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택일 (7) >
일주일 전.
아직 이른 아침, 이도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물었다.
-이도원 씨 맞으신가요?
“그런데, 누구시죠?”
이도원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갖가지 채소가 뒤섞이고 있는 믹서를 껐다. 시끄러운 믹서 소리가 사라지자 남자의 목소리가 더 정확히 들려왔다.
-전 김봉민 의원님의 비서실장인 남대경이라고 합니다. 의원님께서 도원 씨를 한 번 뵙고자 하셔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김봉민 의원?’
이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국회의원과 친분이 없었다.
“무슨 일로 저를 뵙고자 하시는지…….”
-그건 만나보시면 알 겁니다.
상대는 목적을 완벽히 감추었다. 궁금해서라도 보게끔 만들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호기심이 동한 이도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상대가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오라는 대로 냉큼 가줄 생각은 없었다. 정치권과 연예계 모두 대중에게 노출되는 바닥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상대는 이런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오후 한 시, 백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뵙고 자세한 말씀을 드리죠. 괜찮으십니까?
“예.”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남자는 이도원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편 통화를 종료한 이도원은 이상백에게 전화를 했다.
-도원이냐?
“예. 대표님.”
대답한 이도원이 방금 전 일에 대해 물었다.
이상백은 깜짝 놀라며 진지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오늘 한 시에 김봉민 의원을 만나기로 했다고?
“예. 근데 왜 저를 찾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연예인을 통해 정치적 인지도를 높이려는 속셈이 아닐까 싶다.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본인도 직접 정치 참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저는 응할 생각이 없는데, 곤란한 제안을 받을 수도 있겠군요.”
-크게 부담은 갖지 말거라. 대인관계를 넓혀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도원은 외출 준비를 마친 후 자가용을 타고 백 엔터테인먼트 사무실로 갔다. 임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대표실로 들어간 그는 비서에게 김봉민 의원과의 오후 한 시 약속을 알리고, 매니지먼트 사업부 부장과 앞으로 스케줄에 대한 논의하기로 했다.
젊고 톡톡 튀는 느낌의 보라색 정장을 빼입은 사십 대 중년인, 매니지먼트 사업부 부장이 들어와 보고했다.
“이번 영화 <서커스>는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이 대거 투입됩니다. 때문에 배우들 간 스케줄 조율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차지은 씨는 여주인공 역할이니만큼 전속모델을 제외한 광고들은 이번 달 내로 정리할 계획입니다.”
그는 차지은이 현재 계약되어 있는 광고 관련 서류를 건네주었다. 이어서 같은 식구인 박아현, 오준식, 심재빈의 서류들도 함께 넘기며 설명했다.
“서류에도 나와 있지만 <시네마 천국> 제작사 측에서 배우들의 개런티를 상한가로 제시해주었습니다. 대신, 대표님의 개런티를 하향해달라는 요청을 했고요.”
이도원의 개런티는 나머지 배우들의 몸값을 모두 총합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다른 배우들에게 최고 수준의 몸값을 지불하더라도, 이도원의 몸값을 낮추는 쪽이 이득인 것이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십시오. 어차피 <서커스>는 유태일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받는 조건으로 개런티와 관계없이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던 작품입니다.”
“유 감독님께서 그 사실을 제작사에 알리지 않으셨나 보군요. 대표님이 최대한 합당한 개런티를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말에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워낙 센스가 있는 분이니까요.”
그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서류를 챙겨 일어났다.
“한 시에 만나기로 약속된 손님이 있어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서류를 검토해서 결재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곧 매니지먼트 사업부 부장이 나갔고, 이도원이 서류를 검토했다. 그리고 이십 분 후, 12시 50분경 인터폰이 켜졌다.
-대표님. 김봉민 의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기계적인 비서의 목소리를 들은 이도원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다과 준비해주세요.”
이윽고 김봉민 의원과 아침에 전화통화를 했던 비서실장 남대경이 함께 들어섰다. 이도원이 자리를 권하자 소파에 앉은 김봉민 의원이 악수를 청했다.
“영화나 TV에서 보던 분을 이렇게 직접 뵈니까 기분이 묘하군요. 영화나 드라마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정말 쉼 없이 일하시는 것 같더군요. 승승장구하여 넓은 세계로 나아가시는 모습도 그렇고, 젊은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줄 표상과도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도원이 손을 맞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짧게 대답한 이도원은 부언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칭찬을 들었을 때 경계부터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도원의 담담한 모습을 관찰하던 김봉민 의원이 눈을 반짝였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어깨를 두드려주는데 조금도 흔들림이 없군.’
피식 웃은 김봉민 의원이 입을 열었다.
“뭐,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오늘 내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바로 김진우 때문입니다.”
“김진우요?”
이도원은 되물으며 저편에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전날 차광열 회장의 장례식장에서 이로빈과 차기열, 김봉민 의원이 나누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김진우의 아버지였어.’
