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49국- 착각 (51/75)



〈 51화 〉49국- 착각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되고 16강 진출자들이 하나둘씩 정해지며 TH 칼텍스 배 전국 기전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D조에 무작위 배치된 정휘운은 비록 1국에서 패배하며 기분 나쁜 출발을 했지만, 패자전과 최종전에서 연달아 이기며 조2위로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시간이 흘러G조의 16강 진출자들이 정해진 다음 날.

H조의 사전 인터뷰가 방송되었다.

H조의 구성원 4명에게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 인터뷰어는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정도찬에게 물었다.

사실상 H조의 화제 중심에 있는 인물이 정도찬이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선 정도찬 2단에게 질문하고 싶은데요, 왜 하필 이택윤 협회 8단을 지명한 건가요? 팬분들 중에는 이재영 6단의 복수를 위해 지명했다. 이런 말도 있는데 사실인가요?”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예상하였던 정도찬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우승하려면 다 이겨야 하니까 누굴 지명하든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은 우승할 자신이 있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네, 애초에  우승하려고 나왔습니다.”

정도찬의 당당한 대답을 들은 인터뷰어는 생각했다.

‘확실히 뭔가 다른 구석은 있단 말이지….’

각종 대회에서 수많은 신인을 인터뷰해본 경험이 있는 그녀였다.

그녀가  신인 대부분은 이런 자리에 처음 나오면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말들을 내뱉었다.

‘최선을 다하겠다.’ ‘최대한 높은 곳에 올라가 보겠다.’ ‘운이 좋았다.’와 같은 소심하고 재미없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도찬처럼 대놓고 ‘우승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신인은 처음이었다.

‘자신감도 넘치고, 배짱도 있어, 해설자 출신이니까 말실수 걱정도없고.’

이만큼 대하기 쉬운 인터뷰 대상은 또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는 잠정적으로 H조 사전 인터뷰의 주인공을 정도찬으로 점찍었다.

“그럼 이재영 6단을 탈락시킨 것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 라고 정리해도 될까요?”
“전혀 없진 않고…. 5% 정도는 있습니다.”

그 미묘한 수치에 주변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인터뷰어는 마이크를 이택윤에게 넘기며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이택윤 8단에게 묻고싶은데요. 정도찬 2단이 지명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잘못 보면 어디 아픈 것처럼 보이는 깡마른 체구의 사내, 이택윤은 마이크를 받아들고는 대답했다.

“저는 너무 고마웠죠. 사적으로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대답.

이택윤의 훌륭한 도발이었다.

“그럼 다음은 한예준 9단에게 질문하고 싶은데요. 까마득한 후배가 같은 조가 되어서 정말 고맙다고 하는데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서른 후반을 바라보지만, 아직도 현역에서 활동 중인 한예준 9단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요즘은 젊은 친구들이 너무 잘 두더라고요. 솔직히 힘이 좀 부치긴 하는데 택윤이랑 저랑 나란히 조 1, 2위로 16강 진출하는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와 절친한 동년배의 유은우 9단이 반발했다.

“아니 어제는 나랑 1, 2위로사이좋게 진출하자면서요?”
“거 이제 바둑돌 드는 것도힘들어하시는 분이 욕심도 많으십니다. 알아서 조용히 그냥 잘 있다가 가세요.”
“허허허…. 우리 한 사범이 어제 뭘 잘못 드셨나?”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인터뷰어가 다시 정도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택윤 8단을 1위로 올려보내고 2위 싸움을 하자. 이런 분위기인데요. 정도찬 2단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들 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셔서 당황스럽네요.”
“그럼 정도찬 2단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뭔가요?”
“제가 조1위로 먼저 올라가 있을 테니 나머지는  분이 정하시면  것 같아요.”

#

H조의 사전 인터뷰 방송 이후로 안 그래도 죽음의 조라 평가받으며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H조를 향한 기대감이 더욱 올라갔다.

특히 이미 반쯤 탈락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던 정도찬에 대한 주목도는  그대로 급상승했는데.

