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2국 - 내자불거(來者不拒)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고 하던가.
요즘 나는 그 말에 뼈저리게 공감하고 있었다.
휘운: 정하~
휘운: 정공좌 하이라는 뜻
휘운: ㅋㅋㅋㅋㅋㅋㅋㅋ
재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영: 어떻게 사람 별명이 정공 ㅋㅋㅋ
나 : 거기까지 해라
나 : 뒤지기 싫으면
진짜 아주 건수 하나 잡혔다고 끝도 없이 놀린다.
아직도 가끔 ‘나와 계약해서 마버, 아니 해설자가 되어 줄래?’라고 말한 한소율이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나는 두고 보자며 속으로 칼을 갈았다.
세연: 아주 스타 다 되셨어?
세연: 연맹장에 아이돌에 아주 양손의 꽃이네?
세연: 좋으셨겠다~
나: 얘 왜 이러냐?
휘운: 몰라
재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두 놈은 놀리고 한놈은 갈구고
어휴….
“뭘 그렇게 재밌게 봐요?”
“친구들이에요.”
나는 한소율 연맹장과 함께 유명한 상담사에게 찾아가 상담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도찬 씨가 정말 승리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거라면 그건 새로운 종류의 정신질환일 겁니다. 만약 제가 최초 발견자라면 정도찬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작습니다.’
‘도찬 씨는 승리라는 행위를 두려워 하는 게 아니에요.’
‘도찬 씨의 승리라는 원인 때문에 일어날 무언가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거죠.’
‘그 결과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죠,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
‘패배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셨죠? 그건 패배에 익숙해진 게 아니에요, 그걸 도찬 씨가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무슨 말이냐고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기합리화에 가까워요, 나는 진 게 아니다 져 준 거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기한 점은 이런 식의 자기합리화는 승부욕이 강한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도찬 씨의 행동을 보면 전혀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아요.’
‘자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우선 그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둑을 두신다고 하셨죠? 실력이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혹시 최선을 다했는데 져 본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이 증상이 생긴 후에요.’
‘인공지능이요? 그건 논외로 쳐요, 인공지능에는 감정이 없잖아요.’
‘일단 제대로 지는 것부터 시작해보죠.’
제대로 진다, 그 말이 내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승리만 두려워하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래서 도움은 좀된 것 같아요?”
한소율 연맹장은 환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담사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나와 상담사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글쎄요,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더 복잡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쓰게 웃었다.
-*-*-
어느새 6월.
상담사에게서 받은 숙제와는 별개로 나는 해설자로서의 일을계속해나갔다.
바둑계에서 일하면서 크게 느낀 점이 하나 있다면 정휘운의 친구라는 사실이 때때로 큰 도움이 된다는것이었다.
어딜 가든 ‘그래 댁은 어디의 뉘쇼?’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창연 도장 출신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열에 아홉은‘호옥시 정휘운이라고 아쇼?’라는 질문을 했고 ‘네 친구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휘운이 금마 친구면 내 친구지 마! 우리가 남이가!’가 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미친 친목질 마스터 새끼….
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걸까.
나중에라도 물어봐야겠다.
어쨌든 이렇게 생긴 인맥은 가끔 여러 가지 형태의 부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거…. 사실 이번에 그러니까 다음 주 토요일하고 일요일에 LC에서 작게 아마추어 대회를 개최하는데 스폰서 분들이 시니어 준결승전하고 결승전 정도는 방송으로 내보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뭣이냐…. 아무리 인터넷 방송이더라도 해설자가 없으면 좀 거시기 하니까...”
“아, 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 대회 아직 참가신청을 할 수 있나요? 제 제자도 슬슬 대회 경험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어우, 정 해설 제자면 안 되도 되게 만들어야지.”
아니 그래서 되냐고 안되냐고….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참가신청은 어디서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알아서 전달할 테니까 나한테 말해줘요.
“아, 감사합니다. 애 이름은 김수정이고 10살 초등학생입니다.”
-그럼 주니어로 신청 넣으면 될까?
