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베즈 레빈에 떠오른 별 (1) >
130. 샤베즈 레빈에 떠오른 별 (1)
7월의 뉴욕, 퀸즈.
역대 최고 기온을 연일 갱신하는 대도시의 초여름 저녁.
양복을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한창 땀에 절어 대중교통에 몸을 실을 시각, 불쾌지수가 한껏 높아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짜증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What..! holy shit! 이봐, 자네 이 소식 들었나?"
아니, 오히려 이들은 최근 떠오르는 화제를 이야깃거리로 삼느라 더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무슨 소식?"
"강이 오늘도 안타를 쳤다더군."
"jesus.. 오늘도?"
"벌써 30경기 연속 안타라던데."
"미쳤군! 300안타에 가까운 페이스에 테드 이후로 첫 4할 타자까지 될 가능성이 높은 놈이잖아. 그런데 이제는 조 디마지오의 기록까지 노린다고?"
바로 연일 메이저리그를 들썩이고 있는 해준의 기록 경신 소식.
뉴욕의 전설, 조 디마지오에게 그 누구보다 위협적인 기세로 접근하고 있는 해준의 활약은 뉴욕 시민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He's Unstoppable! KANG, 30경기 연속 안타 돌파!]
[기존 다저스 기록인 1969년 윌리 데이비스의 31경기 연속 안타에 근접, 내일 밤 NYM 3차전에서 타이 기록 가능성 대두.]
[괴물의 끊임 없는 질주, 2009년 시애틀 스즈키 이치로의 동양인 연속 경기 안타 기록 경신.]
[괴물, 메이저리그를 뒤흔들다. LA다저스의 방문에 시티 필드 앞에 인산인해를 이룬 뉴욕의 시민들]
[다저스 강해준, 6월의 루키, 6월의 선수상 확정. MLB 역사상 3번 연속 수상 기록 남겨.]
이러한 반응은 뉴욕뿐만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의 모든 기록과 수상 실적을 토네이도처럼 휩쓸어버리는 광풍.
전무후무한 동양인 타자의 활약은 센세이션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뉴욕 시민들이 유독 이 기록에 예민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NYY 이스마엘 콥, 24경기 연속 안타 돌파!]
[올해 또한 조 디마지오의 전설에 도전하는 현재 진행형 전설. 올해는 기필코 경신하겠다 밝혀.]
[뉴욕 양키스 조 파바스 사장, '기록에도 정통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양키스의 기록은 양키만이 깰 수 있는 것. 그것이 뉴욕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조 디마지오라면 더더욱 그렇다.']
바로 뉴욕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스포츠 스타, 이스마엘 콥.
조 디마지오가 세운 불멸의 기록 후 9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근처에 도달했던 선수는 오로지 그만이 유일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다시금 그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욕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렇지, 그래도 조 디마지오의 기록을 깬다면 아무래도 뉴욕 출신 선수여야지."
"서부 놈들에게 그 기록을 뺏길 순 없지. 아예 가능성이 없다면 몰라도, 지금 우리에겐 이스마엘 콥이라는 괴물이 있다고."
"작년에 49경기까지 기록을 이어갔잖아! 기록원으로 나섰던 그 빌어먹을 LA 출신 기자만 아니었어도 이스마엘은 결국 기록을 깼을 거라고. 그건 누가 봐도 실책이 아니라 안타였어!"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
몇몇 이들은 분노에 가까운 분통을 터트리기 바빴다.
작년 50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이어갈 타구를 실책으로 판단한 것이 LA 출신의 한 기자라는 것이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심지어 해준은 LA에 기반을 둔 다저스의 슈퍼스타.
뉴욕의 낡고, 더운 지하철 안은 불쾌지수가 극한까지 올라온 상태였지만 다른 시민들 또한 그 소리에 짜증을 내기는 커녕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늘어만 갔다.
그리고 누구보다 발 빠르게 반응한 쪽은 뉴욕의 언론들이었다.
[해준 강 VS 이스마엘 콥. 불꽃 튀는 기록 전쟁, 그 최후의 승자는?]
[전문가 10인, 이스마엘 콥의 손들어줘. 조 디마지오 이후 기록 경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타자.]
[뉴욕 시민 82%,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이스마엘 콥에 의해 깨질 것.]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을 맞춘 문어, 이번에는 연속 안타 기록 경신자로 이스마엘 콥을 꼽아.]
뉴욕을 대표하는 스타.
그 경쟁 상대는 그 스타의 기록을 앗아갔던 LA 출신 기자와 같은 연고지, LA다저스의 슈퍼스타.
이들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쏠릴지는 너무나도 확실해 보였다.
"이럴 게 아니라 내일 경기는 내가 기필코 보러 가야겠어!"
"그래, 그 강인지 캉인지 하는 자식 기록이 얼마나 가는지 보자고."
