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3국 - 블라인드 사이드
무난한 포석이 진행된 이후, 흑을 잡은 정휘운이 본격적으로 판도를 뒤흔들자 놀랍게도 정도찬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무엇을 하기도 전에 맥이 끊기는 느낌이었다.
‘까다롭다.’
정도찬은 예상치 못한 정휘운의 한 수 한 수에 진땀을 빼며 상황을 타개해나갔다.
하지만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함정에 빠진 동물처럼.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휘운이 실력이 이 정도였던가?’
어쩌면 정도찬 자신은 자신의 친구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친구들 역시 영속 명인 신창연이 선택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간과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너무 가까운 사이였기에 오히려 제대로 실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32강에서의 승리로 정도찬 자신이 너무 오만해졌던 것일지도 모르지.
갑조리거를 쉽게 이겼다고. 갑조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의 친구들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방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도찬은 자신이 방심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정휘운은 국면이 진행되며 자신이 준비해온 ‘무기’가 제대로 먹히고 있음을 파악하며 안도했다.
정휘운이 생각하는정도찬은 바둑기사로서 가져야 할 모든 능력을 골고루 갖춘 넓은 육각형의 바둑기사였다.
시야, 수읽기, 가치판단, 형세판단, 꼼꼼함, 집중력 등등….
뭐 하나 부족해 보이는 것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파고들 구석이 없어 보이는 완전무결한, 아니,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스타일.
하지만 그런 정도찬이 사제동행전에서 한세빛의 ‘사석의 묘’에 그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단순히 그 대국이 온전한 정도찬의 대국이 아닌 옆에 김수정이 있었기에 정도찬이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상대가 그 한세빛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그 대국을 몇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고 돌려보는 과정에서 정휘운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국이 진행되는 한 시간 정도 남짓의 시간 동안, 정도찬은 바둑판만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휘운이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순수하게 정도찬의 집중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초단 대회의 영상과 32강전의 영상까지 모두 보고 나자 정휘운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도찬은 그 어떤 순간에도 상대를 바라보지 않았다.
마치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건 아무리 봐도 ‘사람’과 대국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인공지능’과 대국을 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아니, 보면 볼수록 확실했다. 정도찬의 태도는 감정도 없고 실체도 없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인공지능과 대국을 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정휘운은 생각했다.
‘트라우마 때문인가?’
상대를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정도찬이 트라우마를 극복한 방법이었던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사제동행전 1국에서 정도찬이 보여준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 대국은 정도찬이 대국 도중 유일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본 대국이었고, 그 와중에도 바둑 자체는 제대로 두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이건 정도찬의 습관이다.
그것도 아주 나쁜 습관.
생각해보면 트라우마로 인해 사람과의 대국을 꺼리던 정도찬이 제대로 상대할 수 있었던 건 인공지능뿐이었다.
덕분에 정도찬은 몇 년이 넘는세월 동안 인공지능과 대국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의 습관 때문에 트라우마를 극복해 사람과 대국을 하고있는 지금도 상대를 인공지능처럼 대하는 것이다.
이 말인 즉….
‘도찬이의 약점은 심리전이다.’
초단 대회 때 정도찬을 제대로 흔들었던 하윤서는 기풍이 특이한 것도 있지만 그 특이한 기풍 때문에 정도찬의 멘탈이 흔들렸다.
사제동행전 제2국 ‘사석의 묘’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인공지능이라면 절대로 자신의 돌을 키워서 일부로 죽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정도찬은 그 의도를 파악하기위해 사석에만 집중했고, 결국 자신의 대마가 위협받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정도찬은 대국에 임하며 자신의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파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신 국면 전체를보는 시야로 그 단점을 커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찬에게 바둑은 스스로와의 싸움이며, 대국을 둘 때의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다.
비록 그 우물이 더럽게 넓고 깊기는 했지만.
‘인공지능의 수와 사람의 수 그 어딘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인공지능의 5순위 수인 옐로우 스팟.
그곳이 정도찬의 약점이다.
정휘운은 또다시 미묘한 자리에 흑 돌을 놓았다.
그 수를 본 정도찬의 가치판단이 충돌했다.
인공지능과 친한 정도찬의 의식은 한번 발을 빼고 세력을 보강하는 것을 권했다.
하지만 사람의 수를 보는 정도찬의 의식은 바로 응징하는 것을 권했다.
차라리 한쪽이 조금이라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면. 한쪽의 가치가 높거나 낮은 게 확실했다면.
정도찬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선택지의 가치가 비슷해 보이는 지금, 정도찬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정도찬은 고민 끝에 흑 돌을 응징했다.
보통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 돌을 응징하면 기분이 좋았는데 이번에는 맛이살지 않았다.
