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18국 -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 -1-
<사회부 기자가 보는 바둑 21 –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
[상패를 받고 있는 정도찬 초단의 사진]
요즘 정도찬 초단의 입단에 바둑계가 떠들썩하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정도찬 초단…. 그러니까 그때에는 정도찬 해설위원이 연맹과 협회 동시 입단을 선언했을 때 바둑계에는 폭탄이 떨어졌다.
수많은 바둑 팬들이 전례 없던 도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둑 기자들은 동시 입단의 가불가부터 시작해서 정도찬 해설위원을 비판하거나 지지하는 칼럼을 내놓았다.
또한, 필자를 포함한 기자들은 한소율 연맹장과 유시운 협회장 그리고 정도찬 해설위원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기도 했으며, 만약 동시 입단에 성공할 경우 그에 따른 승단 포인트 계산은 어떻게 해야 할지의 문제 등이 수면위에 떠오르기도 했다.
[협회와 연맹의 공식 발표 보도자료 사진들]
결국, 연맹과 협회는 비슷한 시기에 ‘규정상 문제없음’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할 거라면 해 보라는 듯 올해의 입단 대회 날짜를 같은 날로 맞췄다.
사실 필자는 올해 입단 대회 일자를 확인했을 때 연맹과 협회 양측이 규정상으로는 문제가 없으니 도전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겠지만 사실상 거부라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회 일정표 사진]
그 발표가 7월이었고, 입단 대회는 9월이었으니 정도찬 해설위원은 단 2개월 만에 연맹과 협회 양쪽의 입단 대회 참가 자격을 얻어야 했고, 설령 참가 자격을 얻는다고 해도 같은 날에 진행되는 두 개의 입단 대회에서 최소 우승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정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여기서 독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입단 대회 참가 자격에 대한 말을 잠시 하자면. 우선 연맹의 입단 대회 참가 자격은 연맹 주최의 참가자 128인 이상 대회 우승 1회 혹은 준우승 3회로 바둑계의 규모가 이전보다 커진 지금 그렇게까지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정도찬 해설위원이 동시 입단 도전 선언을 한 것은 7월이었고, 7월부터 9월의 입단 대회 사이에 열릴 예정인 연맹 주최의 참가자가 128인 이상인 대회는 전국 ‘상신배 아마바둑 최강자 선발전’이 유일했으니 정도찬 해설위원으로서는 단 한 번의 도전으로 우승을 해야 최소한의 참가 자격을 얻는 셈이었다.
심지어 협회의 입단 대회 참가 자격을 얻는 것은 더 어려웠다. 연맹 출범 이후로 안 그래도 좁은 문을 더 걸어 잠근 협회에서는 1년에 딱 5명의 입단자가 나오는데 그나마도 그중 세 자리는 한국기원 연구생 상위 조 랭킹 1, 2, 3위의 자리였으며 한 자리는 4위부터 20위까지의 연구생들의 풀리그로 나머지 한 자리가 정해진다.
결국, 연구생이 아니고 연구생이 될 수도 없는 정도찬 해설위원으로서는 남은 한 자리를 노려야 했는데, 이 자리가 바로 상기한 연구생 풀리그 전에서 우승자를 제외한 상위 15명과 문화체육관광배 전국대회의 우승자 한 명으로 이루어진 협회의 입단 대회 우승자를 위한 자리였다.
즉 정도찬 해설위원으로서는 문체부배 전국대회 우승이 유일한 입단 대회 참가 방법이었는데 이 대회는 말 그대로 ’전국대회‘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모두 제한 없이 참가 가능한 아마추어가 참가 가능한 대회로서는 가장 수준이 높은 대회였다.
[무심하게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하윤서 초단의 사진]
지금까지 이 루트로 협회에 입단한 아마추어는 충격의 입단 후 ’바둑은 취미입니다‘ 선언을 하고 아직도 공식 대국은 거의 안 하는 하윤서 협회 초단 단 한 명뿐이었으니 그 난이도가 짐작이 갈 것이다.
