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51화 (151/178)

< 양자택일 (6) >

2025년 1월 10일 <서커스> 오디션 당일, 국내 최고의 영화제작사 ‘시네마천국’ 본사.

영화 <서커스>는 순 제작비만 300억 원, 이후 투입된 P&A(Print&Advertisement: 마케팅, 배급비용)을 포함하면 400억 원 가량이 투입된 국내 초유의 블록버스터였다. 따라서 영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평소보다 큰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국내 시장만을 노린 영화가 아니야.’

오디션 룸에 도착했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느낀 이도원은 한 가지 생각을 더 떠올렸다.

‘중국,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김진우를 밀어줄 수도 있겠어.’

아니나 다를까 유태일 감독의 표정이 불편했다. 그는 이도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언질 했다.

“제작사 측 사람이 들어오면 분명 김진우에게 후한 점수를 배점하라고 주문할 거다. 신경 쓰지 말고 소신껏 해라.”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김진우와 정성우의 확률이 반반이 된 셈이었다. 한국시장을 노린다면 <악마의 재능>에서 비슷한 배역을 맡은 적 있는 김진우보다 정성우를 형사 역할에 섭외해야 될 테고, 아시아 전체를 공략하려거든 티켓 파워가 확실한 김진우를 섭외하는 편이 흥행에 유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태일 감독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작과 이미지가 겹쳐서 좋을 건 없다. 조연으로라도 김진우가 출연만 하면 충분히 중국, 일본 시장에 티켓 파워를 가질 수 있어. 그다음은 영화의 질로 승부하면 돼. 하지만 제작사 측 사람은 김진우에게 힘을 실을 거다.”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에게 은근히 정성우를 밀어주는 배점을 권하고 있었다. 이미 <악마의 재능>에서 김진우의 연기기복으로 인해 최고점을 찍지 못했던 유태일 감독으로서는 믿음이 안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도원이지만, 그는 중립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실력을 보고 결정하시죠.”

그 한마디에 스스로 너무 성급했다고 느낀 유태일 감독은 얼굴을 붉히며 머쓱하게 동의했다.

“물론 그래야겠지.”

그때 제작사 ‘시네마천국’ 측 간부와 김진우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들어섰다. 정성우는 조금 떨어져서 뒤를 졸래졸래 따라온 모습이, 이미 제작사 간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김진우로 낙점했군.’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점수표에 나타나있는 오디션 순서를 확인했다. 김진우가 먼저, 정성우는 그 후였다. 그 사이 제작사 간부가 곁에 착석했고, 눈인사를 나눈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두 분 심사자님께서 동의하시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도원은 펜을 들어 점수표에 이름을 적고 말했다. 그가 깍지를 끼며 김진우에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김진우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준비됐으면 시작해주세요.”

제작사 간부는 묵묵히 김진우를 지켜보았다.

앞으로 나선 김진우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배우 김진우입니다.”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흥미진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마주한 김진우는 기분이 불쾌했다.

‘날 평가한다고 해서 우위에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똑똑히 느끼게 해주지.’

김진우가 마음을 비우고 껌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그는 앞을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가면 좀 치워봐. 이수한.”

잠시 후 김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재차 말했다.

“얼굴 좀 보자. 증거가 없어서 잡아 가지도 못하는데.”

단 두 마디를 던졌을 뿐이지만 심사자들은 알 수 있었다. 김진우가 캐릭터의 작은 습관이나 표정 하나까지 만들어 냈다는 것과 그것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체득했다는 것을.

‘평생을 범죄현장을 보고, 범죄자를 잡는 일에 미쳐서 살았다. 가정보다도 일적인 완성을 추구한다. 완벽주의자로,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형사’ 역할에 대해 작은 습관이나 표정, 눈빛만으로 머릿속에 정형화되었다. 연기를 시작한 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캐릭터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하고 놀라운 연기력이었다.

찰나가 지난 후 김진우가 피식 웃으며 대사를 이었다.

“선천적으로 말을 못했다고? 어려서부터 학대를 받아 반사회적인 성향이 강하고, 이미 여러 번 교도소를 들락거렸더군.”

김진우는 비꼬듯이 말을 이었다.

“아마 이번에 들어가면 평생 썩게 될 테니까 그 시절 추억을 되살리고 있으라고. 곧 내가 찾아가지.”

과격하지만 절제된 어조로 이어진 김진우의 대사 속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응축돼 있었다. 담담하지만 뜨거운 시선 속에 녹아있는 분위기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관객의 눈길을 빨아들이고 의식을 몰입시켰다.

‘정 선배가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이도원은 정성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정성우는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력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심사자들의 반응이 김진우 쪽으로 기울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저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정성우는 자문하며 심사자석을 보았다.

제작사 간부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보나마나 만점을 주었을 테고, 우군이라 믿었던 유태일 감독조차 고민하는 얼굴로 쉽사리 점수를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정성우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도대체 어떤 연기를 펼쳐야만 심사자들의 마음을 돌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연기를 할 의욕이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 표정을 보며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끝났군.’

그는 점수를 쓰며 다시 한 번 확신했다. 10점 만점인 열 개 항목에 모두 9점 이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김진우는 그만큼 완성도 높은 연기를 선보인 것이다.

심사자들을 사로잡은 당사자인 김진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가 들어가자 정성우가 교대로 나왔다. <투사> 촬영 때와 같은 패기만만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군에서 막 제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김진우의 연기력이 월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승산이 없어 보이는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전부 다일 수도.’

