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94화 (94/137)

<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1) >

94.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1)

커브Curve.

야구가 탄생한 이후 수많은 구종들이 등장했지만, 이것만큼 클래식 하면서도 이질적인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구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브레이킹 볼 중 유일하게 탑스핀을 먹여야 하는 구사 방식.

평소와는 급격하게 달라지는 딜리버리.

그로 인해 변화하는 릴리스 포인트까지.

게다가 특이한 것은 그 준비 과정만이 아니었다.

공이 손을 떠나는 그 순간.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르는 특유의 변화는 타자가 쉽사리 그 정체를 눈치채도록 만들어준다.

릴리스 포인트와 터널링의 일치, 디셉션이 강조되는 현대야구에선 치명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단점 덩어리의 구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종은 현대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그 구사 가치가 높아지고 있었다.

"제대로만 구사된다면 그 어떤 구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드밴티지를 가지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하이패스트볼과 섞어 쓴다면 이것만큼 위력적인 구종을 찾기도 힘들고요."

오광녹의 말대로 커브는 수많은 단점들을 덮어버릴 수 있는 강점이 존재했다.

위에서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지며 타자에게 선이 아닌 점의 타격 포인트를 강요하는 특유의 궤적.

그로 인해 급감하는 장타의 위험성.

행잉성으로 구사되는 순간 장타가 터져 나오기 일수인 슬라이더에 비하면 이는 매우 큰 메리트였다.

오죽하면 슬라이더가 처음에는 커브의 열화판을 가리키는 싸구려 커브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으니까.

즉, 제대로 구사된다면 그 어떠한 구종보다 철벽적인 위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다저스의 중견수 Kang, 압도적 기록으로 경쟁자들 짓누르며 메이저리그 4월 최고의 선수에 선정!]

MLB 사무국에서 선정한 4월의 선수로 선정되며, 자신은 그 커브를 본격적으로 공략할 실마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해준은 눈앞의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PP급 퀘스트 모듈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커브라는 구종을 극한까지 활용했던 한 선수와의 링크 통로.

메시지의 내용은 다저스의 전설이었던 한 투수의 별칭을 가리키고 있었다.

해준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의 커브라면 확실히 아웃라이어로 꼽힐만하지.'

데뷔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던진 1200구의 커브.

그 세월 동안 단 하나의 피홈런도 허용하지 않았던 장타 억제의 정점이자 4연속 사이영의 주인공, 그리고 다저스의 영구 결번.

'그 12-6 커브를 공략하는 감각을 손에 넣는다면.. 다른 커브들은 확실히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어.'

호텔 방임에도 불구하고 당장이라도 그 감각과 함께 배트를 휘두르고 싶은 마음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마저 손에 넣는다면 자신은 한결 더 완성형 타자에 가까워질 수 있는 상황.

하지만.

[PP급 퀘스트 모듈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다저스 투수진의 커브 구종 가치 상승시키기.

여기서 한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링크 활성화의 조건.

그 대상이 대상이라 그런지 이번만큼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투수진의 구종 가치라..'

현재 다저스 투수진의 커브 구종 가치는 리그 전체 8위권.

리그 트렌드에 따라 하이패스트볼의 구사 비율을 늘리면서도, 이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 위해 커브의 비율을 꾸준히 늘려온 다저스 투수진인 만큼 그 순위는 전혀 낮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구종 가치를 더 높이라고?'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조건.

구종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커브를 타격한 타구의 아웃 비율을 유의미할 정도로 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그 타구가 가장 많이 향하는 포지션에서 뛸 필요가 있다.'

해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커브가 플라이볼을 유도하기 위한 변화구라 착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커브란 어디까지나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고, 땅볼을 양산하는 브레이킹볼의 일종. 실제로도 리그 탑급의 커브를 구사하는 투수들의 땅볼 유도율은 매우 높았다.

'즉, 타구의 아웃 비율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외야보다는 내야가 적격이라는 소리다.'

그것을 떠올린 해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고 보면 지금쯤 유격수로 뛰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야 했지.'

