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50국 - 수순의 묘 (52/75)



〈 52화 〉50국 - 수순의 묘

수많은 카메라, 수많은 시선.

정도찬은 마치 세상의 중심이  곳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게 메이저 기전….’

정도찬이 해설을 했던 퓨쳐스 리그의 대국이나 처음 참가해본 대회인 초단 대회,그리고 주목도는 높았지만 결국은 이벤트 전이었던 사제동행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국의 바둑팬 대부분이 이 대국을 주시하고 있다.

어쩌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 마냥 과장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순간 바둑계의 중심은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조명이 뜨겁다.’

정도찬은 자신의 집중력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계속 다른 잡생각이 떠오르고 바둑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이래서 대회에만 나오면 죽을 쑤는 실력 있는 프로바둑기사들이 있는 거구나.

정도찬은 이제야 조금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게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자리는 정도찬이 그토록 염원하던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제야 조금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도찬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비록 주어진 40분의 시간에서 5분의 시간을 생으로 날려 먹었지만, 손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드디어 국면이 눈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반쯤은 관성으로, 그동안 쌓아 올린 기본기로 둔 포석의 형태는 나쁘지 않았다.

반면의 형세는 비슷비슷해 보였으니 덤을 받는 백이 유리한 국면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백을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도찬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할만해.’

안도감과 당혹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반쯤 얼이 빠진 상태에서 두었는데도 국면이 좋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고.

당혹감은….

‘내가 잘 두는 건가?’

정도찬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문이었다.

초단 대회에서 만난 상대들은 상대하기 쉬웠지만 하윤서를 상대로는 잠시 고전했었다.

한세빛과의 두 번의 대국은 상대가 다름 아닌 한세빛이었으니 어찌 보면 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친구들은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상대해봤기 때문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 이기든 지든 딱히 별 감상이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보편적으로 ‘강자’라고 인정받는 사람을 상대로 유리한 국면을 가져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정도찬은 자신의 실력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강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그럼 하윤서 초단은 대체 뭐지?’

아니, 아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도찬은 온전히 바둑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변화가 시작되었다.

침투는 가볍게, 싸움은 두텁게.

응수는 경쾌하게, 타진은 묵직하게.

이택윤이 정도찬을 강자라고 판단한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100수 정도를 두었을시점에는 엇비슷했는데, 150수에 가까워지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무리 봐도 흑을 잡은 이택윤 자신이 불리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택윤은 답답했다.

‘미치겠군, 딱히 실수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저 어느새 이렇게 돼 있었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늪 바둑? 차라리 늪이었다면 늪에 빠지고 있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발버둥이라도 쳤을 것이다.

이것은  바둑과는 다른 조금 더 고차원적이고 악질적인 무언가였다.

상대를 한없이 편하게 만들고, 정신을 차리기 전에 숨통을 끊는….

안락한 죽음을 선사하는 바둑.

이택윤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이건 이미대세가 기운 대국이었다.

‘그래도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만으로 돌을 던질 수는 없었다.

따악-

충분히 살  있는 자신의 흑 대마를 위험에빠뜨리는 대가로 백에게 위험을 감수할 것을 강요하는 멋진 승부수였다.

정도찬의 고민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흑 대마는 놓쳐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백 요석들이 잡히는 건 위험했다.

선수를 넘기더라도 중요한 돌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흑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니 마음에 안 들었다.

정도찬은 다음 수를 엉뚱한 곳에 착수했다.

싸움이 벌어진 곳은 좌상귀인데, 뜬금없이 우하귀를 찌른 것이다.

하지만 이택윤이 대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찔린 곳을 두고 보다간 우하귀 흑집 전체가 폭파당할 수도 있었고, 이는 누가 봐도 백 요석을 잡는것보다  큰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 수를 본 이택윤은 생각했다.

‘시간 지연책인가?’

프로바둑기사들은 가끔 생각이 길어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당연한’ 수를 두고는 했다.

이를 시간 지연책 혹은 시간 연장책이라고 불렀는데

보통은 초읽기에 몰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을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이택윤은 혹시나 해서 정도찬의 계시기를 확인했지만 정도찬은 아직 10분이 넘는 시간이 있었다.

충분히 고민할 시간은 있었을 터.

그렇다면 이건 대체 무슨 노림수란 말인가?

상대의 의도가 읽히지 않자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상대는 정확히 앞을 내다보고 있는데, 자신은 아직 미지의 세계에 빠져있는 느낌.

이택윤은 이 느낌이 싫었다.

어째서냐고?

이런 느낌이 들면 항상 상대는 말도 안 되는 묘수를 보여줬으니까!

이건 일종의 오랜 경험이 보내오는 경고에 가까웠다.

‘뭐냐, 무슨 수를 보고 있는 거냐.’

이택윤은 긴장을 한껏 끌어올렸다.

하지만 정도찬의 다음 수는 좌상귀였다.

