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4국 - 집요한 협상가
지금까지의 정도찬은 자신이 상대의 의도를 잘 파악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정도찬은 상대가 두는 수를 보고 상대가 무슨 의도로 그 수를 둔 것인지 파악하는 것에는 자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의도가 반상 위에서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의도가 아닌, 반상 밖에서 무엇인가를 노리는 것이라면 정도찬은 그 의도를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상대가 ‘세력을 굳히려고 한다,’ ‘대마를 잡으러 들어온다,’ 등의 의도는 쉽게 파악하지만 ‘정도찬의 멘탈을 흔든다.’라는 의도는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정도찬은 자신의 벽을 보고 바둑을 두는듯한 태도는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대국에 임할 때 반상 위의 판도뿐만이 아닌 상대의 의도를 읽는다.
정도찬은 의식적으로 상대의 의도를 읽기 위해 바둑판과 정휘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정도찬이 천재라고는 해도 그런 식으로 쳐다본다고 해서 갑자기 무엇인가달라질 리가 없었다.
결국, 중요한건 이것이었다.
역지사지.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라.
말은 쉽지만 정도찬의 입장에서 이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
‘또 바둑판만 쳐다보고 있었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국면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초반부 포석 구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자 정도찬 자신도 모르게 대국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도찬을 아는 사람이라면 항상 그의 장점 중 하나로 언급하는 집중력.
그 집중력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랜 시간 걸쳐 들인 습관을 고치는 것.
쉽지 않은 일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정도찬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정휘운도 이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 인간미는 있어야지….’
이제야 자신의 친구가 조금 사람 같아 보였다.
약점이 뭔지 깨달았다고 그것을 바로 고쳐버리면 그게 인간인가? 인간의 모습을 한 무언가지.
어쨌든 정휘운은 아직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국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휘운은 다른 대부분의 바둑기사와 같이 성격과 기풍이 일치하는사람이었다.
‘유들유들함.’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뻔뻔하게 다가가 친한 척 굴 수 있는 정휘운의 이 성격이 그의 바둑에 반영되자, 끊임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협상을 요구하는 상대하는 사람 입장에서 상당히 귀찮은 기풍이 되었다.
정도찬의흑 돌이 5선 굳히기에 들어간 정휘운의 백 둘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형씨! 선 넘었어! 방 빼!’
잠시 고민하던 백 돌이 대답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여기까진 봐줘.’
흑 돌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백 돌을 쥐어박으며 말했다.
‘이거 다 넘겨주면 내가 굶어 죽게 생겼는데?’
‘알았어, 내가 여기까지는 양보할게.’
백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4선 세력의 약 서른 집 규모의큰 집이었다.
정도찬의 흑 돌이 그 꼴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고만 있을 리는 없었다.
‘혹시 선생님의 양심은 바겐세일 중인가요?’
흑 돌이 한 칸 더 전진하자 백 돌이 기겁하며 응수했다.
‘야 이 나쁜 놈아! 나도 내 몸 뉠 곳은 있어야지!’
백은 감정에 호소했지만, 흑은 냉정했다.
‘서른 집이면 반상 위에서는 반포자이나 다름없는데 무슨 소리야? 너무 욕심부리지 마쇼.’
결국, 백은 피눈물을 흘리며 한 칸 더 아래로 내려앉았다.
3선 세력의 스무 집 규모의 비교적 아담해진 집을 보며 백이 이를 갈며 말했다.
‘반포자이는 아니더라도 한강뷰는 포기 못 해!’
‘쓰읍…. 아직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다 이 악마야!’
정도찬은 아담해진 백의 집을 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자신도 충분한 이득을 본상태여서 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프로바둑기사는 실제로 이쯤에서 손을 빼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휘운이 정도찬을 잘 아는것처럼, 정도찬 역시 정휘운을 잘 알고 있었다.
정휘운이 군말 없이 넘어가는 협상은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유리한 협상이라는 사실 역시.
흑은 은근슬쩍 스무 집을 확보하려는 백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말했다.
‘동작 그만, 밑집빼기냐?’
‘뭐야?’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고.’
백은 억울하다는 듯 대응했다.
‘무슨 소리야? 증거 있어?’
‘증거? 증거 있지. 너는 내게 스무 집을 가져가겠다고 이 이상 양보할 수는 없다고, 이미 충분한 손해를 봤다고 이빨을 깐 것이여. 그런데 여기 이거 뭐야? 이거 팻감 아니여?’
‘그 정도 팻감은 어디서든 나오는 거잖아!’