포지션 변경을 받아들였던 유격수 제이크 포드는 이미 외야수 적응을 끝낸 상황.

이제는 경기에 투입되어 실전 감각을 기르는 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다저스의 프런트는 아무런 변화 의사를 전해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에는 이유가 존재했다.

'확실히 현재 상황에서는 부담이 되긴 하겠지.'

제이크의 체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포지션 변경. 하지만 지금 그것을 강행하기에는.

퍼어어어엉-!

[이번에도 승리합니다! 노아 존슨 선수의 결승 스리런, 그리고 마무리 스티븐의 102마일 패스트볼이 홈플레이트 위를 가릅니다!]

지금의 다저스는 너무나 잘 나가고 있었다.

쉽사리 변화를 주기 두려울 만큼.

'하지만 이대로라면 팀 입장에서도 더 위를 노릴 기회를 놓쳐버린다.'

정말로 완성된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자신의 생각에 지금의 다저스는 충분히 더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바로 자신이 내야수로 포지션을 옮기는 것.

'게다가 커브를 얻기 위해서라도.. 포지션 문제부터 정리해야겠지.'

해준의 눈빛이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

5월 6일.

펫코파크에서 열린 샌디에이고와의 4연전을 휩쓸어버리며 기세를 탄 다저스는 5월에만 6승 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본래 이맘때쯤에의 순위는 지구 2, 3위.

심하게는 4위까지 왕복하며 예열에 들어가고 있을 다저스였기에 올해 이변에 대한 지역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매주 목요일에 진행되는 지역 방송국 SportSpec의 심야 야구 프로그램.

진행자의 힘찬 목소리가 스튜디오 내를 울리며 뒤편의 큰 스크린에는 다저스의 최근 성적에 대한 그래프가 떠올랐다.

"이제 다저스에게는 슬로우 스타터라는 별명을 빼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5승 10패, 7할 1푼 4리의 전적을 거두고 있으니까요. 같은 지구 내에서 압도적인 1위며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양키스에 이은 2위입니다. 지난 몇 년간의 다저스를 생각한다면 매우 놀라운 모습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스틴? 다저스에게 있었던 변화가 무엇일까요?"

특별 패널로 참가한 오스틴 스넬.

2000년대 초반 다저스의 올스타 외야수 출신인 그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이번 시즌 중견수로 합류한 Kang이 이 드라마틱한 변화의 중심인 것 같군요. 난장판이었던 다저스의 외야 수비를 압도적인 실력으로 단번에 정리해버렸어요. 그로 인해 외야가 제 자리를 찾았고, 야수진을 불신하던 투수들의 신뢰가 돌아왔다고 봐야겠죠. 사실 재작년 월드시리즈에서의 실책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 않았습니까?"

메이저리그의 경쟁 판도를 뒤흔들어버리는 다저스의 초반 약진.

해준은 이 이변을 만들어낸 플레이 메이커로 주목받으며 언론과 현장 관계자들로부터 극찬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팬들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Kang이야말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갈망하던 다저스가 찾아낸 최후의 마스터피스야! 단 한 명의 선수가 합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팀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다고!

-다저스의 고질병이던 외야진이 단숨에 리그 최상위권으로 거듭났지. 이 메이저리그라는 게임에서 치트키가 존재한다면 Kang이 아닐까 싶은데.

-사실 스프링캠프에서는 포드가 코너로 이동하고, Kang이 유격수를 본다는 소문이 돌았잖아? 지금 와서 생각한다면 정말 멍청한 소문이었지. 다저스의 내야진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지만 외야진은 정말 핵폐기물 그 자체였다고. 그런 곳에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 유격수를 넣어버리고 Kang을 유격수로? 그건 정말 끔찍한 선택이었을거야.

-네 말에 완전히 동의해. 지금의 다저스는 완벽한 포지션 밸런스를 갖춘 상태야. 이 이상의 변화는 더이상 무의미해. 그저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리그 최상위권의 레벨을 유지하는 외야진.

