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연극 (2)
마임은 오로지 동작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마임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각설하고, 마임을 이용하면 무대장치의 도움 없이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바람이 부는 것, 벽을 짚고 넘는 것, 걸음걸이만으로 심리를 표현하는 것 모두.
무성극을 하기 전까지 마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서커스단을 보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마임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임 하나로 연기를 한다.
내 동료 임명인은 실어증으로 말을 잃었다. 그는 작은 체구와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를 닮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공연 준비가 한창일 때 그가 수화로 말했다.
-이번에 들어가는 유태일 감독님 차기작, 서커스단이 배경이래.
-그래서?
-마임 연기를 하는 주조연급 배우를 구한대.
-오디션?
-아니. 직접 구한다고.
실망감이 들었다. 유태일 감독은 마임공연에 와서 직접 알아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임을 특기로 구사하는 연기자들도 많은데 굳이 벙어리를 섭외할 리도 없잖은가?
-굿 뉴스네. 우린 배우는 커녕 트레이너로도 못 들어가겠지만.
많은 무명배우들이 시간강사나 트레이너를 하는 반면, 우리는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말을 못하면 전달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는 법. 모든 학생들이 수화를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트레이닝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임명인의 흥분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태일 감독님이 지금 공연장에 오셨다고!
뭐?
고개만 돌리고 대답하던 나는 몸을 돌렸다. 유태일 감독이 마임공연장에 직접 왔다는 건 서커스를 다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조사 차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기회에 배고픈 배우들에게는 마임 연기자를 발굴할지도 모른다는 의미기도 했다.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널 취재했었지? 그게 방송됐어. 유태일 감독님도 보셨을 테고. 널 보러 오셨다는 뜻이지.
임명인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의 말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얼마 전 <사고 후 잊혀진 마임배우 이도원>이라는 소제목으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고 극단 후원금이 반짝 늘어났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반짝이고 지금은 다시 잊혀졌지만, 방송 후 한동안 많은 격려 글들이 방송국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긴 했었다.
-열심히 해봐. 기회야!
그의 응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마임공연은 <대도 홍길동>이라는 작품이다. 나는 ‘홍길동’을 맡았으며 장장 두 시간 동안 길동이의 탈출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위해 많은 서적과 영화들을 보고 연구했다. 평소 걷는 습관부터 작은 손버릇까지 극 중 홍길동처럼 바꾸었다.
막이 열리고, 무대에 선 나는 다섯 명의 관객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두운 객석이 보이는 순간이면 무대가 아닌 구름 위에 서있는 기분이다. 긴장과 흥분이 내 전신을 강타한다. 다섯 명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무대 뒤편에서 음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벽이 있다고 상상하고 빈틈없이 훈련된 절제된 동작으로 벽을 짚었다. 고개를 들어 저 위까지 뻗은 높은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높이를 알려준 나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벽을 두드리며 월담이 쉽지 않다는 표현을 했다. 이제 무대에는 가상의 높다란 담장이 생겨났다.
이 담장을 넘기 위해 나는 준비한 사다리를 위태롭게 걸치고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에 바람이 불어 사다리와 몸이 통째로 흔들렸다. 나는 제자리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관객들의 뇌리에는 월담의 과정들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을 터였다.
“아!”
큰 돌풍이 불자 객석에서는 한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위태롭게 사다리를 오른 나는 담장 위에서 주위를 살폈다. 눈썹 위에 손을 붙이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객석들을 살폈다. 그런 뒤 온몸으로 크게 한숨을 쉬고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어이쿠!”
객석에서 추임새가 들려왔다.
나는 철퍼덕 넘어지며 화들짝 놀란 얼굴로 들키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 뒤에도 대감 댁의 여러 장애물들을 뚫고 창고에 진입한 나는 보자기를 풀러 보물들을 담는 시늉을 했다. 크고 무거운 보물은 버리고 작고 값이 나가 보이는 것만 담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세밀한 표현을 했다.
대감 댁을 훌훌 털어먹은 나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은신처로 향하려 했으나 저 멀리 관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길동을 찾는 목소리다! 나는 주변에 가득한 횃불들을 발견하고 아슬아슬하게 관군들을 피해 달아났다.
극이 가파르게 진행되는 동안 으리으리한 기와집들과 담장 사이로 나있는 골목들, 밤바람이 거세게 부는 숲과 날 쫓는 관군들을 머리와 가슴으로 상상했지만 모든 동작은 아주 정교하게 절제되어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마임공연으로 내 몸은 흠뻑 땀에 절었다. 정신은 뿌리째 길동에게 몰입되어 있고 심장은 막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공연을 마쳤을 땐 다섯 명의 관객 중 네 명이 남아있었다. 그제야 한 명이 나갔다는 걸 알았다. 내가 감사 인사를 올리자 그중에도 단 한 사람이 홀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바로 유태일 감독이었다.
*
“완벽하군.”
무대 뒤편.
<대도 홍길동>을 모두 감상한 유태일 감독의 감상평이었다. 완벽하다란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돌변했다.
유태일 감독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작품에 들어가는 배우들이 보길 학수고대한다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의미가 내포된 웃음이었다.
-과찬이십니다.
무대미술 담당인 이상백이 내 수화를 전달했다. 그는 우리가 공연하는 극장을 통째로 소유한 건물주인 동시에 무성극단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다. 내 말을 전해 들은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작품을 들어갈 때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부분이 바로 리얼리즘이야. 다시 말해 이번에 들어가는 <서커스>의 주인공은 말을 못하는 언어 장애우이기 때문에 그 심리를 담아내기 위해선 자네가 필요하다는 뜻이네. 백억 가까운 예산이 들어간 <서커스>의 시나리오를 자네에게 오픈한 거니까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머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거절할 일은 없었다. 나는 손을 덜덜 떨며 수화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상백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잘 되었다는 의미의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 수화 내용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너무나 감사하다는군요. 평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이 친구의 연기를 대학로에서도 가장 외진 극장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요. 쓰임 있는 친구이니 감독님께서 잘 보듬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유태일 감독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는 극 중 대사가 전혀 나오지 않지만 가장 많은 분량을 연기하게 될 걸세. 내래이션을 하는 배우는 따로 쓸 생각이네. 많이 알려지지 않은 라디오드라마 출신 성우인데 웬만한 탑 레벨의 연기자들 보다 뛰어난 대사 구사능력을 가진 친구지. 비록 대사는 없지만 다른 배우들과 인사도 나눠야 하니 대본리딩에는 참여해줬으면 좋겠군. 리딩은 이번 주 금요일 동대입구역 인근 유태일 기획에서 진행할 예정이네.”
유태일 기획은 유태일 감독의 자회사였다. 자신이 직접 기획과 연출을 하기 때문에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그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가진 작품을 매년 배출해 내는 훌륭한 감독이었다. 그만큼 빠르고 완벽하게 작업했다. 그는 굳이 시나리오를 들춰보지 않고도 탑 배우들이 줄을 서는, 관객들도 믿고 보는 감독이었다.
나는 유태일 감독에게 어떤 감사 표현도 하지 못했다. 내 연기 경력으로도 때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고, 이번에도 그랬다. 감격에 젖어 저절로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감사합니다.
그저 지난날의 설움을 담아, 고개 숙여 인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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