"나도 데려가! 내가 직관한 경기에서는 항상 기록이 깨지더라고. 작년 콥이 50경기 연속 안타에 도전했을 때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니까?"
"What? You son of bi..."
그렇게 뉴욕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올스타전까지는 이틀을 남긴, 다저스의 전반기 마지막 경기가 열리는 뉴욕의 시티 필드.
"이건.. 예상치 못했는걸."
"이래서 야구가 재밌는 거지. 무명 루키에게 잡아먹히는 다저스. 정말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군."
"강의 기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지."
프레스 박스의 기자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놀란 눈으로 그라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NL 서부 지구 1위 LA다저스 VS NL 동부 지구 4위 뉴욕 메츠.
첫 1, 2차 전의 승자는 모두의 예측대로 LA다저스였다.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뉴욕 메츠의 투수진을 초토화 시킨 21세기 최고의 핵타선.
하지만.
부우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3차전만큼은 뉴욕 메츠의 유니폼을 입은 한 루키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밀도 높은 시티 필드의 열기류 사이로 울려 퍼지는 삼진콜.
"Hell ya!"
투수의 파이팅이 울려 퍼지고.
-와아아아아아아아-!
파도처럼 몰아치는 관중들의 외침 소리가 시티 필드를 가득 메웠다.
아트 – 그로츠!
그로츠-! 그로츠-! 그로츠!
1out! 1out! 1out!
발을 구르는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으로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시티 필드.
"...맙소사, 만년 꼴지 후보 뉴욕 메츠가 역대 최고라는 LA다저스를 꺾다니."
그 소란 속에서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짜릿한 전율과 함께, 3번 카메라 감독은 전광판을 클로즈인했다.
[LAD 1 : 3 NYM]
9회 초 2아웃.
8과 2/3이닝 5볼넷 4피안타 1실점이라는 놀라운 인생 역투를 펼치고 있는 뉴욕 메츠의 4선발 아트 그로츠.
"..이런."
"아웃까지 겨우 하나인가?"
다저스 코치진들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프로에게 패배가 달가울 리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LA다저스 전반기 성적을 떠올린다면 다소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72승 25패.
오늘 경기를 패배한다 하더라도 72승 26패.
7할 중반에 가까운 역대급 페이스로 전반기를 마감하는 LA다저스.
그럼에도 이들의 표정이 이토록이나 굳은 이유는 간단했다.
[1아웃! LA다저스의 패배까지는 오로지 1아웃만이 남았습니다! 인생에 다시 없을 역투를 펼치는 아트 그로츠, 오늘 그의 스플리터는 전성기의 우에하라 고지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LA다저스의 코치진! 9번 타자 필 콜린스를 빼고 대타를 투입하는군요!]
[이번 타자마저 아웃을 당하게 된다면 이번 경기는 뉴욕 메츠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30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가던 강의 기록 또한 함께 막을 내리게 되죠!]
바로 해준이 30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구단 신기록을 이어가던 도중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2타수 무안타 2볼넷을 기록하며 연속 안타 기록이 중단된 상황.
만약 이대로 대타마저 아웃으로 물러난다면, 해준은 5번째 타석에 들어서지 못하게 되고 기록은 막을 내리게 된다.
-다저스, 핀치 히터-! 넘버 32! 마르쿠스--- 영!
위기에 몰린 다저스는 결국 대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가벼운 염좌로 선발 출장에서 제외했던 마르쿠스 영.
그가 굳은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서자, 승리를 코앞에 둔 뉴욕 메츠 팬들에게서 야유가 쏟아져 내렸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KANG에게 찾아온 최대의 위기! 마르쿠스 영은 명예의 전당 한 자리를 예약해둔 위대한 타자이긴 하지만 오늘 아트 그로츠의 스플리터는 매섭습니다!]
[대기 타석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타석을 바라보고 있는 KANG!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기자, 관중, 캐스터, 하다못해 카메라까지.
대기 타석에 들어서 있는 해준에게 그 모든 시선이 쏠렸다.
'다들 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는 건가?'
그 속에서 해준은 한 차례 뜨겁게 달궈진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럴만하긴 했다. 무엇을 해도 안 되는 날.
오늘이 딱 그랬으니까.
'내 손을 떠난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버리는 건 정말 어쩔 수 없긴 하지.'
나머지 2타석은 손을 대기도 힘들었던 스트레이트 볼넷.
심지어 이제는 기회마저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해준은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관절과 인대의 유연함, 집중력을 유지 시키는 데 집중했다.
"..후우."
폐 끝까지 도달하고, 내뱉어지는 숨, 착- 가라앉은 호흡.
관중석에서 밀려오는 열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신을 충분히 통제한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며, 그저 때를 기다린다.
'야구란 그런 놈이거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도, 준비된 자에게도 공평하게 불운한 변덕의 화신.
'내가 불행하다면, 상대가 불행한 순간도 있는 법이지.'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따아아아악-!
타석에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파열음.