이도원의 생각대로 정성우는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김진우의 연기와 달리 정성우는 호흡은 뚝뚝 끊기는 연기를 보여줬다. 캐릭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고 화술과 감정 모두 부담에 눌려서 횡설수설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만.”

보다 못한 유태일 감독이 끊고 말했다.

“더 안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배역의 대사를 메일로 보내둘 테니까, 연습해서 따로 오디션을 보도록 하죠.”

그쯤 되자 의기양양한 얼굴로 앉아있던 제작사 간부가 제안했다.

“어차피 결과는 나온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발표하시지요, 감독님.”

“결과는 따로 통보하겠습니다. 두 분은 나가보세요.”

유태일 감독은 제작사 간부의 말을 묵살했다. 따라서 김진우와 정성우는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을 하고 오디션 룸을 나갔다.

미간을 찌푸린 제작사 간부가 물었다.

“감독님. 너무 독단적으로 행동하시는 것 아닙니까? 전 이번 영화에 수십억을 투자한 회사의 대표로 이 자리에 와있는 겁니다. 제 의견도 존중해 주시지요.”

유태일 감독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전 김진우와 정성우에게 똑같이 일주일 전 대본을 배부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날 대본을 받은 게 맞습니까?”

의외의 전개였다.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도 느끼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도원 역시 궁금한 표정이 되자 제작사 간부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유태일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진우가 우리 영화 제작상황에 대해 어떻게 알고, 제안서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먼저 연락이 왔나 싶었습니다. 그때까진 확신이 없었지만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죠. 제작사 측에서 레드 엔터에 미리 시나리오와 대본, 캐스팅 명단까지 제공했다는 것을요.”

제작사 간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래서요? 어쨌거나 두 배우 중 김진우의 역량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감독과 제작사 간의 신뢰 문제입니다. 제가 쓴 시나리오가 제 동의도 없이 유출된 거니까요.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으로 일을 진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부분은 추후 책임을 묻도록 하죠. 제 의사를 관련 부서에도 전해주십시오.”

그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도원은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대부분의 감독들은 물주 역할을 한 제작사의 눈치를 보게 마련인데, 유태일 감독은 그런 태도를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작품과 연출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저래 감탄한 이도원은 제작사 간부에게 목례를 한 뒤 유태일 감독을 따라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유태일 감독이 숨겼던 분노를 터트렸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외압이 개입되면 작품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 그런데 레드 엔터는 제작사를 통해 간접적인 외압을 행세하고 있어. 김진우가 레드 엔터의 공격수인데, 난 김진우를 뺄 수가 없다.”

“레드 엔터 쪽에서 김진우를 이용해 외압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이도원이 미간을 찌푸리자 유태일 감독이 대답했다.

“주연 급 배우를 투입시켜서 분량을 포함한 전반적인 내용까지 개입한다. 유명 배우가 제작사와 기획사를 믿고 촬영 도중 삐딱선을 타면 감독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게 되는 거지. 이대로 촬영이 시작되면 김진우는 현장에서 큰 소리를 낼 거다.”

그럼에도 김진우를 안고 가야 하는 건 오디션을 당당히 통과한 배우이자 제작사가 밀고 있는 배우기 때문이었다.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영화제작 배경을 머릿속에 그린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감독님은 신경 쓰지 마시고, 작품에 집중해주십시오. 제가 김진우나 레드 엔터 측에서 엇박자를 내지 못하도록 막겠습니다.”

유태일 감독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어떻게?”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할 관계였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싸움은 선빵이고… 아무튼,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허황된 자신감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네가 헛소리를 할 성격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지?”

유태일 감독의 질문에 이도원이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때 수화기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원 씨! 왜 이제야 연락을 주시는 겁니까? 이제 단독 인터뷰 기사, 내보내도 됩니까?

김흥수 기자였다.

큰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개봉 후 손익분기점을 거뜬히 넘겼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이미 많은 매체들이 사실 보도를 하고 있었지만, 할리우드 진출의 정확한 내막이나 인터뷰를 따지 못해서 이도원 꽁무니만 뒤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특종을 손에 들고 있는 김흥수로서는 애가 탈법도 했다.

이도원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내보내셔도 됩니다. 단, <서커스>와 엮어주세요. 초호화 캐스팅이 될 수 있었던 캐스팅 비화를 제공하겠습니다.”

지금껏 캐스팅 비화는 촬영장 뒷얘기만큼이나 재미있는 화제로 주목받아왔다.

특히 <서커스>가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도원과 김진우의 한국 영화계 복귀 작품이자,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받을 만했다. 더불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투자를 받은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봄직한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런 영화의 캐스팅 비화는 확실히 좋은 기삿감이었다.

-좀 빤하긴 하지만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저야 좋지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최대한의 관심을 몰아주셔야 합니다. 촬영 동안 외부에서 압력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요.”

안 그래도 ‘시네마24’는 영화에 특화된 언론사였다. 그중에도 김흥수는 연예부 수석기자였으니 구구절절 내막을 듣지 않아도 눈칫밥으로 상황을 알아먹을 재량이 되는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말뜻을 이해한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러려면 화제가 될 법한 소스를 계속 주셔야 합니다.

이도원은 눈앞에 유태일 감독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가 전화를 끊자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이용해 외압을 견제하겠다. 이게 네 생각이냐?”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레드 엔터와 김진우의 유대관계를 무너트릴 겁니다.”

담담하게 읊조린 이도원은 오디션이 있기 일주일 전을 회상했다.

< 양자택일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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