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38국 - 권태
첫 대국이 무승부로 끝나고 쉬는 시간.
정도찬은 무슨 말로 김수정을 위로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상황에서 삼패 빅의묘수를 찾은 것 자체가대단하다고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김수정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대국의 준비도 해야 하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정도찬은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김수정에게 말했다.
“잘 했어.”
하지만 김수정은 그런 정도찬의 위로에도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진 거예요.”
대국에 집중할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김수정은 삼패 빅의 묘수를 찾는데 1분 이상을 사용했다.
페어 바둑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대국이 아니었다면 시간 초과로김수정 자신의 불계패가 되었겠지.
그래서 김수정은 사실상 이 대국이 자신의 패배라고 생각했다.
“스승님이었다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었겠죠?”
“음….”
솔직히 말하면 정도찬은 삼패 빅의 묘수를 바로 찾아내긴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수를 얼마나 빨리 읽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김수정은 조금 근본적인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제자가 너무 침울해 보였기에 정도찬은 그 사실을 말해줄까 말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지금 말 해줘야 할까.’
괜히 울고 싶은 아이 뺨 한 번 더 때리는 것 아닐까, 괜한 참견은 아닐까, 자꾸만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정도찬은 결국 자신의 제자를 믿어보기로 했다.
“묘수를 찾았냐, 찾지 못했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네?”
“한 판에 묘수가 세 번 나오면 진다는 말 들어봤어?”
정도찬의 물음에 김수정은 고개를도리도리 저었다.
아직 바둑 경력이 짧은 김수정은 아직 모르는 바둑 격언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둑 한판을 두면서 묘수를 세 번씩이나 두어야 했다면 그건 정상적인 바둑이 아니었다는 뜻이거든.”
“......?”
김수정은 정도찬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전투를 좋아하고 수 싸움을 사랑하는 김수정에게 있어 난전 중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묘수는 항상 그녀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방금의 대국만 봐도 묘수를 찾아낼 수 있었기에 겨우 무승부를 만들 수 있었던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째서 자신의 스승은 묘수가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런 김수정의 의문을 안다는 듯 정도찬은 입을 열었다.
“정수를 두면 굳이 묘수를 둘 상황이 오지 않거든.”
“아!”
김수정은 그제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그 국면에서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묘수를 찾는상황까지 몰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래, 묘수를 찾는데 시간을 많이 쓴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전에 함정수에 당한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함정수에 당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정수를 둔 것일까?
김수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도찬에게 물었다.
“그러면 정수는 뭐에요?”
언제 침울했냐는 듯 눈을 똘망똘망 뜨고 물어보는 김수정은 그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했다.
정도찬 역시 한때는 화려한 묘수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스승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도찬은 그때의 자신이 그의 스승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말해줄 수 있었다.
“나도 몰라.”
“......?”
바둑에서 정수란 상대방의 대응에 두는 최선의 착수를 말한다.
하지만 그 최선이란 무엇인가?
천하의 인공지능도 아직 가중치를 쌓아가고 있는 지금,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수가 최선의 수라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저 그 국면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형태의 수를 보편적으로 정수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신창연도, 정도찬도, 그 누구도 정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바둑기사는 평생 정수를 찾아 걷는 여행자들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목적지는 있지만, 그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길을 걷는 여행자들.
정도찬은 이제야 걸음마를 뗀 이 소녀의 여행이 순탄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리고 자신보다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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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동행전의 결승은 3번기고, 1국이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에 2국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이번 대국이 대회의 마지막 대국이었다.
비록 1국은 제자들이 주도하는 대국을 뒀지만, 두 스승은 2국마저 그들의 제자들에게 맡길 생각은 없었다.
제자들에게 맡기고 뒤에서 바라보기만 하기에는 정도찬과 한세빛 둘 다 다시 붙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비록 일대일 대국은 아니고 페어 바둑인 게 아쉬웠지만.
휴식 시간 내내 이루아에게 시달린 한세빛이 조금 지쳐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부탁하네! 정 사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들은 마지막이 될 대국을 위해 마주 앉았다.
1국에서 흑돌을 잡은 정도찬과 김수정이 이번에는 백돌을 잡게 되었다.
착수 순번 역시 공정성을 위해 전 대국과는반대인 이루아 정도찬 한세빛 김수정의 순.
이루아의 수에 정도찬이 응수할 수 있고, 정도찬의 수에 한세빛이 응수해야 하는, 정도찬과 김수정에게 웃어주는 착수 순번이었다.
대국이 시작되고 계시기가 59초를 가리키기도 전에 이루아가 우상귀 화점을 차지했다.
‘아예 고민하지 않았다는 건 대국을 시작하기 전에 작전을 짜고 나왔다는 건데.’
하지만 어느 정도 작전을 짜고 나온 건 정도찬 쪽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찬은 좌상귀 삼삼을 차지했고, 이어 한세빛이 우하귀 아래쪽 소목에 착수했다.
그리고 김수정의 착수 순번.
따악-
김수정은 과감하게 우상귀 화점의 삼삼에 침입했다.
마지막 귀를 차지하지 않고 바로 상대의 진영에 침투하는 수.
이는 다름 아닌 한세빛이 백을 잡았을 때 가장 즐겨 사용하는 수였다.
한세빛이 알기로 정도찬은 이런 식의 바둑은 선호하지 않는다.
