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39국 - 경이 (40/75)



〈 40화 〉39국 - 경이

한세빛은 아무리 봐도 살  없는  돌을 오히려 더 키웠다.

그 수에 정도찬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아무리 수를 읽어봐도 저 돌이  가능성은 없는데 어째서 덩치를 키우는 걸까.

‘사석작전인가?’

사석작전, 죽은 돌을 활용해서 이득을 보는 묘수.

하지만 돌 세 점이면 6집 이상의 가치인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우상귀  세력과의 합류는 불가능했고, 근처  대마와의 수상전을 유도하려 해도 수가 부족하다.

흑 돌들의 죽음을 확신한 정도찬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심리전, 혹은 실수.’

천하의 국수에게도 1분이라는 제한시간은 큰 압박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 한세빛이라고 모든 대국에서 승리하는 건 아니다.

정도찬은 마지막 남아있던  줄기 불안감마저 떨쳐버렸다.

수순이 이어지고,  세 점은어느새 여섯 점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의미 없이 키워서 죽으려는 모습에 관전자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국의 해설을 맡게 된 해설자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여기 흑 여섯 점은 죽은 모양이죠?”
“음…. 아직 잘 모르겠네요. 제가 못 본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혹시 여기 백 대마를 끊으면 어떻게 되나요?”
“여길 이렇게 단수치더라도 너무 쉽게 살아나갈 수가 있어서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그렇네요, 이렇게 수상전이 전개되어도 흑이 한 수 모자라고요.”

이 대국의 해설자 역을 맡은 유진화 9단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

‘다른 사람이 이러고 있었으면 저 돌은 진작 죽었다고 해설했을 텐데.’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그가 당해온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세빛의 대국은 너무 복잡하고신묘한 수가 많이 나와서웬만한 해설자들은 해설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나마 해설자 중에 기력이 강한 편인 유진화 9단이 거의 한세빛의 대국 해설을 전담으로 맡고 있었는데, 사실 유진화라고 해서 별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었다고 확신한 돌이 살아나는 것은 기본.

아무리 봐도 뒤집기 힘들어서 조심스럽게 한세빛이 불리해 보인다고 말 한 대국을 뒤집는 것은 일상.

한 수 한 수, 숨 쉬듯 묘수를 두는 한세빛이었기에 유진화 역시 이런저런 실수들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짓궂은 바둑팬들이 그런 유진화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고.

심지어 어떤 팬은 유진화의 실수를 정성스럽게 모아 ‘유진화 어록’을 작성.

이제는 아예 해설자가 실수하면 유진화를 까는 것이 일종의 밈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답답한상황,한세빛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 무섭게 백 대마를 끊었다.

“어? 끊었네요?”
“그러게요? 이걸 끊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
“이렇게 나가면 이건 너무 쉽게 살아나가죠?”
“그러게요, 이걸로 백 대마도 고립되긴 하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전에서는 흑이 불리하거든요?”

한참을 고민하던 유진화는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흑 돌은 죽었습니다, 그래도   돌 덕분에 백 대마를 압박하고, 끊어서 몰았거든요? 그러면서 중앙 쪽  세력이 조금 두터워졌는데, 이걸 노리고  수인  같습니다.”
“어차피 그대로 두면 무난하게 백의 열두 집이 완성되니 같은 열두 집을 주며 세력을 얻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훌륭한 사석작전이네요, 역시 대단합니다.”

온전히 한세빛이 둬도 못 살릴  같은데 심지어 이건 페어 바둑이다.

유진화는 고립된  돌의 죽음을 확신했다.

‘저 돌은 한세빛이 아니라 화타가 와도 못 살려.’

유진화의 생각은 맞았다.

애초에 한세빛은   여섯 점을 깔끔하게 줄 생각이었으니까.

‘이제 슬슬 눈치채려나.’

한세빛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빼꼼 내민 백 대마의 첨병을 찍어눌렀다.

완벽하게 그가 원하는 구도를 형성한 것이다.

굳이 백 대마를 압박하는 이유를   없던 정도찬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말 단순히 중앙 세력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중앙 흑 세력이 조금 두터워지긴 했지만, 나무 울타리 수준의 세력이다.

조금만 찌르면쉽게 허물어지는  의미 없는 세력.

한세빛이 고작 이 정도 세력을 얻기 위해 저런 수를 뒀다고 생각하니 앞뒤가 맞지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이미 둘 수는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 수라도 손을 빼는 순간 수상전이 역전될 테니까.

김수정은 당연한 수를 뒀고, 이루아도 별 고민 없이 당연한 수를 뒀다.

