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텔레스코프 (telescope; 동시대사) (5)
“저야 항상 준비돼 있죠. 잠시, 그림 몇 장만 남기고요.”
김흥수가 들고 있는 대포 같은 앵글이 이도원을 겨냥했다.
찰칵, 찰칵- 짧고 조용한 셔터 소리가 터졌다.
‘언제 봐도 자연스럽군.’
예전에 봤을 때도 그랬지만, 김흥수는 다시 한 번 이도원의 촬영 매너에 감탄했다.
잠깐 사진을 들여다본 그는 이도원에게 말했다.
“훌륭합니다. 본격적인 인터뷰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요? 아, 잠시-.”
탁자 위의 진동 벨이 울렸다.
“지난번에는 종업원이 갖다 주었던 것 같은데, 셀프서비스로 바뀌었더군요.”
김흥수는 진동 벨을 흔들며 말하고는 커피 두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이어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방해꾼도 없으니 슬슬 시작하죠.”
“먼저 제가 선택한 기획사는 백 프로덕션입니다.”
노트북 키보드를 향했던 손가락이 잠시 얼었다.
포문이 열리자마자 첫 마디부터 핵폭탄이다.
“국내 굴지의 삼대 기획사를 고사하고 스승의 회사를 선택했다, 이거죠?”
김흥수는 기사 소스를 받아 적으면서 내용을 정리해 입 밖으로 꺼냈다. 이도원의 눈치를 보며 공개해도 되는 선을 떠보는 것이다. 이도원이 중재하지 않는 한, 김흥수의 입에서 되감겨 나온 말은 모두 인터뷰 기사에 실릴 터였다.
이도원은 그저 미미하게 웃었다.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보던 김흥수가 물었다.
“좋습니다. <우리의 심장>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었습니까?”
이번 기사의 메인 요리는 확보한 상태. 이제 데코레이션을 입힐 차례였다.
그 질문을 받은 이도원이 대답했다.
“긴장은 속으로 하고 링 위에서는 절대 아픈 척하지 마라. 편하게 생각하고, 내가 가진 만큼 보여주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떨고 있던 제가 어느 순간 카메라 앞에서 놀고 있더라고요.”
실제로 촬영을 하며 들었던 생각이었다. 느꼈던 것들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가 물었다.
“대중들은 이도원 배우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도원 배우에 대해 먼저 묻겠습니다. 어떤 계기로 연기를 시작하게 됐나요?”
“고등학교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독백대회에 나갔고 우승했죠. 그곳에서 이상백 교수님을 만나게 됐고요. 연극 동아리가 해체되면서 이상백 교수님께 연기를 지도 받았습니다. 천둥벌거숭이같이 무턱대고 부탁하는 저를 아들처럼 아끼며 가르쳐주셨죠. 그 덕분에 영화 오디션에서 합격했고, 유태일 감독님께 선택받아 <우리의 심장> 작업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필터링할 게 없는 적절한 답변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가 이어 물었다.
“배우로서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영화 ‘벨벳 골드마인’이나 ‘트레인스포팅’ ‘이유 없는 반항’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모두 일상을 이탈한 청춘 캐릭터다. 이도원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젊으니까 힘이 넘쳐서 그런지 강한 역할을 갈구하게 되더라고요.”
그 말에 김흥수가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어떤 역할이든 소화해 낼 수 있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연기가 아닌, 저만의 연기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이건 사견이지만 저는 많은 배우들을 만나왔고, 지금처럼 한다면 이도원 배우의 장래가 밝다는 확신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김흥수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려 할 때 이도원이 말했다.
“앞으로 기삿거리를 미리 취재해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김흥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시익 웃은 이도원이 대답했다.
“역할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유태일 감독님의 차기작에 들어갑니다. 또한 곧 케이블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 배역 오디션에 참가하게 될 것 같습니다.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앞지르는 기사는 좋지 않습니다.”
“역시 그렇겠죠?”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미리 소스만 갖고 계시면, 추가적인 인터뷰 없이도 뉴스를 선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일정이 바뀐다면 지금부터 인터뷰한 내용을 버리면 되고요.”
“하.”
헛바람을 내뱉은 김흥수는 고개를 저으며, 닫았던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보통이 아니네요.”
그는 내심 생각했다.
‘무슨 스물한 살 된 신인배우가 십 년 이상 배우 생활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웬만한 베테랑보다도 더 노련해?’
김흥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원은 태연하게 물었다.
“시작할까요?”
*
일주일 후.
이도원은 회사 앞에서 벤에 올랐다.
오준식이 먼저 도착해 히터를 틀어놓고 있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축하해. 드디어 첫 일정이네.”
캡 모자와 후드 티, 청바지.
편안한 복장의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블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의 오디션 장소는 상암동의 TBT 방송국. 청담동 백 프로덕션에서 30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압구정로에서 올림픽대로, 강변북로를 거쳐 달리는 동안 이도원은 목을 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준식을 방해하지 않고 운전에 몰두했다.
벤이 건물 앞에 서자 오준식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다 왔습니다. 이도원 배우님! 소인은 출입증을 좀 끊어오겠습니다.”
오준식이 출입증을 받으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 사이.
