이 눈길을 거둔 예원은 무료하게 트레이를 닦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언제쯤 오려나, 그 인간은.

* * *

저녁쯤 도착할 거라던 사장은 결국 마감시간까지도 오지 않았다.

그럴 거면 올 거라고 얘기나 하지 말든지. 잔뜩 설레어했던 채린만 불쌍해진 꼴이었다.

하여간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아이고.”

아쉬워하는 채린을 일찍이 퇴근시킨 뒤 홀로 마감을 끝내고 나오던 예원이 신음했다.

손님이 딱히 많았던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리 몸이 찌뿌둥한지 모를 일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거짓말처럼 그녀의 눈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예원아.”

목소리와 향기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그게 누군지.

“…….”

전민혁.

예원은 그 자리 그대로 굳은 채,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민혁은 그녀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그녀의 앞으로 척척 다가서고 있었다.

잠잠하던 마음에 갑작스레 돌풍이 이는 것 같았다.

“……뭐야, 너.”

“예원아.”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와.”

“…….”

“다신 내 눈 앞에 띄지 말라고 말했잖아.”

‘당장 안 꺼져?’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눈을 보며, 민혁은 조용히 말했다.

“……다시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후회돼서…….”

“…….”

“그 날은 나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네 입장을 생각하질 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예원아.”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예원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필요 없어.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지니.”

그런다고 날 속인 네 과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상종하기도 싫어서 얼른 지나쳐가려는 그녀의 팔뚝을 민혁이 휙 잡아챘다.

“예원아.”

“놔. 안 놔?”

“제발! 내 얘기 좀 들어줘.”

민혁은 기어코 예원을 제게 돌려세운 뒤 애절하게 소리쳤다.

“나 다신 안 그럴게. 실수였어. 앞으론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어?”

또 무슨 개소리야, 이건.

예원이 실소하며 물었다.

“왜, 게이인 걸 숨기고 살기라도 하게?”

“어.”

“…….”

“원래도 그럴 작정이었어. 그날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넌 그게 이제 와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니?”

“결혼 준비 다시 하자.”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녀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뭐?”

“나 너랑 못 헤어져. 아버지랑 엄마도 이젠 너 아니면 안 된다시고.”

허, 이 새끼가 정말 갈수록……?

이쯤 되면 그는 정말 막나가기로 작정한 게 분명했다. 사람이 개수작을 부려도 정도가 있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뿌리치고 가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팔뚝을 쥐고 있는 힘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욱 거셌다.

이래가지곤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은데…….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일하는 동안 굳어있던 머리를 잽싸게 굴렸다.

전민혁을 단번에 퇴치할 수 있는 방법…… 남자를 좋아하는 전민혁을…… 남자…….

‘아, 그렇지!’

순간 기막힌 방도를 떠올린 그녀가 반짝 눈을 빛냈다.

맞아, 그 정도면 당연히 떨어지겠지. 내가 그렇다는데 지가 뭐 어쩔 거야.

예원은 얼른 표정을 고쳐 태연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하, 근데 이거 어쩌지.”

“…….”

“난 벌써 남자 생겼는데.”

“……뭐?”

예스!

금세 얼이 빠진 표정을 짓는 민혁을 보며, 예원은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아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왜. 넌 딴 남자 만나도 되고, 난 안 되니?”

무덤한 표정의 예원이 계속해서 뇌까리자, 민혁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졌다. 그로선 아마 전혀 예상치 못한 수였을 것이었다.

그 사실에 고소해하느라, 그녀는 미처 간과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임기응변엔 아주 크나큰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아니, 어떻게 그새…….”

“…….”

“누군데, 그게.”

“……응?”

잠깐만.

행간을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민혁의 역공에 예원은 멈칫했다.

‘어…… 이것까진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그저 홧김에 내뱉고 본 말이다. 자세한 생각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었다.

당황한 예원의 눈동자가 또로록 굴렀다.

“나랑 헤어진 게 언젠데, 어떻게 그새 새로운 남자를 만나냐고. 누군데. 대체 어떤 놈이야.”

“…….”

“누구냐고, 그 자식이!”

“……어, 그, 그게…….”

그녀로선 사실 이런 추궁을 당할 이유가 없는 입장이었지만, 거짓말이라 그런지 영 태연하게 굴 수가 없었다.

아나, 어쩌지.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고.

그렇게 다급히 눈알을 굴리던 예원의 시선이, 문득 먼발치에 선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은 일순 구세주를 찾은 양 밝아졌다.

“……저 사람!”

미처 깨닫기도 전에,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움직여 남자를 가리켰다.

“저 남자야! 내 애인.”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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