흑 돌 여섯 점의 죽음은 이제 거의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

정도찬은 지금 이 국면까지 오면서 한세빛의 생각을 몰라 불안하기는 했지만,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백 진형은 단단했고, 끊겨도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최악의 경우에 고립되더라도 흑 돌을 따내면 살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온 구도는….

‘전멸.’

우변과 우하귀까지 이어져 있는 백 대마의 전멸이었다.

완전히 죽어서 백 대마의 생명줄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흑 돌 여섯 점의 모양이 절묘했다.

처음에는 무난하게 두 집이 나올  있는 모양으로 보였지만, 백 대마가 끊기며 한 집이 가짜 집이 되어 다섯 집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중앙이 치중되면 너무나도 쉽게 죽는 오궁도화의 모양이.

한세빛은 마지막까지 정도찬에게 한 집이 더 있다고 착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국면을 본 것일까?

백 대마를 끊었을 때?

흑 돌의 덩치를 키웠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우변에 침투한  순간에?

정도찬은 그제야 한세빛과의 대국을 피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식 대국에서 이런 걸 당하면 상대하기 싫어질 만도 하지.’

당장 오늘의 대국만 해도 바둑 팬들 사이에서 ‘기적의 사활 묘수’ 같은 이름이 붙어 돌아다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한세빛 국수의 전설의묘수’ 같은 이름으로 소개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묘수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이 국면을 설명하기 전에 이렇게 소개하겠지

‘정도찬 2단과 한세빛 연맹 9단의 사제동행전 페어 바둑 대국 도중 나온 묘수’라고.

패배의 역사가 잊히지 않고  번이고 반복되어 곱씹어진다.

패자에게 있어서 이것만큼 괴로운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정도찬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복수를 위해 장작 위에 누워서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도찬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대국을 기약하고 순순히 돌을 던졌다.

 정도찬 김수정 흑 한세빛 이루아
호선 덤 6집 반 제한시간 1분
184수  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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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주목을 받고 있던 대국에서 나온 기적의 묘수는 바둑팬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죽은 흑 돌이 산 백 돌을 이기다]

[바둑이 아니라 예술]

[한세빛 국수 어떻게 이런 수를 두었냐는 질문에 ‘그저 최선의 수를 두었을 뿐’]

마지막까지  대마 죽은 거 몰랐던 사람 추천 (추천 1248 비추천56)
ᄂ추천 구걸 추하다.
ᄂ이번만 봐 드리는 겁니다.

-???: 아무리 봐도 흑 돌은 죽었습니다. (추천 1154 비추천 84)
ᄂ아이고 진화야….
ᄂ아니 죽긴 죽었잖아 ㅋㅋㅋㅋㅋㅋ
ᄂ진짜 죽긴 죽었네 ㅋㅋㅋㅋㅋ
ᄂ유진화 시즌 1호 해설 성공 ㅋㅋㅋㅋㅋㅋ
ᄂ아 ㅋㅋ 아무튼 죽긴 죽었으니까 맞다고

정도찬 일치율 원툴새끼 드디어 거품 빠지네(추천 362 비추천 612)
ᄂ 상대가 한세빛인데?
ᄂ한세빛한테 졌다고 거품 빠지는 거면 거품  빠질 놈이 없는데 ㅂㅅ
ᄂ얼빠 새끼들 또 실드치러왔네

수정이 삼패  묘수도 좋았는데 이게 이렇게 묻히네(추천 354 비추천 14)
ᄂ저 나이에 저런 수를 둘 수있는  자체가 대단하지.
ᄂ최소 5년 안에는 입단할 듯.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확인하던한소율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을 먼저 해줬어야지.’

만약 정도찬이 한세빛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소율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봤다면 한소율은 정도찬을 말렸을 것이다.

‘이겨도 문제, 져도 문제였어.’

이기면 어차피 페어 바둑이라며 깎아내렸을 테고, 지면 지금처럼 당연하다는 듯 정도찬을 욕하고 있었으리라.

안티팬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정도찬이 이런 관심에 무딘 편이라는 점이었다.

한세빛에게 져서 분하다는 생각을 할지언정, 그 과정에서 자신이 욕을 먹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아니 욕을먹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인간이 정도찬이었다.

정도찬의 상담사는 정도찬의 이런 성향이 트라우마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좋지 않은 성향이라고 말했지만, 한소율의 생각은 달랐다.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스타 같은 건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여론은 안 좋아.’

원래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낸 후에 정도찬의 인간적인 면모, 즉 정도찬이라는 사람의 스토리와 매력으로 반발을 잠재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세빛과의 대국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관심을 받는 지금, 한소율은 조금 순서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진짜 손이 많이 가는 남자라니까.’

한소율은 잠시 핸드폰의 주소록을 뒤적거리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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