“아뇨.”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알기로 이번 LC배 아마추어 대회에는 초, 중, 고등학생이 참가하는 주니어부와 시니어부가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정이가 주니어부에 들어가는 건 수정이를 상대할 아이들 입장에서는 재앙으로 느껴질 정도로 수준 차이가 크게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니어로 부탁드립니다.”
-오카이! 제자 실력이 좋나 보네. 아, 그리고 아마추어 대회니까 좀 살살 해줘
“네 알겠습니다.”
어쩌면 내 제자의 첫 공식전을 내가 해설할 수도 있겠는데?
나는 옆에서 자기 이름이 들리자 안 듣는 척 훔쳐 듣고 있는 수정이의 반응을 살폈다.
눈이 똥그래진 게 갑작스러운 대회 참가 소식에 놀란 모양이었다.
“스승님, 저 대회 나가요?”
“그래, 다음 주 토요일. LC배 아마추어 대회.”
“정말요?제가 벌써 대회에 나가도 되는 거예요?”
“그래.”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첫 대회니까 긴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의문이 들었다.
“대회 나가는 게 그렇게 좋아?”
“네!”
자세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얼마 전 이루아가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한 것을 엄청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넌 아직 실력이 안 되니까 대회도 못 나가는 거야!’라며 엄청 놀렸다고….
그나저나 몰랐는데 수정이랑 루아랑 연락하고 지냈구나.
수정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루아한테 보내는 건가?
그래도 둘이 나름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루아에게 대회 출전을 자랑하던 수정이는 루아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갑자기 왜 저러지?
그 후로도 몇 개의 메시지를 주고받더니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무슨 일 있니?”
“루아도 다음 주 토요일에 대회 참가한대요.”
“뭐?”
“시니어부라는데 저도 시니어부 맞죠?”
“어, 맞는데?”
“스승님! 오늘부터 포석 공부 두 배로 할게요!”
그렇게 말하는 수정이의 눈은 조용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긴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왔으니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가긴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싫어하는 포석 공부를 두 배씩이나?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철저하게 제자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스승으로서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아…. 생각해 보니까 30분만 더해도 될 것 같아요….”
“이미 늦었단다.”
“흐에에에!! 포석 시러어...”
수정이는 다음 주 토요일까지의 포석 공부를 두 배로 할 생각에 벌써힘이 빠지는지 의자 위에서 녹아내렸다.
수정이의 테라버닝 이벤트가 예약되었다.
본인이 이벤트라고 느낄지는 의문이지만.
-*-*-
대회 당일, 수정이는 드디어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좋았는지 대회장에 가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좋아?”
“네! 이제 포석 공부 두 배로 안 해도 돼요!”
“......?”
왜 그걸 좋아하고 있는 건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포석만 극복하면 연맹 초단 정도는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수정이는 아직 어리고 지금이라고 아예 포석 공부를 안 하는 건 아니니까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좀 어때? 자신 있어?”
“지옥의 포석 수련을 마친 저는 무적이에요!”
“어…. 그래….”
참고로 수정이는 하루에 포석 공부 딱 두 시간 했다.
어휴…. 그래도 떨려서 제대로 실력발휘도 못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쨌든 그렇게 묘하게 텐션이 높은 수정이를 대리고 대회장에 도착하자 수많은 인파가 장관을 이루는 광경이눈에 들어왔다.
이제 바둑 대회는 가는 사람만 가는 휑한 축제가 아니었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광경은 상상도 못 했을텐데.
나는 수정이의 손을 잡고 관계자용 출입구로 향했다.
“정공좌다!”
“오늘 정 해설위원도 오는 거였어?”
“아니 정공좌해설은 내일인데?”
“옆에 애는 누구지? 딸인가?”
“정공좌 나이가 스물다섯인데 저렇게 큰 딸이 있을 리가 없잖아. 병신아.”
그동안 활동하면서 나도 바둑팬들 사이에서 꽤 인지도가 쌓인 듯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경험은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정공좌라는 별명은 여전히 싫지만, 한소율 연맹장은 이 정도로 임펙트 있는 별명은 평생 가는 법이라며 이제 슬슬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더라. 어차피 공식 석상에서는 못 쓰는 별명인데 뭐 어떠냐며.