정도찬이 아까 이택윤이 일부러 내보인 흑 대마의 약점을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릴 길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당장 백 요석들을 잡으면 흑 대마의 숨통이 트인다.

이택윤도 적당히 선수만 넘겨받고 끝낼 생각으로 둔 수였는데 이렇게 치고 들어오니 당황스러웠다.

‘무슨 의미지? 아니, 의미를 떠나서이게 무슨 계산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택윤 자신이 이득을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흑 대마에 치중하러 들어가기 위해  한 수 때문에 백의 요석들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이택윤은 당연하다는 듯  요석들을 잡으러 들어갔다.

수순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대국을 해설하고 있던 유진화였다.

아무리 그가 어록까지 만들어지며 여러모로 놀림당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본인이 입신의 경지를 밟아본 바둑기사였고, 한세빛의 대국을 해설하며 온갖 진귀한 장면을 본 그였기에 일종의촉이 발동한 것이다.

“잠깐만요,이거 이  돌들 정말 죽은 거 맞나요?”

함께 해설하던 해설자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유진화에게 물었다.

“이 백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가요?”

지금까지 둘   돌들이 다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설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아뇨 이게, 축으로 몰려서 꼼짝없이 죽는  알았는데…. 이렇게 두면 축 방향이 미묘하지 않나요? 아까 우하귀를 찌른  돌이 축 머리에 있는 것 같은데?”
“어?”

둘은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자신들이 본 수를검증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두 사람은멋지게 살아나가는 백 돌을보며 연신 감탄했다.

“하…. 정도찬 2단 언제부터 이 수를 보고 있었던 거죠?”
“단순히 두는 순서를 바꾼 것만으로 이게 이렇게 되네요…. 마치 마법 같습니다.”

훗날 정도찬의 상징이 되는 ‘수순의 묘’ 그  번째의 탄생이었다.

이윽고, 꼼짝없이 잡은 줄로만 알았던 백 돌이 살길이 있었음을 깨달은 이택윤은 감탄했다.

‘하…. 미친놈….’

정도찬은 수읽기도 수읽기지만 대국을 읽는 시야가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이분명했다.

좌상귀를 살리기 위해 우하귀의 수까지 읽어버리는 미친놈.

그게 정도찬이었다.

‘차라리  됐어.’

변수가 없다면 정도찬은 무난하게 조1위로 진출할 것이다.

같은 조 진출자들은 16강에서 만날 수가 없는 구조이니 자신이  2위로 진출한다면 다음에 정도찬을 만나는 건 아무리 빨라도 8강 이후다.

물론 조2위 진출이니 다른  1위와 맞붙게 되겠지만 정도찬을 한번 확실하게 피해갈수 있다는  자체가 큰 메리트로 느껴졌다.

‘이놈은 미친놈이야…. 갑조리그가 아니라 세계 기전에서 놀아야 하는 생태계 파괴종이라고...’

이택윤은 깔끔하게 돌을 던졌다.

TH 칼텍스배 전국 기전 32강
H조 제1국
흑 이택윤 백 정도찬
181수 백 불계승
정도찬 승자전 진출.

#

한예준 9단과 유은우 9단의 대국 역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전성기가 지난 지 한참 지나 과거의 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둘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바둑기사.

둘의 대국은 나름의 향취가 있었다.

계가까지 가는 반집 승부 끝에 유은우 9단이 승자전에 진출.

승자전에서 정도찬과 붙게 된 유은우는 분전했으나 냉정하게 말해서 정도찬과는 실력의 차이가 컸고 결국 104수 만에 돌을 던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택윤과 한예준의 패자전에서 이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멘탈이 흔들린 이택윤의 실착을 한예준이 놓치지 않고 응징.

이택윤의대마가 잡히며 패배하고 한예준이 최종전에 진출한 것이었다.

그렇게 성사된 유은우와 한예준의 리벤지 메치는 이택윤에게 승리를 거두며 기세를 올린 한예준의 승리였다.

죽음의 조라고 불린 H조.

H조 1위 진출자는 정도찬.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16강 진출자 인터뷰 – H조 1위 정도찬

Q: 조 1위로 진출하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을 만들어냈다. 기분이 어떤가?
A: 나는 처음부터 자신 있었다.

Q: 1국에서의 ‘수순의 묘’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둔 수인가?
A: 어떻게 두었냐는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 그저 그곳에 둬야 이길 수 있어서  것이다.

Q: 16강 진출 소감을 부탁한다
A:16강에 진출해서 기쁘다.

Q: 조금 더 자세하게 부탁한다.
A: 2승으로 조1위로 16강에 진출해서 정말 기쁘다.

ᄂ아 ㅋㅋ 아무튼 더 자세하게 이야기했다고 ㅋㅋㅋㅋㅋ
ᄂ우리 오빠 댕청미 뭐야  진짜 미치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
ᄂ???: 인터뷰 줫가치 하네!!
ᄂ이 인터뷰한 사람이 ‘수순의 묘’  사람 맞아요?
ᄂ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