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6국 - 크리스마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정도찬을 놀래줄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던 하윤서는 눈앞의 신세연을 보며 황당한 듯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라니까?”
두 여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하윤서였다.
“저는 오늘 도찬 오빠랑 약속이 있어서 온 건데요?”
신세연도 지지 않았다.
“나도 도찬이랑 약속이 있어서 온 거야.”
두 여자는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먼저 상황을 파악한 것은 역시 정도찬을 잘 아는 신세연이었다.
‘정도찬…. 나중에 보자….’
신세연은 이를 악물었다.
이 인간이 분명 별 생각 없이 이중예약을 한 것이 분명했다.
자기 딴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런 짓을 한 거겠지만 여자들이 이런 거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기는 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게 우선이었다.
신세연은 하윤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말했다.
“이런 옷은 어디서 구하니?”
“...왜요? 인터넷에서 샀는데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그냥 사이즈가 안 맞는 것 같아서.”
말은 사이즈였지만 신세연의 눈은 명확하게 한 부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윤서 자신도 확실히 ‘그 부분’이 헐렁한 것은 느끼고 있는 차였기에 데미지가 배가되었다.
“저…. 전 아직 성장기거든요! 분명 더 클 수 있거든요!”
“누가 뭐라니? 난 그냥 바지 밑단이 끌리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건데….”
신세연은 하윤서를 놀리듯 말했다.
“아니면 혹시 뭐 다른 찔리는 부분이라도 있니?”
이번에는 하윤서도 이를 악물고 받아쳤다.
“나이 먹을 만큼 먹어서 다 큰 ‘누구’는 참 좋으시겠어요.”
“뭐?”
“왜요? 혹시 뭐 찔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옆에 정도찬도 없겠다 두 여자는 더 걸릴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대화를 듣고 있는 소녀가 있었으니….
‘스승님….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아….’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가 두 여자가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김수정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호달달 떨며 정도찬이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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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약속 시각이 되었지만, 전날 크리스마스 분위기좀 내보겠다며 이곳저곳을 장식하다 늦게 잠든 정도찬은 아직 꿈나라에 가 있었고.
두 여자는 삼십여 분간의 말싸움 끝에 협상을 시도했으나 양쪽 다 이 협상이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조약만큼이나 의미 없는 협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는 평행선을 그렸다.
결국, 밖이 소란스러워 잠이 깬 정도찬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밖으로 나갔고 신세연과 하윤서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아, 미안…. 늦잠잤네.”
숨어서 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수정은 내심 비명을 질렀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오!’
지금 상황이 복잡하니까 교통정리부터 하셔야지!
김수정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한참 동안 말싸움하던 신세연과 하윤서도 정도찬의 말에 어이를 잃었는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저놈부터 족치자.’
서로 평행선만 그리던 두 사람의 기적의 합의였다.
시작은 신세연이었다.
신세연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표정을 제대로 보여주며 정도찬에게 물었다.
“도찬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줄래?”
정도찬은 무슨 일 있냐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다.
“수정이 선물 고르러 가기로 했잖아? 무슨 문제 있어?”
그렇게 말해 신세연의 혈압을 올린 정도찬은 이번에는하윤서를 보며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내일인데 벌써 산타복 입은 거예요?”
“아, 맞다 잠시만요.”
정도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하윤서는 선물상자 안으로 다시 들어가 혼자 낑낑거리며 상자를 닫더니 갑자기 상자를 박차고 나오며 말했다.
“서프라이즈!”
“......”
“였던 것인데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그래…. 그렇구나….”
“이 뒤에도 있는데 계속 보실래요?”
“아니, 충분히 본 것 같은데요?”
정도찬은 거절했으나 하윤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저랍니다! 와!”
하윤서는 혼자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르다가 세상 다 산 표정을 지으며 선물상자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여 이번에는 신세연조차 차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정도찬이었다.
“그…. 고마워요?”
정도찬의 말에 하윤서가 눈을 빼꼼 내밀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꽤 효과가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정도찬은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확실히 받았어요.”
이번에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신세연이 움찔했다.
‘쟤는 또 저렇게 여자가 오해할만한 말을 한다니까….’
저런 상황에서 ‘마음을 받았다.’ 같은 말을 하면 이성으로서는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하윤서는 다시 벌떡 일어나 정도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ㅇ...”