그러면서 나를 놀리듯 이 별명이 싫다면 이 별명보다 임펙트 있는 별명, 예를 들면 스승님의 명인 타이틀이나 한세빛 국수의 국수 타이틀을 따라는데 실실 웃으면서 놀리는 꼴이 너무 얄미웠다.
그 여자는 요즘 나 놀리는 재미로 사는 거 아닐까?
대회장 안쪽으로 들어가서 대진표를 확인하니 수정이는 A블록 루아는 B블록 소속이었다.
둘이 만난다면 그건 결승이라는 의미였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하네.
애초에 둘다 결승에 올라갈 수는 있을까?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아! 루아다!”
수정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자 사람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 루아가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루아가 주목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세빛 국수가 주목을 받고 있는 거였다.
하긴 나도 오늘 해설은 없는데 수정이를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같이 왔다.
루아도 아직 어리니까 혼자 보낼 수는 없었겠지.
인사는 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어차피 한세빛 국수도 관계자용 대기실로 올 테니까 거기서 만나서 인사할까.
수정이는 바로 루아에게 달려가서 선전포고라도 할 기세였지만 나는 그런 수정이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아니,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결승에서 못 만나면 쪽팔려서 어쩌려구….
수정이를 대국장으로 데려다주고 관계자용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축사를 마친 국수가 관계자용 대기실에 들어왔다.
나는 바로 일어나서한세빛 국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정 해설, 오랜만이네요. 내가 진작 찾아갔어야 했는데 요즘 활동하랴 애 키우랴 정신이 없지 뭡니까.”
“찾아오시다뇨,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세빛 국수는 아직도 내가 루아를 하루 맡아준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의 훌륭한 품성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루아가 수정이 이야기를 많이 하지 뭡니까.”
“하하하, 수정이도 루아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
수정이가 루아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 건 사실이다.
그게 반쯤 욕이라서 그렇지….
“둘이 입문 시기도 비슷하니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러게요, 저 나이에 생긴 친구가 평생 가는 법인데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바둑 기사의 애환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취미는 거의 즐길 겨를 없이 바둑에만 매진하다 보니까 학교에서 제대로 친구를 사귀는 경우가 적다.
수정이만 해도 하교 종이 치자마자 바로 기원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게 일상이고, 나 역시 학교에 다닐 때는 수정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 때는 바둑 중학교나 바둑 고등학교 같은 특성화 학교도 없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더 힘들었고.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친구가 셋 밖에 없는 건 이런 이유다.
내가 아싸라서가 아니다.
진짜다.
“그나저나 수정이는 어디 중학교에 입학시킬 생각인가요? 일반 중학교? 아니면 바둑 중학교?”
“아, 저는 바둑 중학교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반 중학교에서는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를 만나는 게 힘들지 않을까 해서요.”
“루아의 부모님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던데 어쩌면 두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난 잠시 수정이와 루아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상상을 했다.
음…. 매일 싸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까 정 해설, 해설 실력을 보아하니 바둑 실력도 보통이 아닌데 왜 아직 입단을 안 하는 거죠?”
내가 한세빛 국수에게는 트라우마에 대해 말 한 적 없던가?
“아…. 그건….”
‘일단 제대로 지는 것부터 시작해보죠.’
그 순간 상담사가 한 말이 생각 난 건 우연이었을까.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다.
제대로 깨지는데 이만한 사람도 없겠지.
“...저와 대국을 하셔서 이기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한세빛 국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들었다면 내 말이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첫국수 타이틀을 따고 직접 그의 쥘부채에 적은 네 글자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
그가 이런 말을 아주 좋아 할 것이라는걸.
한세빛 국수는 너무 오래 들고 다녀서 색이 바랜 쥘부채를 멋들어지게 펼치며 대답했다.
“그거 마음에 드네요.”
내자불거(來者不拒)
오는 사람은 물리치지 않는다.
‘다 덤벼’라는 말을 우아하게 순화한 네 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