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52화 (52/178)

052/  텔레스코프 (telescope; 동시대사) (4)

유태일 감독을 찾아간 이도원.

두 사람은 충무로의 유명한 한정식집에 마주 앉았다.

‘확실히 돈이 좀 있는 집안사람이야.’

이도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속으로 추측했다. 촬영 때도 그렇고, 유태일 감독은 예산을 아끼지 않았다. 가타부타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않는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말이 50만 관객이지, 저예산 영화라 꽤 많은 수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출연료를 지급하기로 하고 고생해 준 모든 배우들에게 인센티브를 입금했습니다. 그때 도원 배우님이 군대를 가있었고요.”

이도원은 촬영장 외에 사석에서 존대를 듣기가 영 어색했다.

“이제 말씀 편히 하세요, 감독님.”

“그럴까?”

유태일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말을 놓아버렸다.

그 행동에 이도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사람이었나?’

마주 미소를 띤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아무튼 네가 군대를 가있어서 출연료 지급을 못 했다. 문자로 계좌번호 주면, 오늘 중으로 입금해 줄게. 액수는 오백만 원 정도. 조단 역들에게도 공평하게 한 씬 당 오만 원 씩 쳐서 출연료를 정산했다.”

이도원은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수익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유태일 감독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로 내 차기작이 크랭크 인 들어가기 전이라서 너한테 섭외 제안을 하려고 하는데…….”

“저희 회사에 먼저 연락을 주셨던데요? 내용은 봤습니다.”

“어때?”

“두 말할 게 있나요.”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물 잔으로 건배한 뒤 답했다.

“당연히 오케이죠. 그런데 오디션은 안 봐도 되는 건가요?”

“네 연기력은 나도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개런티나 계약 내용은 회사를 통해서 보내주마.”

대답한 유태일 감독이 잠시 생각하던 끝에 말을 이었다.

“시나리오를 자세히 읽어봤는지 모르겠다만 좀 부담이 큰 배역들이다. 하나는 전직 형사였던 연쇄살인범, 또 하나는 경찰대학 출신 엘리트 형사 역할이야. 배역이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지만 주연은 이 두 역할이다.”

“하나는 저고. 다른 배우도 결정된 상태인가요?”

“그래.”

짧게 대답한 유태일 감독이 이어 말했다.

“김진우라고……. 이번에 발굴한 친군데 재능이 뛰어난 녀석이다. 네가 보여준 정도까진 아니지만, 오디션에서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누르더군. 너보다 두 살 많아. 같은 신인이고.”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잠시 표정이 굳었다.

‘김진우라고?’

멍 때리던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참 얄궂은 운명이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문제 있나? 아는 녀석이야?”

이도원은 잠깐 고민했다.

유태일 감독에게 사정하거나 꼼수를 부린다면 김진우를 섭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도원은 김진우에 대한 두려움을 말끔히 지운 상태였다. 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피할 사람은 따로 있지 않은가?

점점,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렸다.

“문제는요. 옛날에 학교 축제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 반가워서 그렇죠. 배역은 어떻게 결정하셨어요?”

이도원이 묻자 유태일 감독이 대답했다.

“그 녀석이 반항적인 이미지인데다 섬뜩한 구석이 있어서 연쇄살인범 역할로 섭외할 생각이야. 워낙 본능적인 연기를 하는 녀석이기도 하고. 넌 좀 차분하고 절제된 연기에 능하니까 경찰대 출신 형사가 어떨까 한다.”

설명을 듣던 이도원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시나리오를 봤을 때, 연쇄살인범을 절제되고 치밀하게 묘사하면 어떨까 생각했거든요. 악역에서 강한 마력을 느꼈어요.”

그는 말을 이었다.

“감독님. 제게 악역을 주십시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확고한 어조.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배역에 대한 집착은 폭발적인 연기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유태일 감독은 곰곰이 고민하며 대답했다.

“배역을 바꾸게 되면 시나리오 수정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범인을 맡으면, 어떤 인물을 만들어서 보여줄지도 기대되는 것도 사실. 한 번 리딩 해보고 정하자.”

*

일주일 뒤, 이상백, 이도원, 오준식 세 사람은 회사 근처 <평양 순대국> 식당에 둘러앉았다.

“요즘에는 이 집도 체인도 여럿 냈더구나. 정말 맛있는 집이다.”

그리 말한 이상백이 순대국밥 세 그릇을 주문했다. 순대국밥 집 치고 가격대가 높은 편이었다.

이도원은 새삼 심장이 두근거렸다. 배우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되고 기획사 대표, 매니저와 가지는 첫 자리인 것이다.

마침 이상백이 일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다 못 봤을 텐데 케이블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는 시놉이나 시나리오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추후 시놉과 시나리오가 나오면 메일로 보내주겠지만 내가 관계자한테 들은 바로는 이렇다. 임신한 여자 친구를 등지고 유학길에 나서서 성공한 인생을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성공이 아닌 가족을 선택했을 때 벌어졌을 삶을 살게 되면서 진짜 소중한 가치를 깨닫는 내용.”

“흥미롭네요.”

이도원은 시익 웃었다.

반면 이상백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주연 나이가 삼십 대니까 나이 대를 감안했을 때, 네가 오디션을 들어갈 배역은 주인공 아역일 가능성이 크다. 드라마 초반 이 회 분과 회상 씬 정도만 등장하겠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태일 감독님 영화에 들어가야 하니까 잠깐 모습을 비추는 건 오히려 부담 없고 좋다고 봅니다. 조단역도 아니고 과거든 현재든, 어쨌든 주연이니까요.”

