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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 〉29국 - 대화가 필요해 (30/75)



〈 30화 〉29국 - 대화가 필요해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내 바둑과 성장과 함께 더욱 날카로워진 수정이의 바둑.

상극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경우는 찾기 힘들 것이다.

페어 바둑을 두는 내내 나는 수정이의 공격성에 끌려다녔다.

바둑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수정이에게한 말이 화근이었는데, ‘내가 맞춰줄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는 말을 들은 수정이가정말 말 그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다.

수정이의 공격성이 뛰어나긴 하지만 아직 미묘하게 어설픈 공격들은 현직 프로들에게는 너무 얕은 공격이었으니 무난하게 질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엉뚱하게도 이긴 쪽이 싸우기는 더 싸웠다.

“이건 왜 이렇게 둠?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네.”
“이렇게 두면 되잖아 병신아.”
“어휴…. 딱 6단따리나  생각이네.”
“시발 내가 더러워서 내년에는  승점 채운다.”

재영이와 휘운이 둘도 나와 수정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상극이라고볼 수 있는 조합이었다.

인공지능의 신봉자를 자처하는 재영이는 하윤서가 보면 거품을 물 만큼 인공지능의 냄새가 짙은 바둑을 뒀고.

반면 휘운이는 항상 정도 이상의 이득은 탐하지 않고 협상과 협상을 거듭하는 자기 성격만큼 유들유들한 바둑을 뒀으니.

최선의 수만 골라서 두고 싶은 재영이와 적당한 이득으로 만족하는 휘운이가 서로의 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휴…. 저놈들 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는 복기를 하는 와중에도 서로 싸우고 있는 휘운이와 재영이를 애써 무시했다.

나는 수정이의 침투수를 복기하며 수정이에게 물었다.

“수정아 여기서 이 침투는 왜  거야?”
“살 수 있을  알았어요.”
“어떻게?”
“스승님이라면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

그러니까 어차피 살리는 건 내가  거니까 두고 싶은 데로 뒀다는 건가?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같은 팀으로서는 조금 곤란한 마음가짐이었다.

아무리 혼자 다이빙하면 트롤이고 같이 다이빙하면 전략이라지만….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두는 건 어떨까?”
“그치만 제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질  같은걸요….”

그건  그것대로 맞는 말이었다.

분명 수정이의 재능은 뛰어나지만, 지금은 아직 입단도 못 한 아마추어.

프로를 상대로 두던 대로 두면 지는 게 당연하겠지….

그래서 뒤에 있는 나를 믿고 계속 모험수를 둔 거였구나.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주도권을 잡기도 애매했다.

한쪽이 아무리 좋은 수를 둬도 파트너가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오히려 바둑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게 페어 바둑이다.

수정이가 과연 내 의도를 읽고 따라올 수 있을까?

그래, 그건  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이겠지.

“그럼 반대로 해볼까?”
“네!”

나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둘을 말렸다.

“둘  허접이면서 뭘 그렇게 싸우냐? 그만 싸워 새끼들아.”
“지는 니시카와 해설위원한테 공식전 상대전적 0대1로 학살당하는 중이면서 말이 많네.”
“아니 그건 예능이었잖아. 미친놈아.”

재영이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응~ 100집 넘게 차이 나면서  발리는 거 내가 봤어.~”

돌겠네 진짜.

내가  그런 예능에 나가서 이런 수모를 겪는 걸까.

“어휴…. 알았으니까 한  더 두자.”

내 요청에 휘운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금 더 두는  의미 없어 보이는데?”
“아니 이번에는 반대로 해보려고.”
“흐음…. 우리도 가끔 놓치는 걸 수정이가 읽을 수 있을까?”
“너무 어려운 노림수 없이 적당히 해봐야지.”

우리는 바둑판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페어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비교적 열세인 나와 수정이가 흑 돌을 잡았고, 내가 국면을 리드해가기로 했기에 우리 팀의 첫수는 내가 두는 상황.

나는 내가 즐겨두는 삼삼을 두...려다가 화점으로 손을 옮겼다.

삼삼 포석은 아주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는 복잡한 포석이기 때문에 수정이가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인지 포석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조금 헷갈릴 수도 있는 국면에서도 야무지게 따라오는 수정이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수정이는 포석 공부는 단순한 암기라며 싫어하지만 그래도 애가 착해서 시키면 곧잘 하는 편이었다.

싫어하면서도 꾸준히 공부가 성과를 보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최신 트렌드는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것 같은데 슬슬 과거의 포석들을 공부시켜야 하나.

그렇게 수정이가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생각을 하며 포석 국면을 넘겼다.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할까.

현 국면은 우리가 전체적인 실리를 얻은 대신 상대는 세력을 얻은 국면.