하윤서는 쐐기를 박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신세연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윤서의 ‘정성’을 고맙게 받겠다는 말이지?”
“어? 그렇지, 이렇게까지 생각해줬으니까 고마운 거지.”
하윤서는 또다시 자신을 방해한 신세연을 노려봤고.
신세연은 그런 하윤서에게 더는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 째려봤다.
숨어서 그 모습을 보던 김수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바보.’
정말 평화로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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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 세 사람은 수정이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굳이 정도찬이 보고 있는 곳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신세연과 하윤서였기에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신세연이 김수정에게 딱 맞을 것 같은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옷 선물해주는 건 어때?”
“어머, 언니는 저런 옷이 취향인가 봐요?”
해석: 옷 더럽게 못 고르네
“그럼 윤서 너는 어떤 게 좋아 보이니?”
해석: 그럼 네가 골라보시던지, 이상한 거 고르면 알지?
“그러게요…. 어떤 게 좋으려나.”
해석: 내가 발로 골라도 그것보단 괜찮은 거 고름 암튼 그럼.
하윤서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여자 아이용 신발 한 켤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어때요?”
“윤서 넌 저런 게 취향인가 보네?”
해석: 지도 더럽게 이상한 거 고르는구먼
“전 저런 게 좋더라고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해석: 당신보다는 낫거든요?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와중 정도찬의 눈에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바둑판이었다.
바둑판을 빤히 쳐다보는 정도찬을 보며 신세연이 말했다.
“설마 저걸 선물해준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바둑을 두는 아이니까 바둑판을 선물한다는 것이 너무 식상하다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신세연은 지금 당장 김수정이 지내는 기원에 있는 바둑판의 숫자만 70개를 넘어가는 판에 또 바둑판을 선물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에게 바둑판을 받은 경험이 있는 하윤서는 발끈했다.
“바둑판이 뭐 어때서요! 스승이 제자에게 손수 바둑판을 사준다! 괜찮은 이야기잖아요!”
“수정이가 손 뻗으면 닿는 곳에 바둑판이 70개는 넘게 있는데 여기서 또 바둑판을 선물해준다고? 그것도 여자아이한테?”
“물건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마음이 중요한 거지!”
“마음은 다른 물건에도 담을 수 있잖아!”
신세연과 하윤서는 바둑판을 선물하는 게 맞다 아니다로 싸우고 있었지만, 막상 정도찬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저 곰돌이 인형 파는 건가….’
바둑판 위에서 단란하게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의곰돌이 인형 가족이 정도찬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정도찬은 아직도 바둑판으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혹시 이 인형들도 파는 건가요?”
“아, 이건 전시용이고요, 판매용은 다른 곳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아…. 파는 거구나 다행이다.”
곰돌이 인형 전시장을 안내받은 정도찬은 사인을 받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종업원에게 간단하게 사인을 해주고 추가로 사진까지 같이 찍어줬다.
처음에는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을 상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 정도찬이었지만 이제는 제법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묘하게 친절했던 종업원 덕분에 세 사람은 편하게 곰돌이 인형을 사러 갈 수 있었고.
어쨌든 정도찬은 그렇게 김수정에게 줄 선물을 고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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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자고 일어난 김수정은 확 바뀐 기원의 분위기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우와아! 이거 다 스승님이 하신 거예요?”
과거 신창연이딱 한 번 사용하고 창고에 처박아둔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꺼내 일일이 청소하고 전시한 정도찬은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이 딱 한 번 사용하고 처박아둔 이유가 있었어….’
정말 더럽게 힘들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또 뭐가 그렇게 무겁던지….
하지만 김수정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되게 고생한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정도찬은 보람을 느꼈다.
‘그래도 내년에는 적당히 하자….’
이런 장식 같은 건 좀 빼고…. 간소하게 선물만….
‘그나저나 선물들은 마음에 들었으려나.’
이왕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거 정도찬은 그의 친구들도 확실히 챙겨주자는 마음에 친구들의 선물도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가 친하게 지내는 모두에게 같은 종류의 선물을 보내줬기 때문에 누구 하나 차별이라고 느낄 사람은 없으리라.
훗날 한 명도 빠짐없이선물로 곰돌이 인형 열쇠고리를 받은 정도찬의 친구들은 서로 같은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도찬답다며 한참을 웃었지만.
세 명의 여자들은 기쁘긴 해도 마냥 웃지만은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