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19국 -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 -2-
입단 대회 두 번째 날.
정도찬 해설위원은 첫 상대인 연구생 랭킹 7위의 상대를 가볍게 넘어서고 다음 상대를 맞이했다.
두 번째 상대는 꽤 큰 규모의 대회에서 우승해 연맹의 입단 대회 참가 자격을 얻은 참가자였다.
하지만 오늘도 정도찬 해설위원의 대국을 관전하고 있었던 나는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취학 아동의 신경질과 같은,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하는 바둑이었다.
상대는 조금만 실수해도 크게 당할 독을 담은 함정수를 남발했고, 신경을 건드는 꼼수를 숨 쉬듯 깔아놓았다. 아무리 봐도 제대로 바둑을 배운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꾼‘ 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듯했다.
그런 얕은수가 통할 리가 없었다. 함정이 파괴되고, 준비해둔 독은 통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패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돌을 던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쓰고,5회의 초읽기 중 4회를 다 써 가면서 버티고 또 버텼다. 결국, 공배 하나 남기지 않고 대국이 끝났다.
계가를 하자 당연하게도 정도찬 해설위원이 60집 이상의 차이로 크게 이겼다. 하지만 상대는 크게 졌는데도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획대로 되어간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게 이긴 정도찬 해설위원이 오히려 질렸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지친 정도찬 해설위원을 더욱 지치게 만들어 빈틈을 만든다.
상대의 노림수는처음부터 그것 하나였다.
정도찬 해설위원의 얼굴에 묻어있던 피곤함이 더욱더 짙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다음 대국, 정도찬 해설위원이 지쳤다는 것을 확신한 상대는 드디어 전심전력으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의 실착이었다.
비록 지쳤지만, 맹수는 맹수. 겁 없는 인간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자 맹수는 크게 화내며 인간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한낱 인간이 얕은꾀만 믿고 겁도 없이 맹수에게 달려든 대가는 처참했다. 단 97수 만에 싸움을 걸어온 대마가 잡히며 승부의 행방이 갈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자신만 추해지는 것을 안 것인지 상대는 시간을 끌지 않고 돌을 던졌다.
정도찬 해설위원이 결국 8부 능선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체력은 이미 한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제오늘, 이틀을 걸쳐 벌써 14번의 대국을 했다.
대충 한 번의 대국당 두 시간씩으로 계산해도 28시간 이상 바둑을 두고 있었다. 지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 상황에서 맞이한 시간 지연책은 정도찬 해설위원에게 치명타에 가까운 타격을 줬으리라.
정도찬 해설위원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간 지연책에 당했지만 두 번째 대국을 빠르게 끝냈기 때문에 그나마 10분의 휴식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의자에 쓰러지듯 누워 잠을 청하는 정도찬 사진]
10분의 휴식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시간이 지나도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는 정도찬 해설위원을 깨우기 위해 대회 진행위원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필자가 나중에 정도찬 초단(이때는 정식으로 입단하여 초단이었다)에게 그때의 심정을 넌지시 물어보자 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니까 10분이 지나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묘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두 개의 대회, 두 번의 결승, 하지만 남은 사람은 세 명.
정도찬 해설위원으로서는 피로가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제대로 된 휴식 없이 2연전을 치러야 할 상황이 다가왔다.
반면 동전 던지기에서 운 좋게 이겨 뒷순번 대국을 배정받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랭킹 5위의 연구생은 최소 대국 두 번이 치러질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정도찬 해설위원으로서는 동전 던지기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연맹 입단 대회 결승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딱 봐도 경험이 풍부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였다. 주변의 말을 들어보니 과거 연구생이었지만 나이 제한에 걸려 퇴출당하고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다가 다시 바둑계에 돌아왔다고 한다.
바둑계가 재부흥하고 연맹이 프로의 문을 넓히면서 바둑계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이 중년의 사내도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랭킹 5위의 연구생보다는 약한 상대이겠지만 쉽게 볼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중년 사내의 행마에는 오랜 세월 갈고 닦아온 경험이 서려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약함을 깨닫고 있는 듯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자 싸움을 계속 피하기 시작했다. 결국, 한쪽은 밀고 한쪽은 물러난다.
하지만 이곳은 넓디넓은 전장이 아니었다. 바둑판이라는 19*19의 좁은 전장, 순순히 승리를 양보할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맞붙어야 하는 숙명의전장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중년 사내는 마지막 힘을 짜내 돌파를 시도했으나 정도찬 해설위원이 더 정교했다. 견고한 세력은 마치 그물과 같아 발버둥 치는 상대를 오히려 더 옭아매었다.