나는 실리를 확장하며 단단하게 굳히기 위해 하변을 보강했다.

이대로 실리를 취하다가 별일 없이 단단해지면 중원에 진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정이의 사전에 ‘실리’와 ‘굳히기’는 없다는 것을 너무 간과한 걸까.

아니면 내 눈에만 단순한 수순으로 보이는 걸까.

수정이는 내 의도를 파악하겠답시고 한참을 뚫어져라 바둑판을 쳐다보더니 나와 바둑판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어 바둑 도중에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법.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한참을 고민하던 수정이는 결국 무난한 수를 선택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뭔가 신경 쓰이긴 하네….

어쨌든 그런 미적지근한 분위기로 수순은 계속되었고, 결국 백의 세력이 완전히 굳혀지기 전에 뛰어들어야 하는 국면이 다가왔다.

사실 나 혼자 뒀다면 백의 세력이 저렇게까지 강해지기 전에 견제를 들어갔을 터였다.

수정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작 싸움을 걸었겠지.

서로를 배려해준답시고 적당히 둔다는 게 오히려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페어 바둑,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해볼까 싶었는데 두면 둘수록 나름의 복잡함이 느껴졌다.

나는 백의 세력이 굳기 전에 우변 세력의 3선에 뛰어들었다.

아직 공간이 넓어 자생을 도모할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살아남는 걸 넘어서서 중원 백 세력마저도 휘저을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국면이 복잡해질 텐데 걱정이네….

수정이는 내 걱정이 기우라는 듯 싸움이 시작되는 듯 하자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잠시 수를 읽어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쳐다봤다.

하긴 공격이라고 다 같은 공격이 아니긴 하다.

수정이가 좋아하는 공격 방식은 빠른 행마를 이용한 잽의 연타이다.

통하든 안 통하든 끊임없이 잽을 날려서 국면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고,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 싸움에서 이기는 방식을 즐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선택한 공격은 넓은 공간으로의 침투. 권투와 비교하자면 풀스윙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성공했을 때 주는 타격이 크지만 실패한다면 그만큼의 손해를 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공격.

그래서 나도 확실하지 않으면 침투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살아 나오는 길이 확실하게 보였다.

재영이와 휘운이가 중원이 휘둘리는  경계한다면 어렵지 않게 자생할 수 있고, 침투한 돌을 잡으러 들어온다면 중원을 휘두르는  뛰어나가다 상변의 세력과 합류하면 어렵지 않게  수 있는 국면이었다.

재영이도 나와 같은 수를 보고 있는지 중원이냐 우변이냐를 고민하는  고민이 길어졌다.

재영이의 선택은 침투한 돌을 위협하며 우변 굳히기.

그렇다면 다음 수는 간단했다,

중앙으로  칸만 뛰면 되는데….

수정이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우변을 굳히는 수에 응수했다.

그렇다고 저게 못 살 돌이 아니긴 한데, 대체 왜 중앙으로 뛰지 않은 거지?

살짝 답답해서 수정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나에게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었다.

수정이가 무슨 수를 읽고 있는 건지 정확하게  수가 없으니 답답함이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 국면은 나와 수정이가 무난하게 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변에 침투한 돌은 가까스로 두 집을 만들어 살았지만,  과정에서 백은  거대한 세력을 챙길  있었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중원에 진출한 것이다.

어떻게든 손을 써보고 싶었지만, 재영이와 휘운이도 6단의 벽을 넘어선 프로, 한번 잡은 승기를 쉽게놔주지 않았다.

193수 불계패.

무난한 패배였다.

우리가 돌을 던지자 재영이가 입을 열었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 어떻게 사제 기풍이 이렇게 정반대지?”

휘운이가 말했다.

“거의 매 수가 의견 충돌인데 그러면서도 바둑이 나름대로 진행되는  더 신기하지 않냐?”
“그나마 둘이 배려하면서 두니까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안 가는 거지.”

둘의 평가는 신랄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

비슷한 원칙과 성향인 기사들이 팀을 짠 페어 바둑 대회의 터줏대감들도 막상 대국 중에는 의견 차이가 나는 게 현실이다.

아예 성향 자체가 정반대인 나와 수정이의 의견 차이가 생기는  어쩔  없는 일이지.

그래서 바둑을 시작하기 전에 누가 국면을 리드해나갈지 정하고 시작한 거고.

그러니까 계속 의견이 갈리는데도 바둑 자체는 진행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나와 수정이의 바둑은 서로 어울리기 힘든 상극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이게 ‘기풍이 전혀 다르다’라는 단순한 이유로 이렇게 의견이 충돌되는 걸까?

나는 수정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반대로 수정이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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