대부분은 ‘네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이제 얼마나 잘 두나 보자.’라며 지켜보겠다는 정도의인식이었지만. 재미있는 인터뷰를 보여준 정도찬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던 32강 H조의 대국일이 다가왔다.

정도찬은 평소보다도 일찍 일어나 무려 대국 시작시각 3시간 전에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도찬 역시 결국 메이저 대회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던 것이다.

‘깔끔하게 2승으로 올라간다.’

조1위 진출.

정도찬은 오로지 그것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1국에서 이택윤만 이기면 승자전의 난이도는 비교적 쉬울 가능성이 크다.

조1위 진출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정도찬은 그의 주변인들이 그에게 보낸 응원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읽고 답장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도찬은 누군가가 대기실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인기척의 정체는 이택윤 8단이었다.

정도찬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냈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어? 뭐야? 엄청 일찍 왔네?”

이택윤의 말을 들은 정도찬은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대국 시간까지는 2시간이 넘게 남아있었다.

“선배님도 일찍 오셨네요.”
“난 원래 일찍 일찍 다녀, 너도 중요한 대국에서 10분 지각 실격패해봐 싫어도 일찍 나올걸?”

이택윤이 길 잃은 아이를 도와주다가 대국에 지각하여 실격패한 적이 있다는 일화는 유명한 일화였다.

“그 일 말씀하시는 거면 그래도 좋은 일 하신 거지 않습니까?”
“그게 나중에라도 알려져서 다행이지, 나 실격패하고 열흘 동안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니까?”

이택윤은 자신이 먹어본 욕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자랑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정도찬이 ‘이 사람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욕들의 향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전 인터뷰 때 도발했던 건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정도찬이 후배이기도 하고, 먼저 도발한 게 사실이었으니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듯한 기색을 보인다면 사과하려고 했지만 이택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기에는 정도찬의 마음이 불편했으니….

정도찬은 사과할 타이밍만 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인터뷰 때는 죄송했습니다.”
“엉? 무슨 인터뷰? 아…. 도발한 거? 그건….”

그때 타이밍 좋게 함께 스튜디오까지 같이 온 유은우와 한예준이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고.

이택윤에게 사과하는 정도찬의 모습을 본 한예준이 말했다.

“뭐야 이택윤이 벌써 후배 관리하는 거야?”
“네?”

옆에서 유은우가 거들었다.

“이야…. 우리 눈치만 보던 애가 후배도 잡고 많이 컸네….”
“그런  아니에요!”

이택윤은 억울하다는  정도찬이 인터뷰 때의 일로 사과를  것이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을 들은 둘은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뭐야, 별거 아니었네.”
“뭐, 신인이면 그런걸 신경 쓸 수도 있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하자 이택윤은 정도찬에게 말했다.

“인마, 우리는 ‘프로’야 선만 안 넘으면 카메라 앞에서 일어난 일은 카메라 앞에 두고 올  있는 사람들이라고.”
“아….”

정도찬은 이택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는 프로바둑기사들 간의 암묵적인 규칙에 대한 말을 하고 있었다.

“대신, 도발하는 만큼 당할 수 있다. 도발할 때도 예의는 지켜야 한다. 진심을 담아서 도발하지 마라.  세 가지만 기억해. 그럼 별일 없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새끼, 말귀도 잘 알아듣네. 바둑만  두면 우리 팀으로 데려갈 텐데.’

깍듯하고, 쇼맨십도 괜찮고,스타성도 있다.

오늘 있을 대국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보여준다면 6, 7픽 정도로 뽑을 가치는 충분했다.

을조리그에서 구르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비록 보결이지만 갑조리그에 있는 것이 정도찬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괜히 뱀 머리보다는  꼬리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얻을 수 있는 경험 자체가 달랐으니까.

하지만...

32강 H조의 첫 번째 대국.

정도찬을 상대하던 이택윤은 자신이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6픽? 7픽? 웃기고 있네.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찬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자 신인이라는, 그리고 2단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정도찬의 실력이오롯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가  정도찬은.

‘1픽을 써서라도 모셔가야 할 리그 에이스급이다.’

강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