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5국 - 폭풍전야
하윤서는 자신에게 온 정도찬의 메시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여자는 무슨 선물을좋아해요?
‘말하는 분위기가 나한테 줄 선물을 고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전에 초단 대회 때 옆에 있던 여자에게 줄 선물일까? 아니면 기원에서 만났던 다른 여자?
아니면 혹시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여자가 있는 건가?
하윤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윤서는 결국 이대로 고민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정도찬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선물 받는 사람 나이가 어떻게 돼요?
-10살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제자가 있었지?’
하윤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제자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거였구나.
정도찬의 주변에 워낙 여자가 많아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윤서는 10살짜리 여자아이는 무슨 선물을 좋아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모르겠는데?’
19년 동안 바둑 외길만 걸어온 하윤서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애초에 그녀가 크리스마스 때 부모님에게 받은 선물이라는 것이 사활 문제집, 묘수풀이, 등의 바둑 관련 서적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녀가 원하는 것들이 저런 것들이기도 했고.
그거 외에는….
‘바둑판 정도?’
그래도 이건 너무 무난하지 않나?
그 이후로도 하윤서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아니, 아니지! 이건 기회잖아?’
안 그래도 저번에 정도찬을 도운 대가로 받을 얻어먹기로 했던 것도 반쯤 흐지부지된 느낌이었는데.
이거 잘 엮으면 정도찬과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각이다 각!’
하윤서의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럽게 데이트로 유도할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한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윤서의 사전에 ‘유도’ 따위는 없었다.
결국, 하윤서는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선물 고르러 갈래요?
-네?
-수정이 선물 같이 골라보자고요. 저도 당장 생각나는 건 없어서 그래요.
정도찬이 고민하는 듯 하자 하윤서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직접 가서 둘러보면 더 괜찮은 선물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전에 밥 한 끼 사기로 하셨잖아요. 선물 고르고 시간 남으면 밥 사주세요!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하윤서는 잠시 후회했다.
‘밥 사달라는 말은 괜히 했나?’
그냥 선물 고르고 난 다음에 자연스럽게 말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그런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귀찮은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런 하윤서의 고민은 기우였던 듯 정도찬에게서 온 메시지를 본 하윤서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랬었죠. 그럼 그때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하윤서는 핸드폰을 내팽개치고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쳤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방해꾼도 없겠다. 확실하게 밀어붙여서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하고 기회가된다면 그런 짓도 해버릴 테다!
하윤서는 벌써 머릿속으로 완벽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약속의 날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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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연은 자신에게 온 정도찬의 메시지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여자는 무슨 선물을 좋아해?
‘착각하지 말자…. 착각하지 말자….’
보나 마나 자신에게선물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 자신에게 질문한 것이 분명했다.
괜히 들떠서 나중에 기분이 나빠지느니 처음부터 착각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내가 이 인간한테 하루 이틀 당하는 것도 아니고….’
신세연은 혹시라도 정도찬이 자신을 위해 선물을 고르고 있다는 생각을 아예 배제했다.
둘이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이고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이 몇 번이던가.
신세연이 아는 정도찬은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에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년만 해도 은근히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크리스마스 케이크만 먹고 끝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렇다면 여자 선물은 왜 고르는 거지?
그 정도찬이 직접 선물을 챙길 생각을 할 대상이 누가 있을까.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수정이 선물 고르는중이구나.’
신세연은 괜히 김수정이 부러워졌다.
20년을 알고 지낸 자신은 아직 크리스마스 선물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데….
‘그러고 보니까 나도 수정이 선물사야 하는데….’
그 순간 한 아이디어가 신세연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지나갔다.
‘도찬이랑 같이 고르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신세연 자신도 김수정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 예정이었고, 정도찬도 김수정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민하고 있으니.
그냥 함께 고민하면서 고르면 더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 와중에 데이트 비슷한 것도 할 수 있고….
심지어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남녀가 가장 가까워지기 쉬운 날이라는 크리스마스이브!
신세연의 행복회로가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분위기를 타서 그대로 크리스마스까지….’