보강하지 못한 세력이 계속 눈에 밟혔고, 아니나 다를까 흑 돌이 기다렸다는 듯 그곳을 찌르고 들어오자 정도찬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미묘한 가치의 두 개의 선택지를 강제로 쥐여주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곳을 보란 듯이찌른다.
긴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한 곳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찔리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데 아무리 정도찬이더라도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바둑 좆같이 두네….’
정휘운이 들었다면 ‘극찬 감사.’라고 대답했을 생각을 하며 정도찬은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고 대국에 집중했다.
정도찬의 멘탈은 조금씩, 확실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도찬은 정도찬이었다.
상대의 생각 따위 못 읽으면 어쩌라는 것인가.
상대의 모습을 눈에 담지 않고 있을지언정 그의 눈에는 반상 위의 판도 전체가 담겨있었다.
또한.
때로 극한에 다다른 전술은,
전략을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었다.
‘미친놈….’
정도찬이 들었다면 ‘칭찬감사!’라고 대답했을 생각을 하며 정휘운은 자신의 계산이 조금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흔들면 빈틈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상황에서도 잘만 버틴다.
지금 당장은 정휘운 자신의 우세이지만 그 와중에도 정도찬은 조금씩, 확실히 따라오고 있었다.
‘역시 기본기 차이는 어쩔 수 없나….’
정휘운 역시 고작 그런 사소한 약점 하나 찾았다고 정도찬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약점을 찌르는 것은 손이 닿을지 안 닿을지 모르는 정도찬이라는 상대를 자신의 눈앞까지 끌어내리기 위한 용도였다.
결국, 지금부터는 실력 싸움이었다.
‘이기고 싶다. 아니 이긴다!’
트라우마로 오랫동안 고생한 정도찬에게 지금 이 자리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저 바라만 보던, 꿈의 무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던 것은 정도찬만이 아니었다.
정휘운 역시, 전심전력을 다 해 정도찬과 싸울 수 있는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정휘운은 아직도 기억한다.
정도찬에게 처음으로 진 순간을, 폭력에 가까운 재능을 보며 부러워하던 감정을. 바둑을 그만둬야 하나 고뇌하던 순간을.
정도찬이 그의 목표가 된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끝내기 국면에 접어들고 그저 조용히 수순이 이어졌다.
국면이 애매했다.
‘반집…. 이겼나?’
정휘운은 자신이 이긴 것인지 진 것인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휘운의 눈은 그가 유리하다는 사실을 담았지만, 머리가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정휘운의 길 앞에서는 항상 정도찬이 먼저 걷고 있었다.
정휘운은 항상 그 등을 보며 걸었다.
그래서 어쩌면…. 평생 따라잡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등만 보고 걸어가는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어디까지 걸어왔는지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야 드디어 정휘운은 자신이 어디까지 걸어왔는지 깨달았다.
‘잡았다.’
TH 칼텍스배 전국 기전 16강
C조 제1국
흑 정휘운 백 정도찬
241수 흑 반집 승
세트스코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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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시간.
조용히 1국을 복기하던 정도찬은 생각했다.
‘완전히 당했네.’
바둑을 두다 보면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저기만큼은 상대가 두지 않았으면좋겠다.’ ‘저긴 진짜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는 곳에 상대방이 기가 막히게 둬 버리는 그런 순간이.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승률만은 바라보는 인공지능은 이런 ‘상대’를 짜증 나게 만드는 수를 거의 두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현대의 바둑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휘운은 얄미울 정도로 그런 수를 골라서 두는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골라서 두고 있는 걸지도 몰라.’
한두 번이었다면 정도찬도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은 우연이더라도 세 번은 필연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다섯 번, 아니 후반부에 그가 무시하고 넘어간 것까지 합치면 여섯 번 이상이다.
그런 국면이 우연히 여섯 번이나 나왔다고?
이건 분명히 정휘운이 의도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정도찬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답은 간단했다.
정도찬이 대국을 할 때 지금 복기를 하는 것처럼 반상 위의 국면뿐만이 아닌 정휘운이 무슨 생각을 하며 바둑을 두고 있는지를 생각했다면 이 정도 노림수를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도찬은 그러지 못했으니….
‘이게 내 약점이었구나.’
정도찬이 자신의 약점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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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C조의 2국이 시작되었다.
정도찬은 더 이상 바둑판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자세를 곧게 하고, 자신을 쳐다보는 정도찬의 모습을 보며 정휘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조금 잡았다 싶으면 어느새 훌쩍 앞으로 나가 있다.
정휘운은 속으로 자신이 애써 파악한 정도찬의 약점에 대한 모든 정보를 파기했다.
아쉽지만 어차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무기다.
두 판 정도는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래서 천재라는 새끼들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져줄 생각은 없었다.
정휘운은 전의를 다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역시 영속 명인에게 인정받은 재능을 가진.
한 명의 ‘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