그 소리에 해준의 눈동자가 번뜩이고, 뉴욕 메츠 팬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퍼억-!
그 사이 라인을 짓이기며 외야를 향해 세차게 튀어나가는 타구.
"페어-! 페어-!"
찢어질 듯 목울대를 울리는 3루심의 콜에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나왔다.
[온 더 라인! 마르쿠스 영의 당겨친 타구에 3루심이 페어를 선언합니다! 마르쿠스 영, 1루를 지나 2루로! 그리고... 세이프! 다저스, 그리고 KANG을 늪에서 구해내는 다저스의 살아있는 전설, 마르쿠스 영의 2루타가 터져 나옵니다!]
빠르게 2루 베이스에 들어선 마르쿠스.
"Come on- dodgers-! It's not over yet!"
그가 다저스 벤치를 바라보며 포효에 가까운 외침을 터트리자,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이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영-! 영-! 영-! 영-!
마르쿠스는 그 속에서 손가락을 들어 해준을 가리켰다.
이글거리듯, 불타오르는 시선.
'준,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못 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에 해준은 가볍게 웃음을 띠어보였다.
'thank you, 마르쿠스. 밥 한 번 크게 쏠 테니까 기다리세요.'
타석에 들어서자 얼굴 위로 훅- 다가오는 뜨겁게 달궈진 열기.
관중석에서 피어오르는 온갖 감정들이 자신을 기준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상황은 여전히 9회 초 2사! 마르쿠스의 2루타로 꺼져가는 장작 속의 불꽃이 살아난 다저스! 그리고 모두가 기다리던 KANG이 5번째 타석에 들어섭니다!]
[첫 두 타석에서 각각 2루수 직선타, 우익수 플라이를 기록했던 KANG이죠. 타격감은 날카롭게 살아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모두 볼넷! 연속 출루 기록은 이어진다하더라도 안타를 때려내지 못한다면 연속 안타 기록은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결코 이어지지 않는 연속 안타 기록! 괜히 메이저리그 140년 역사에서 조 디마지오 혼자만이 56경기 연속 안타의 고지를 점령한 것이 아니죠!]
마지막 기회인 5번째 타석.
설마 하던 장면이 정말로 눈 앞에 펼쳐지자, 경기장 내 모두가 손에 땀을 쥐며 두 눈을 부릅뜨고 해준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쳐내면..'
'메이저리그는 몰라도, 다저스의 역사는 바뀐다.'
입안에 바짝 말라가는 긴장감.
해준은 그 속에서 스파이크로 바닥을 고르며 투수를 바라보았다.
사실 잘 맞은 타구가 연이어 잡힌다면 누구라도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30경기 이상 연속 안타를 쳐왔다면, 그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
그럼에도 해준은 오히려 차분한, 가슴 깊숙이 착- 가라앉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최고조에 다다른 감각이, 지금의 불운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뒷받침하고 있었으니까.
'칠 수 있다.'
마치 지금만큼은 어느 곳이든 원하는 곳을 향해 타구를 보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
"후우."
다시 숨을 고른 해준이 자세를 잡고.
-스윽
투수 아트 그로츠가 투구판을 밟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품처럼 몸집을 불린 긴장감이 그와 해준 사이에 자리 잡았다.
31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느냐 마느냐, 그 순간이 결정될 결정적인 순간.
그때.
[..잠시만요, 방금 카메라에 잡힌 사람이 누구였죠? 제 눈이 잘못된건가요?]
캐스터 오스말리의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음?"
외야 우측 관중석에서 시작된 웅성거림이 시티 필드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경기와는 상관없는, 명백하게 다른 반응의 기류.
피부 위로 느껴지는 경기장 내의 모든 흐름을 잡아내고 있던 해준이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무슨 일이지?'
낯선 관중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린 해준.
하지만 곧, 뉴욕 메츠 포수의 놀라움이 담긴 중얼거림에 그 기류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What the... 이스마엘 콥이 경기를 보러 왔다고?"
해준은 그 포수의 시선을 따라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 차가운 시선으로 경기장을 응시하고 있던 뉴욕 양키스의 슈퍼스타 이스마엘 콥.
그는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자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주고, 뉴욕 메츠 팬들에게서 즉각적으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콥이 여길 왔다고?'
뉴욕이 낳은 최고의 스타이자, 퍼펙트 히터라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별칭으로 불리는 남자.
이스마엘 콥.
또한, 자신과 기록을 두고 다투고 있는 현 시각 최대의 경쟁자.
해준의 시선이 우측 외야를 향하자 카메라가 재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두 쪽으로 나누어지는 전광판의 화면.
그 위로는 외야를 바라보는 해준, 그리고 그런 해준을 바라보는 이스마엘 콥이 동시에 담기고 있었다.
연속 안타 기록을 두고 불꽃 튀는 경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두 선수의 시선이 그 사이에서 마주쳤다.
< 샤베즈 레빈에 떠오른 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