정도찬의 성향이었다면 마지막 귀의 소목 혹은 화점을 차지했을 터인데 굳이 한세빛 자신이 즐겨 두고 자신 있어 하는 국면을 만들었다는 건...
‘도발인가?’
한세빛은 항상 들고 다니는 부채를 매만졌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도발을 받은 것도 참 오랜만이다.
과거 자신이 막 국수 타이틀을 얻었을 때, 그때만 해도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며 사방에서 도발이 걸려왔다.
한세빛은 딱히 그 사람들을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았다,
내자불거,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
한세빛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들과 대국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겼다.
하지만 그 수많은 도발이 뚝 끊긴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존경과 존중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 뒤에 숨어 자신과의 대국을 피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한세빛 자신이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대회 참가자가 반 토막이 나버린다.
심지어 올해 국수전 참가자는 역대 최저라고 했던가.
그래서 한세빛은 정도찬이 기꺼웠다.
자신에게 서슴없이 ‘자신과의대국에서 이기면 알려주겠다.’라고 말하는 배짱, 그리고 자신이 즐겨 두는 수를 이용한 도발까지.
정도찬은 그를 존중했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자신을 이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한세빛은 감사함마저 느꼈다.
‘루아가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을는지.’
사실 한세빛은 대국 시작 전에 이루아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손대중은 없으니 알아서 따라와라.’라고.
물론 그 덕분에 휴식시간 내내 이루아에게 시달리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정말로….
어쨌든 이루아는 예상치 못한 정도찬의 수에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무난하게 삼삼 침투 포석의 수순을 이었다.
1분, 충분한 고민을 하기에는 짧디짧은 시간.
그 짧은 제한시간이 네 사람의 집중력이 가속하고, 착수 순번이 돌고 돌았다.
정도찬은 그 과정에서 한세빛과 이루아의 작전 아닌 작전을 깨달았다.
설령 이루아가 실수한다 해도 한세빛은 전력을 다한다.
‘루아가 어느 정도는 자기를 따라올 수 있다고 믿고있는 거다.’
한세빛의 페이스에 따라가지 못한 이루아가 대국의 결과에 영향을 줄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를 할 거라고 생각했으면 이런 식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착수 순번상 이루아의 수는 정도찬이 응수한다.
아무리 이루아가 실수를 줄이겠다고 노력해도 정도찬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즉 정도찬으로서는 이대로 김수정과 발을 맞추며 천천히 둬도 이길 수 있는 대국이다.
하지만, 정도찬도 김수정에게 미리 말을 해 두고 온 참이었다.
‘미안하지만 전력을 다해 두겠다’라고.
그의 말에 김수정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도찬은 더는 김수정이 따라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착수 순번에, 자신이 볼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둘 것이다.
중반부에 접어든 정도찬의 착수 순번.
그동안 외면받던 좌하귀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누구의 땅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은근슬쩍 일어난 물보라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한세빛이 아니었고, 평온하던 땅은 순식간에 격전지가 되었다.
물은 확실하게 흐르고 있었지만때때로 끊어지고, 이상한 곳에서 굽이치기도 했다. 평소였다면 흐르고 흘러 급류가 되었을 물이 지금은 마치 도랑물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세빛 역시 평소의 날카로운 칼과는 조금 다른 군데군데 이가 빠진 칼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쉽사리 정도찬에게 타격을 입힐 수가 없었다.
‘기풍이 바뀐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상대하니 더 까다롭구먼.’
한세빛은 속으로 정도찬의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높은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도에 그의 본질인 변화를 섞은 정도찬의 새로운 기풍은 훌륭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 시행착오를 거치고 과도기를 벗어나 새로운 기풍에 익숙해진다면 분명 정도찬은 국수의 자리를 노리는 훌륭한 경쟁자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따악-
한세빛은 누가 봐도 정도찬의 영역인 우변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이루아는 다다음 순번은 자신인데 지금 뭐 하는 거냐며 한세빛을 원망스럽게 쳐다봤고.
다음 순번인 김수정 역시 그 수를 보고 놀라 눈을 똥그랗게 떴다.
놀란 것은 정도찬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살 수 있다고?’
삼면이 백의 세력으로 막혀있고, 나머지 한 면마저도 막다른 길이다.
주변에는 의지할만한 응원군도 없다.
그렇다고 흑 돌이 자유롭게 뛸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백의 포위망에 흑 돌 하나가 죽으러 들어온 모양새였으니 김수정은 당연하게도 무리한 침투를 한 흑 돌을 응징했다.
다음 순번은 이루아.
이루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세빛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저 좁은 공간에서 정말 살아날 수 있다고?
그녀의 눈에 비친 흑돌은 아무리 봐도 사석이었다.
‘그래도 스승님이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하신 거겠지.’
오래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루아는 백돌 사이에 애처롭게 놓여 있는 흑 돌 한 점의 친구를 만들어 줬다.
우상귀 쪽으로 한 칸 뛴 수.
그나마 살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귀 쪽의 흑 대마와 합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쪽은 이미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정도찬은 침투한 흑돌이 중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 세력을 더욱 두텁게 쌓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한세빛의 순번.
죽음이 거의 확정된 흑 돌이 마치 한세빛에게 이렇게 소리치는 듯했다.
‘대장! 포위되었습니다!’
절망적인 말이었지만 한세빛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 모든 방면을 공격할 수 있겠군.’
권태에 빠진 호랑이가눈을 떴다.
실로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