이상백 역시 그 말에 수긍했다.

“적당한 분량이긴 하지. 시청자들에게 좋은 이미지와 강렬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면 더 좋고.”

신입사원 오준식은 이상백과 이도원의 말에 끼어들지 못하고 식사자리 세팅을 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때 이도원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래도, 고정으로 들어갈 경우를 감안해서 스케줄을 만들어 주세요.”

“고정으로?”

이상백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보통 주인공 아역이 고정으로 들어갈 일은 없다. 차라리 조연의 반응이 좋다면 분량을 늘일 순 있다. 하지만 주인공 아역은 분량이 끝나면, 많이 나와 봐야 회상 씬에서 등장하는 정도다. 아역 분량에서 아무리 연기를 잘하고 반응이 좋았더라도 성인 파트가 되었는데 아역 분량을 늘일 수는 없다. 드라마 자체의 흐름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우리의 심장>에서 성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마 잘하면 성인 분량까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민영기 조연출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도 하고요.”

그 말을 들은 이상백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욕심이 많구나. 너무 기대하진 말거라. 작품 내용으로 봤을 때 드라마 상에서 아역과 성인 역할의 나이차가 십 년은 나니까, 아역과 성인 파트를 나눠서 섭외하기로 결정 난 이상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다.”

“네. 물론 기대대로 될 확률은 적지만,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영화 스케줄과 조절이 필요할 테니까요.”

이도원의 대답을 들은 이상백이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 두 작품을 골랐을 때 내가 널 말리지 않은 건 드라마 분량의 촬영이 끝날 때쯤 영화 촬영이 들어갈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와 드라마 둘 다 동시에 진행하게 된다면 네가 버티지 못 할 거야. 슈퍼맨이 아닌 이상 그런 스케줄을 소화할 순 없을 게다.”

그는 오준식을 보며 덧붙였다.

“매니저도 마찬가지고.”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준식을 보고 물었다.

“밤낮없이 촬영을 해도 괜찮겠어? 내가 촬영할 땐 차에서 자고, 일어나면 운전을 해야 되는 생활.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

그 말에 오준식이 대답했다.

“매니저는 배우와 함께 한다.”

두 사람을 보던 이상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환상의 배터리로군. 두 사람 다 이십 대 초반이라 그런지 확실히 패기가 넘쳐. 그런 의욕은 좋다만, 과하면 이도 저도 안 될 공산이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라.”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이도원은 들뜬 낯빛을 지우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

<시네마 24>의 인터뷰가 약속된 당일 이도원은 김흥수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제는 엄연한 배우로군요. <우리의 심장>이 상업화된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난번 시사회 때 군대에 있으셔서 못 뵀죠?

“그렇게 됐네요.”

이도원이 덧붙였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이도원은 첫 인터뷰 때, 기획사를 선택하게 되면 가장 먼저 정보를 공급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김흥수가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저녁 일곱 시, 지난번 미팅했던 <카페 360> 맞지요?

“예. 이따 뵙겠습니다.”

이도원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통화를 마쳤다.

한편으로 인터넷으로 김흥수의 기사들을 검색해보는 중이었다.

‘역시. 대부분이 특종이나 반응이 좋은 기사들이야.’

내심 생각한 이도원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공인으로서 기자와의 각별한 친분을 갖는 건 좋은 판단이었다. 공인에게 언론은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기삿감을 제공해줌으로서 친분을 쌓고, 대신 문제가 생겼을 때 좋은 보험으로 써먹는다. 그 기자가 영향력이 강할수록 더 안전한 보험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찍히면 피를 볼 수 있지.’

이도원은 영리한 배우였다.

유명 톱스타는 아니었지만 배우로서의 삶을 이미 한 번 살아봤다. 타임 슬립 전, 쓴 맛 단 맛 다 본 기성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건 이도원에게는 크나큰 강점이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 곧장 청바지와 니트 위에 패딩을 걸친 편안하고 깔끔한 복장을 하고, 머리 스타일을 단정하게 세웠다.

전신 거울 앞에는 훤칠한 키의 미남이 서있었다.

“그럼 가볼까.”

간단히 심호흡을 한 이도원은 집을 나서서 <카페 360>으로 갔다.

이도원이 도착했을 땐 김흥수가 이미 와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켜놓고 기사를 모니터링하는 중이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도원을 발견한 김흥수가 일어나며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도원 역시 담백하게 웃었다.

눈을 빛내며 그를 뜯어보던 김흥수가 말했다.

“전방으로 갔다 왔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얼굴이 더 좋아졌습니다. 검게 타지도 않았고요.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외모가 성숙해질수록 물이 오르는군요.”

“기자가 아니라 앵커를 하셨어도 성공하셨겠네요.”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청산유수 같은 김흥수의 화법을 칭찬했다.

김흥수는 기분 좋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도원 배우처럼 잘생겼으면 한 번 도전해 봤겠네요. 음료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전 카페모카 마시겠습니다. 제대하니까 달달한 게 당기네요.”

김흥수가 주문을 하고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도원이 물었다.

“잘 지내셨죠?”

“저야 불철주야, 기삿감 쫓아다니지요. 오늘 이도원 배우를 보러 오는 중에도 기대감에 부풀어서 레이서처럼 거칠게 운전을 했어요.”

“실망시키면 안되겠네요.”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물어보았다.

“준비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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