어쨌든, 입단 대회 참가 자격조차 얻는 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입단 대회 일정까지 같은 날로 맞춰버렸으니. 사람들이 결과를 보기도 전에 정도찬 해설위원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필자가 운 좋게 정도찬 해설위원의 주변인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 그들은 모두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불가능하지 않다.‘
[농신배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정도찬의 사진]
[문체부배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정도찬의 사진]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정도찬 해설위원은 7월의 농신배와 8월의 문체부배 양 대회에서 너무도 쉽게 우승을 거머쥐고 연맹과 협회의 입단 대회 참가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이때 까지만 해도 아직 사람들은 정도찬 해설위원의 동시 입단 성공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정도찬 해설위원은 3전 2선승의 16강인 연맹 입단 대회와 마찬가지로 3전 2선승의 16강인 협회 입단 대회에서 전승한다고 쳐도 최소 16국에 최대 24국까지 늘어날 수 있는 일정을 2일 만에 소화하는 강행군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상대들이 보통 상대들인가?
전국대회에서 고르고 고른 아마추어 최고수들과 바둑 인재의 요람인 한국기원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해있는 연구생들이 그 상대였으니….
정도찬 해설위원의 도전 성공은 요원해 보였다.
그나마 정도찬 해설위원에게 다행이었던 점은연맹측의 협조로 대국 시간이 겹쳐 부전패를 할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과 연맹과 협회 양측의 입단 대회는 항상 한국기원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이동시간을 걱정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대회 당일 한국기원의 풍경 사진]
그리고 9월 입단 대국 당일, 필자 역시 한 명의 바둑 팬으로서 그 도전의 현장을 눈에 담기 위해 한국기원으로 찾아갔고. 덕분에 운이 좋게도 이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현장의 증인으로서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여름의 무더위가 지나가 햇살마저 포근한 가을이었지만 입단 대회 당일 한국기원의 분위기는 포근하지만은 않았다.
서른한 명의 참가자와 두 개의 대회. 그리고 두 개의 자리. 심지어 참가자 중 한 명은 혼자 두 자리를 노리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았을까?
대회 참가자 한 명 한 명에게서 굳은 결의가 보였고 특히 벼랑 끝에 몰려 마지막 한 자리만을 남겨두고 있는 연구생들의 분위기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중이나 다름없는 필자마저도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참가자들의 시선은 한 명만을 쫓고 있었다.
’공공의 적‘ 그 상황의 정도찬 해설위원을 표현하는데 이것보다 어울리는 말이 있었을까.
하지만 정도찬 해설위원은 눈 앞에 펼쳐진 적의 진용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다스리듯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입단 대회의 시작되었다.
[입단 대회 시작 직후의 사진]
한국 바둑의 중심지이자 기예의 장이 핏빛 전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서른 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한 명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국 그 한 명의 목에 칼을 들이밀기 위해서는 자기들끼리도 서로 싸우고 또 싸워야 했던 것이다.
그래, 정도찬 해설위원은 이미 이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적의를 보내고 있다고 해도 이 전쟁은 서로 물고 무는 난전이 아닌 단기필마로 맞붙을 수밖에 없는 일기토라는 것을.
그리고 일정상 네 명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하루의 휴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핏빛 전장, 그 위에서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도찬 해설위원이었다.
첫 상대인 한국기원 연구생이 그의 앞에 나섰다, 그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하긴 그 역시 당당한 한 명의 프로가 되기 위해, 그리고 바둑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노력한 한 명의 바둑 기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도찬 해설위원에 비해 그의 행마는 느렸지만 우직했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지만 크게 손해를 보지도 않았다. 서로 주고받고, 밀고 밀리는 것을 반복했다. 자잘한 상처가 서로의 몸에 새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승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정도찬 해설위원이 내리 2승을 거두면서 첫 번째 관문을 넘어섰다.
두 번째 상대는 연맹 주최의 지역대회에서 우승한 아마추어였다. 기원 죽돌이인 필자는 그의 바둑에서 기원 특유의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 꼼수와 너무 대놓고 보여 오히려 어이가 없는 암수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상대를 이기는 것은 정도찬 해설위원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또다시 2연승. 이제야 두 번째 관문을 넘어섰다.
기세를 탄 정도찬 해설위원에게 대진운마저 따랐다. 비교적 약한 연구생들과 우승자들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 날 정도찬 해설위원은 무난하게 연맹 입단 대회 4강과 협회 입단 대회 4강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하루의 휴식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하루의 휴식이지, 어느새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집에 돌아가봤자 얼마나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 다음 날 늦지 않고 여유롭게 대회장에 도착하기 위해는 일찍 일어나야 했으니 그렇게 길게 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입단 대회 2일 차 정도찬의 사진 많이 피곤해 보인다]
다음 날, 나는 정도찬 해설위원에게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는지 넌지시 물어봤고, 정도찬 해설위원은 쓰게 웃으며 겨우 네 시간 잤다며 작게 불평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닌 듯 필자는 그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