이도원의 표정을 빤히 응시하던 김봉민 의원이 운을 뗐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눈치로군요. 이야기가 빠르겠어요. 난 <서커스>란 영화에서 김진우가 빠지길 원합니다. 김진우 덕에 돈을 벌고 있는 레드 엔터테인먼트와 긴밀한 관계인 제작사는 말을 안 듣고… 유태일 감독에게 말을 해봤지만 꽉 막혀있더군요. 그래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다른 사람, 도원 씨를 찾아온 겁니다.”
이도원은 이번 영화의 확실한 주역이었다. 즉 권한을 행세하려 마음만 먹으면 김진우를 제외할 수 있었다.
김봉민 의원은 이미 이 점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렇잖아도 유 감독과 친분이 있으니 어려운 부탁은 아닐 겁니다. 이번에 도와준다면 나는 도원 씨가 하는 일을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그렇잖아도 할리우드 진출같이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훌륭한 업적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어요.”
이도원은 때마침 비서가 내온 다과를 빤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이번 부탁은 사양하겠습니다. 유 감독님이 뜻하지 않는 일을 제가 할 수는 없으니까요.”
김봉민 의원은 찻잔을 들어 허브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음, 이유를 모르겠군요. 이건 뒷돈이 오가는 비리도 아닐뿐더러 인간관계일 뿐입니다. 한 번의 판단으로 천군만마를 얻을 수도 있는데 왜 거절하는 겁니까? 안 그래도 레드 엔터와 사이가 나쁜 판국에 나와 관계를 맺는다면 든든한 보험이 될 겁니다. 더구나 경쟁자인 김진우가 빠지면 도원 씨로서도 더 주목받을 수 있는 호재 아닙니까?”
김봉민 의원의 말은 요목조목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가 이도원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도원은 의외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래저래 저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이유를 말씀드리면… 저는 유 감독님과 신뢰를 저버릴 수 없고, 김진우 씨의 가정사에 개입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업계의 동료로서 김진우 씨는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고, 좋은 경쟁자입니다.”
그 말에 김봉민 의원이 눈을 감고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더는 부탁을 할 수 없겠군요.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이도원 씨가 거절하면 난 이 길로 레드 엔터로 가서 문을 두드릴 생각입니다.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진우를 이번 영화에서 뺄 겁니다. 그럼 결과는 같아지지요. 그리고 다음으로, 이도원 씨의 활동을 막을 겁니다.”
“협박이군요.”
그 말에 김봉민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받아들이기 나름일 겁니다.”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도 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외압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 우스운 것이다. 수백억이 투자된 영화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웃어?’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 김봉민 의원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도원의 입이 열렸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완강한 거절을 당한 김봉민 의원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너무 대쪽 같으면 부러지게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이만하면 거절할 수 없이 좋은 제안 같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한 김봉민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실장 남대경과 사무실을 나갔다.
이도원은 한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감당하기에 큰 적을 만든 것 같네.’
그렇다고 유태일 감독의 의견에 반하는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이도원은 입가를 훔치며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대비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레드 엔터와 김진우의 관계를 무너뜨리겠다고?”
유태일 감독의 질문에 잠시 지난 일을 회상하던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독님께도 김봉민 의원이 찾아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봉민 의원은 레드 엔터에도 찾아갔을 겁니다. 같은 요구를 했겠지만 레드 엔터 쪽에선 들어줄 수 없었겠죠. 그래서 새로운 제안을 했을 겁니다. 이번 영화를 통해 인지도를 올린 후 김진우에게 최대한 뽑아먹고 처리하겠다고 말입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김진우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곰곰이 생각하던 유태일 감독이 중얼거렸다.
“단단히 뿔이 나겠지. 레드 엔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고.”
“맞습니다. 김진우는 아직 팽 당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알려줘야 합니다.”
유태일 감독은 선뜻 수긍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보자. 김진우가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콩밭으로 갈 텐데… 촬영에 집중할 수 있겠어?”
복잡한 문제였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감독님은 김 의원한테 협박 안 받으셨어요?”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협박?”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에 이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 협박을 했거든요. 자기 말 안 들으면 앞으로 활동 못 하게 될 줄 알라고.”
그 말을 들은 유태일 감독은 얼굴을 붉혔다.
“이것들이… 작작 좀 해야지, 남의 영화에 감 놔라 배 놔라…….”
중얼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조금 기다려 봐라. 아마 나한테 협박을 하지 못한 건 아버지 때문일 거야.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대학병원 병원장은 대한의사협회나 학회에서도 영향력이 크거든. 아무래도 동문 중 정치하는 사람들도 다수다 보니 정치권까지도 선이 닿아있고. 그러니 네 문제는 내가 말을 해보마.”
유태일 감독은 줄도, 백도 없는 이도원과는 달리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도원은 고마운 한편 어딘가 속이 쓰렸다.
‘서러워서 원.’
< 양자택일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