비슷한 양상의 대국이 한 번 더 진행되고, 정도찬 해설위원의 승기가 확실해지자 중년 사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협회의 프로 자격도 따버리라는 덕담과 함께 미련 없이 돌을 던졌다.
이로써 정도찬 해설위원의 연맹 입단이 결정되었지만, 좌중의 그 누구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축하의 박수와 함께 마지막 대국이 준비되었다.
5분, 뒷정리와 세팅을 위해 협회가 정도찬 해설위원에게 허용한 마지막 휴식시간이었다.
정도찬 해설위원은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그를 본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협회 입단 대회 결승을 위해 들어오는 정도찬의 사진. 머리가 흠뻑 젖어있다.]
흐려지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인지 머리가 흠뻑 젖어있는 정도찬 해설위원의 모습이 보였다. 물기도 화장실의 핸드타월로 대충 닦은 것인지 핸드타월의 부스러기가 머리카락 사이에 껴 있었다.
여성 관전자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들려왔다.
확실히 얼굴이 되니까 저런 모습마저도 멋져 보이는 듯싶었다. 만약 필자가 저러고 마누라에게 갔으면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을 텐데 내심 부러웠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정도찬 해설위원은 대기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던 한소율 연맹장은 어디선가 수건을 가져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물기를 닦아주고 핸드타월의 부스러기를 뗐다.
그녀 나름의 응원인 듯했는데, 이미 정도찬이라는 대어를 낚은 입장이어서 오히려 그가 이번 대국에서 지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그녀가 정도찬 해설위원을 응원하는 것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짧디짧은 5분의 휴식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대국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 관전하던 모두가 숨을 죽이고 대국을 지켜봤다.
사방이 조용해졌고, 바둑돌 두는 소리와 계시기의 초침 소리만 울려 퍼졌다.
첫 대국은 정도찬 해설위원의 신승, 하지만 결국 체력의 한계를 맞이한 것일까. 두 번째 대국의 초반 형국은 명백한 정도찬 해설위원의 열세였다.
지금까지의 모습은 어디 간 것인지 시종일관 밀리는 모습을 보이던 정도찬 해설위원은 승기가 넘어갔음을 느꼈는지 깊게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손이 가는 대로 두는 듯싶었다.
사실상의 패배 선언이었기에 그 모습을 관전하던 필자 역시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쩌면 바둑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도전이 마지막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좌초되는 분위기였다.
결국, 183수에 정도찬 해설위원이 돌을 던졌다.
그의 공식전 첫 패배로 기록될 가장 중요한 순간의 패배였다.
사실 그가 돌을 던지는 순간 필자를 포함한 관전자 대부분이 그의 도전은 여기까지라고 느꼈을 것이다. 정도찬 해설위원은 훌륭했으나 도전에는 실패했다, 소위 말하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제3국. 반전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지독히도 인공지능을 닮은 기풍은 온데간데없이, 정도찬 해설위원의 손끝에서 유려하고 날렵한 행마가 펼쳐졌다. 그 모습은 마치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듯 끔찍한 파괴력을 보였다.
천변만화, 행마가 끝없이 변화한다. 상대가 휘두르는 칼을 유려하게 흘린다. 오히려 상대방의 행마를 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는 듯 상대의 행마를 끊는 여유도 보인다. 때로는 천천히 단단하게, 때로는 빠르고 강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흘리고, 때로는 강하게 꾸짖는다.
승기를 잡은 정도찬 해설위원은 더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속 끌려다니던 상대 역시 잘 됐다고 반색하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원초적인 주먹질이 오가는 듯 서로 때리고 맞고를 반복하듯 착점의 소리가 일정해졌다.
두 사람의 돌이 얽혀들었고 수순이 계속 진행되자 기력이 그렇게 높지만은 않은 필자의 눈에 보일 정도로 승부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지던 착점 소리가 멎었다.
패자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지고, 승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도찬 해설위원의 승리였다.
[삼국지 관우의 이미지]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삼국지에는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는 고사가 있다.
모르는 독자님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조조에게 항복했던 관우가 유비의 행방을 알게 되고 그에게 가기 위해서 그의 길을 막는 다섯 관문을 넘으며 여섯 장수를 벤 이야기이다.
그 날 입단 대회에서 자신의 앞을 막은 다른 참가자들을 넘어서며 목표를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던 정도찬 초단의 모습과 유비에게 가기 위해 다섯 관문을 넘으며 여섯 장수를 벤 관우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뿐일까?
오늘날 오관참육장으로 자신의 충의를 널리 알린 관우가 군신으로 추앙받는 것처럼 지금 바둑계에 불어오는 초단 열풍의 장본인 중 한 명인 정도찬 초단의 앞길에도 밝은 미래가 가득하길 기원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ㅇㅇ일보 한지원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