백이 억울하다는 듯 집을 지키기 위해 타개하자 흑이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다시 찌르고 들어가며 추궁했다.
‘그리고 여기 짱박혀있는 이건 또 뭣이여 여기 숨겨둔 선수 끝내기 반 집짜리로 이 판을 반집 승으로 끝내겠다. 이거 아니여?’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색기가!’
자신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들키자 백이 흑을 위협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흑은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이빨을 드러낸 백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괜히 덤볐다가 안 맞아도 될 부분을 치중당한 백은 흑에게 제안했다.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레?’
흑이 상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흑은 가차 없이 백 집을 폭파했다.
5선의 마흔 집 이상에서 시작된 세력 다툼이 고작 3선에서 열 집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돌파력이었고, 이 싸움으로 전체적인 판도가 흑에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면이 흑에게 유리해졌다고 손을 놓아버릴 수는 없는 법.
정휘운의 백 돌이 복수를 다짐하며 정도찬의 흑 세력에 침투했다.
흑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응수했다.
‘뭐야?’
‘나다….이 씹새끼야…. 백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뭐라는거야 미친놈이.’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백은 확실하게 흑 세력에 타격을 입혔다.
흑 세력의 손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대마가 반으로 뚝 갈라져 한쪽이 곤마(곤란한 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백은 다시 한번 흑 대마를 끊으며 말했다.
‘왼쪽 대마, 너는 나가…. 뒤지기 싫으면.’
‘...고맙다.’
아무리 정도찬이라도 양곤마가 발생하는 것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순순히 발을뺐다.
승부의 행방을 가를 이 대국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국면을 읽은 정도찬은 생각했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사는 게 더 중요하다.’
세력을 얼마나 유지하면서 살릴 수 있느냐, 그것이 관건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기껏 흑 대마를 살려놓고 집이 부족하여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휘운 역시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마를 잡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휘저을 수 있느냐가 문제야.’
대마불사, 대마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정휘운은 굳이 무리해서 대마를 잡으려 들기보다는 흑 대마를 압박해서세력을 폭파할 작전을 세웠다.
정휘운이 이끄는 백 별동대는 훌륭하게흑 세력을 휘저었다.
흑 대마를 압박하고, 강하게 맞서면 유유히 도망간다.
외곽에서 어슬렁거리다 한순간에 중앙으로 침투한다.
공격을 당할 때 끊임없이 협상을 요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집요하게 공격해오는 것이다.
그래, 사람 성격에 어찌 한 가지 면모만 있겠는가.
정휘운은 수비하는 입장에 있을 때와 공격하는 입장에 있을 때의 기풍이 다른 바둑기사였다.
백 별동대의 집요한 공격에 흑 세력에 조금씩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도찬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어차피 흑 대마를 살리는 순간 멈출 공격이었으니,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도찬은 최대한 가드를 올리고 몸을 웅크렸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결국, 흑대마가 살아나고, 백의 별동대 역시 더이상 싸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뒤로 빠지자 전체적인 국면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정휘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돌을 던졌다.
흑의 승리였다.
TH 칼텍스배 전국 기전 16강
C조 제2국
흑 정도찬 백 정휘운
165수흑 불계승
세트스코어1:1
승부는 다음 날로 미뤄졌다.
#
다음 날.
제 3국 역시 정도찬의 승리로 끝났다.
자신의 모든 기량을 발휘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보여준 정휘운이었지만, 아직 정도찬이 한 수 위였다.
세트스코어 2:1 정도찬의 8강 진출이었다.
패배의 아픔이 쓰라리긴 했지만 의외로 정휘운은 공과 서의 구분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바둑기사 정휘운은 언젠가 정도찬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지만 정도찬의 친구 정휘운은 정도찬의 8강 진출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하지만 막상 8강에 진출한 정도찬의 마음은 개운하지만은 못했다.
그의 친구를 이기고 올라가서 찝찝하다는 그런 바보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여름방학 숙제를 받은 학생이 된 기분을 느낀 탓이었다.
‘상대를 의식하며 대국을 둔다.’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일이 어째서 이렇게 힘든 걸까.
정도찬은 3국을 둘 때도 전혀 정휘운을 의식하지 못했다.
초반부 포석을 둘 때는 그래도 가끔 의식적으로 정휘운을 쳐다봤는데,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자 다시 바둑판에 얼굴을 처박아버린 것이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루 이틀 만에 고쳐질 습관은 아닌 듯싶었다.
‘숙제가 너무 빡세네...’
어쨌든 정도찬 2단 8강 진출.
우승까지 남은 상대는 단 세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