리그 최강의 공격력을 갖췄으면서도, 준수한 수비를 보여주는 내야진.

그렇기에 모든 이들은 단언하고 있었다.

지금의 다저스는 최상이라고.

실제로도 그 사실이 성적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만큼 부정할 수 없는 상황.

이런 흐름 속에서 다저스의 프런트는 시즌 전부터 계획했던 제이크 포드와 해준의 포지션 변경 계획을 홀딩 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는 여전히 외야 수비 연습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으음..

릭 감독의 말에 수화기 너머 이반 단장은 침음성을 흘렸다.

단지 일시적인 배치라고 생각했던 구성이 다저스의 기세를 한껏 끌어올리는 일등 공신이 되어버린 상황.

이런 시기에는 아무리 단장인 자신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미 잘 나가고 있는 팀에 손을 댄다?

성적을 유지해도 본전이고, 혹여나 문제라도 생긴다면 쏟아지는 언론의 비난은 매서울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정리한 이반 단장이 릭 감독의 의견을 물었다.

-...혹여나 이대로 간다고 하면 떠오르는 문제는 뭐지?

"기존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이크는 고질적인 체력 문제에 허덕일테고 후반기에 타격이 침체될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하지만?

"준의 폭발적인 타격이 그 공백을 메꿔줄 겁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현장을 컨트롤하는 릭 감독의 의견은 간단했다.

이번 계획의 핵심 원인은 제이크 포드의 고질적인 체력 문제에서 발생하는 공격력의 부재.

하지만 해준이라는 새로운 대안책이 나타난 이상, 그 부재는 메꿔질 것이라는.

그러한 말에 이반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어쩔 수 없군. 당분간 전면 보류일세. 제이크에게도 전하게. 외야 훈련 수비는 감각을 잊어먹지 않은 선에서만 이따금 이어가도록 하고.

결국 다저스는 계획을 보류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애리조나와의 3연전을 앞두고 다저스 스타디움으로 돌아온 다저스 선수단.

"미안하지만 포지션 변경 계획은 홀딩하는 편이 좋겠네."

오전부터 자신을 호출한 릭 감독은 지체하지 않고 이반 단장의 결정을 전해왔다. 스프링캠프 시절부터 감각의 유지를 위해 유격수 훈련을 따로 병행해온 해준으로서는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해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팀에 최선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해준 또한 이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작년의 다저스는 내·외야진의 불완전한 수비를 안고도 월드시리즈 우승 후보로 꼽혔을 만큼의 강팀.

그런 팀이 올 시즌 몰라보게 달라진 외야진을 구축하며 나름 안정적인 밸런스를 구축한 상태가 되었다.

이 상태를 유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라고 볼 수 도 있었다.

굳이 잘 나가는 상황에서 손을 대 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하지만 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준은 지금의 상황을 부정했다.

언론과 관계자들, 팬들은 물론이고 다저스의 프런트까지.

이들은 지금의 다저스가 이 이상 좋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지만.

"다저스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만큼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감각과 순발력, 동물 같은 본능에 유지하는 외야 수비.

그에 반해 투·포수, 그리고 타자 사이에서 흐르는 세밀함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내야는 자신의 수비를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 수준은 이들이 상상하는 수준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릭 감독은 그런 해준의 모습을 묘한 눈길과 함께 바라보았다.

KBO에서 건너온 동양인 야수.

이미 메이저리그를 뒤흔들어버린 실력을 드러낸 그였지만, 아직까지 내보이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간간이 느끼고는 했던 그였다.

릭 감독의 그런 반응에 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외야를 떠나는 것이 아까운 수비?

충분히 안정된 내야진?

이들은 지금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 한 경기라도 좋다.

그저 보여주면 된다.

한 명의 이레귤러적인 내야수가 전체의 내야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해준의 입술이 떨어지며.

"제가 유격수 글러브를 끼게 된다면..."

천천히 말이 이어졌다.

서울 세오레즈 시절.

존재 자체만으로 수비진의 레벨 그 자체를 끌어올렸던 내야의 야수.

"모든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그 진가가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