이도원도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휑한 부지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미디어단지였다. TBS를 포함해 여러 케이블 방송국이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때 건물 안에서부터 방송국 견학을 온 초등학생들이 재잘대며 줄지어 나왔다.
그 틈을 비집고 돌아온 오준식이 방송국 건물을 가리켰다.
“들어가시죠!”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안으로 입장했다.
높은 천장과 널찍한 일 층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지하철 개표구 같은 장치가 되어있어 보안이 철저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준식이 임시 출입증을 제시하자 보안 요원이 개표구를 열어주었다.
엘리베이터도 출입증을 먼저 찍어야 층수에 불이 들어왔다. 이도원과 오준식은 6층 비즈니스센터로 올라갔다. 오디션을 볼 곳은 대본리딩장이었다.
FD(Floor Director; 연출조수)가 문 앞에서 오디션 진행을 하고 있었다. 오디션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고 대기자 순서가 오면 한 사람씩 불렀다.
이윽고 이도원을 발견한 FD가 물었다.
“이도원 배우시죠?”
오준식이 잽싸게 나서서 대답했다.
“예. 저는 매니저입니다.”
FD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쌓아둔 오디션 대본을 가져와서 건넸다.
“대기하시는 동안 오디션 대본 숙지해주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대답한 오준식이 대본을 이도원에게 넘겼다.
오디션 대본은 실제 드라마 촬영용 대본으로, 한 장 분량의 쪽 대본이었다.
이도원이 오디션에서 보여주어야 할 배역은 주인공 ‘최정우’의 어린 시절 역할이다. 인물 설명은 간단했다.
최정우는 고등학교를 조기졸업하고 열아홉 살에 국내 최고의 대학교에 입학한 천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정우의 연인이 임신 소식을 알려오지만, 하필 최정우는 학교에서 보내주는 연수 프로그램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성공을 위해 유학을 선택한 최정우가 연인과 헤어지며 나누는 대화가 오디션 대본에 있었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할까, 아니면 연인이 임신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망치듯 떠나는 책임회피가 더 강할까?’
이도원은 고민에 빠졌다. 백 마디 설명 보다 더 정확하게 인물을 묘사할 수 있어야 좋은 연기다. 말투, 표정, 사소한 습관에서 그 인물의 성격, 사회적 지위, 처한 상황 등을 나타내야 한다.
이도원이 연기할 인물의 윤곽을 잡아갈 때 즈음 그의 이름이 호명됐다.
“이도원 배우. 입장하세요.”
이도원은 안으로 들어갔다.
대부분 연기력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아역들이거나, 기존에 조연으로 활동하던 배우들이 오디션에 참가했다. 대부분 개런티가 저렴한 데에 비해 연기력은 출중한 배우들이었다. 즉 만만치 않은 오디션이란 뜻이다. 커리어로 치면 이도원이 가장 하위권일 만큼 쟁쟁한 상대들을 제치고 따내야 하는 배역이란 것.
이도원은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군.’
얼마 전 KAS방송국에서 TBT방송국으로 옮겨간 조연출 민영기와 프로듀서, 작가까지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심사를 하고 있었다.
민영기는 이도원을 보고 반가운 미소를 그렸지만 아는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짤막하게 지시했다.
“준비한 걸 봅시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눈앞에 희미한 소녀의 형상이 나타났다.
“불투명한 미래보다, 같이 있는 게 멋진 거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이도원은 시선을 떨구며 그녀의 양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잠시 헤어지는 것뿐이야.”
이도원은 눈을 들어 그녀를 또렷하게 마주 봤다.
“다시 돌아올게. 매년 내가 있는 곳으로 널 초대할 거야. 아무 문제없어.”
그의 입에서 이기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야만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 후회는 불행을 초래하지. 대신 아이가 태어나면 한국으로 들어와서 너와 함께할게. 그때까지 잠시 떠나있는 것뿐이야.”
이도원의 어조에는 진심이 담겨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매정했다. 자신이 이기적이란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개인주의자의 모습이었다.
그를 본 그녀가 대답했다.
“불안해.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난 우리를 택할래.”
이도원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불안해하지 마. 전화할게.”
이미 확고한 결정을 내린 목소리. 더는 붙잡아도 소용없다는 걸 상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단호한 결심이 전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도원의 표정은 이성적이고 덤덤했다.
이도원은 천천히 그녀를 놓고 뒤돌아 걸었다. 발걸음에 잠시 미련이 묻어났지만 이내 제 속도를 찾았다. 끝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인 등지고 성공을 위해 나아갔다.
연기를 지켜보던 민영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가 절제돼 있어. 인물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그전까지 오디션을 봤던 배우들은 한 편의 신파를 찍었다. 자신들의 연기력을 자랑하듯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연기를 펼쳤다.
반면 이도원은 최정우라는 캐릭터의 모습을 잘 살렸다. 조금의 미안한 마음과, 성공을 위해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줬다.
자리로 돌아온 이도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이상입니다.”
세 명의 심사자 모두가 모호한 표정이었다.
이도원은 인물을 잘 이해하고 있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그뿐, 선뜻 좋다고 말하기 애매했다.
‘좀 더 보고 싶은데.’
민영기가 프로듀서에게 귓속말을 했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영기는 이도원을 불렀다.
“성인 파트의 감정 씬입니다. 한 번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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