신세연은 바로 정도찬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수정이 선물 골라야 하는데 같이 고를레?
-응? 그럼 나야 좋지.
성공적으로 정도찬과 약속을 잡은 신세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옷을 입고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약속의 날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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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찬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한소율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여자는 무슨 선물을 좋아하나요?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평생 바둑만 보고살아온 사람이라 그런 걸까?
외모만 보면 여자 여럿 울리고 다녔을 것 같은 사람인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내면의 순수함이 보이는 듯했다.
분명 제자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는 거겠지.
한소율은 잠시 뭐라고 대답해줄까 고민했다.
자신이 열 살 때쯤에 좋아하던 게 뭐였더라?
잠시 고민하던 한소율은 정도찬에게 답장을 보냈다.
-곰돌이 인형은 어때요?
-곰 인형이요? 정말 그런 거로 괜찮을까요?
-그게 가장 무난하니까요.
적어도 한소율은 지금까지 인형 싫어하는 여자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귀여운 곰돌이 인형이라면 더더욱!
절대로 자신이 이 나이 먹고도 곰돌이 인형을 좋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음…. 한번 생각해볼게요. 조언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구나.’
연말이 다가오면 바둑 기사들이 바빠지는 것처럼 한소율 역시 연말에는 눈코 뜰 새 없이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다가와 있던 것이다.
‘나도 크리스마스 정도는 쉬고 싶은데….’
한소율은 잠시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무더기로 쌓여있는 서류 더미들을 보고 있자니 한숨부터 나왔다.
마치 한소율 자신이 종이로 된 무덤에 묻히는 심정이었으나 이곳에 있는 서류 모두 적어도 연말까지는 다 처리해야 하는 서류였다.
‘나만 휴일 없어…. 나만 크리스마스 데이트 못 해….’
순간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 일을 하겠다고 정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인 것을 어쩌겠는가.
한소율은 다시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열심히 하면 내일까지 다 처리하는 건 무리더라도, 내일 모레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깐이지만 크리스마스에 정도찬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선물은 뭘 사갈까.’
한소율은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
오늘도 한소율의 밤에는 야근의 불빛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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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약속 시각 30분 전, 그러니까아침 7시 30분에 기원에 도착한 신세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기원의 문이 열려있는것을 깨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긴, 창연 기원은 예전부터 연중무휴였으니까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문을 닫아놓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역시 이런 날에도 바둑을 두러 오는 사람은 극소수였는지 기원은 한산했다.
할 일이 없었던 것인지 멍하니 카운터에 앉아있는 알바생과 잠시 인사를 나눈 신세연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수정이하고 도찬이는 아직 자는 건가?’
평소에는 2층에 올라오자마자 정도찬이나 김수정을 볼 수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신세연은 둘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신세연의 눈에 띄는 이상한 물건이 있었으니….
거실한복판에 떡 하니 놓여있는 커다란 선물상자가 그것이었다.
‘저게 뭐지?’
신세연이 본 선물상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상자였는데 조금 더 자세히 보자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정말 안에 사람이라도 들어가 있는 듯했다.
‘저거 혹시 정도찬인가?’
이건 혹시 자신을 위한 깜짝 선물?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정도찬은 그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김수정이 낸 아이디어라면?
자신이 오늘 아침에 오는 것을 알고 있던김수정이 정도찬을 설득해 이런 이벤트를 기획한 거라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신세연의 행복회로가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에이….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그리고 ‘내가 너의 선물이야!’ 같은 게 대체 언제적 수법이란 말인가.
그래도 신세연은 내심 기뻤고, 기꺼이 이 장난에 어울려주기로 다짐했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모르는 척 소파에 앉아서 애를 태워볼까?
잠시 장난기가 동했지만, 신세연은 바로 선물상자를 열어보기로 했다.
분명 정도찬의체격으로는 저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곤욕일 테니 최대한 빨리 나오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선물상자 앞에 선 신세연은 천천히 선물상자를 개봉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서프라이……. 뭐야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산타걸 복장을 한 하윤서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만난 두 여자가 서로를 바라봤다.
2차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