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리그 2연전, 오클랜드의 저력 (2) >
87. 인터리그 2연전, 오클랜드의 저력 (2)
"준, 너는 너무 짧은 사이에 많은 것을 보여줬어."
원탁 테이블을 빙 둘러쌓고 앉은 베테랑들.
3루수 노아 존슨과 1루수 드레이븐 래리, 그리고 2루수 루이스 화이트까지. 팀 내 최고참인 마르쿠스는 그들을 데리고 자신들의 타격전략을 재분석하는 자리를 주최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시 말해, 오클랜드가 너를 주목하고 집중 견제에 들어갈 요지가 충분했다는 말이지."
그런 자리에 해준을 참석시킨 마르쿠스가 특유의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메이저리그에서 롱런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지?"
해준은 그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매번 변하는 리그의 흐름에 적응하는 거죠.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역시 데이터 분석, 그에 따른 대응 전략의 수정과 보완이겠죠."
배트 스피드, 눈과 손의 협응 능력, 동체 시력, 반사 신경 등.
타자가 한 명의 메이저리거로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재능들.
야구라는 스포츠가 탄생하고 100년을 넘기는 오랜 세월 동안 선수들은 이런 능력들을 갈고닦기 위해 애써왔다.
하지만, 발달한 현대 과학기술이 야구에 접목되기 시작하면서 그 사정이 살짝 달라졌다.
선수들이 갈고닦을 수 있는 피지컬은 이미 인체의 한계에 도달한 기미를 보였으니까.
106마일의 공을 던질 수는 있지만, 인대와 관절이 버티지 못한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상상 이상의 괴력을 얻어낼 수 있지만, 몸은 그 폭발적인 힘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선수들은 자연스레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했다.
신체가 한계에 도달했다면, 이제는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
"물론 이전에도 이런 분석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인제 와서는 그 수준이 차원이 다르지. 듣기로는 타자의 스윙 궤적을 정밀 측정해서 0.01초 만에 그에 따른 취약 코스와 구종을 나타내는 장비까지 도입됐다더군."
해준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BatTRATracker.'
한국에서 이미 겪어본 적 있던 정밀측정 장비.
그 시절에야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큰 성장폭을 기록했던 때이니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 데이터들이 메이저리거들의 투구 능력과 결합한다면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마르쿠스가 말을 이었다.
"메이저리그에 등장하는 루키들의 활약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지. 예전에는 전반기 정도는 버텨냈다면 이제는 3개월, 2개월. 심지어 2주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해졌어. 특히나 주목도가 높은 루키의 경우 더욱 그렇지. 다시 마이너로 돌아가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야 메이저리그로 올라오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있는게 우연은 아니야."
해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트렌드가 빠르게 뒤바뀌는 메이저리그.
덕분에 이제는 유망주를 평가하는 방식조차 변화하고 있을 정도였다.
'타고난 실링은 여전히 중요하지.'
하지만 그 실링을 얼마나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활용하는가.
그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였다.
자신을 바꾸는 방법을 전혀 모른 채 그저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타자?
타석이 누적될수록 구멍이 숭숭 뚫린 난파선으로 변해가다 결국은 침몰하기 일쑤였다.
"오클랜드가 그 방식을 가장 잘 활용하는 구단이고요."
메이저리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같이 챙겨봤기에 해준으로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클랜드는 지독한 놈들이야. 오죽하면 대형 FA선수를 한 명 영입하는 대신 그 재정을 전력분석에 쏟아붓는다는 소문까지 있는 놈들이니까. 벌써 네 스윙이 보이는 코스와 구종의 취약점, 타격에 접근하는 스탠스와 마인드까지 파헤쳤을지도 모르지. 그건 비단 너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야. 이 바닥에서 오랜 세월을 버틴 베테랑들조차 오클랜드를 상대할 땐 지금처럼 타격폼이 흐트러졌는지, 대응 전략이 노출될만한 부분이 있는지 복기하니까."
그리고, 그런 마르쿠스의 예상은 정확했다.
다저스와의 2연전을 맞이하기 전.
오클랜드의 전력분석실은 이미 최신 경기 내용까지 반영하여 다저스 투수와 타자들에 대한 모든 분석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결과는?"
오클랜드의 감독 빅터 존슨은 손에 들어온 전력분석자료를 살피며 물었다. 투수 코치가 미리 봐두었던 내용을 읊어갔다.
"현재 다저스의 타자들은 더할 나위 없는 상태입니다. 노아 존슨이나 제이크 포드. 드레이븐 래리. 이 3명은 솔직히 정밀 분석에 들어가도 공략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탄탄한 타자들이죠. 루이스 화이트나 다른 베테랑들도 그렇고요."
다저스 타자 중 탑 3 플레이어를 뽑으라면 항상 고정적으로 뽑히던 이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이름들 사이에 한 이름이 추가되었다.
빅터 감독이 물었다.
"강이라는 선수는 어떻지?"
그 물음에 타격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단하더군요. KBO에서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성적을 기록하고 넘어왔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해준의 KBO시절 기록은 이미 메이저리그 관계자들 사이에도 잠시나마 화제로 떠올랐던 주제였다. 후반기에 국한됐다고는 해도 5할에 이르는 타율을 기록한 해준.
메이저리거 타자들이 넘어간다고 해도 이런 성적을 기록할 수 있을까 의문인 수준이었으니까.
"굳이 비교하자면 폴 하렌과 같은 타자입니다."
폴 하렌.
2년 전 마이너리그 싱글A 타율 0.421, 더블A 타율 0.451를 기록하며 미네소타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타자.
하지만 정작 메이저리그로 콜업 된 후의 타율은 0.131으로 처참했다. 투수 코치의 비유에 빅터 감독이 말했다.
"치즈 챔피언이란 소리군."
"그렇습니다."
치즈 챔피언.
언뜻 보면 최고처럼 보이지만, 공략할만한 약점들이 치즈 구멍처럼 송송 뚫려있는 선수를 칭하는 말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잠시나마 두각을 나타내고 사라지는 루키들은 이런 경우가 많았다.
"폴 하렌의 경우에서 증명됐다시피 하위리그에서 압도적이라고 상위리그에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죠. 오히려 특출나진 않아도 다양한 상황에 적응 할 수 있는 선수들이 살아남을 확률도 높고요."
투수 코치의 말에 빅터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점도 결국은 발휘할 순간이 와야 빛이 나는 법이니까. 파고들만 한 명확한 약점이 있는 타자들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기 힘들지."
그가 화면을 쓰윽- 넘기자, 온갖 데이터로 점철되어있던 자료가 사라지며 해준에 대한 대략적인 요약이 드러났다.
투수 코치의 설명이 이어졌다.
"예상했다시피 이 강이라는 타자는 매우 편향적인 타격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KBO 시절의 자료까지 가져와 살펴본다면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죠. 타자마다 취약 구종과 코스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이 선수는 그런 면모가 더욱 심합니다."
데이터가 말하는 점은 간단했다.
패스트볼, 써클 체인지업, 슬라이더, 스플리터에는 배리 본즈도 부럽지 않은 극강의 타자.
하지만 그 외의 구종들에 대해서는 평범함, 혹은 그 이하의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를 증명하는 데이터를 살펴보던 빅터 감독이 물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극명했다면 진작에 공략당했을 텐데?"
그 말에 투수 코치가 대답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드러나는데.. 이 선수는 어마어마한 배드볼 히팅 기질을 타고난 것으로 보입니다. 취약 구종들이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난다면 타율이 급격히 상승하니까요. 그 부분이 어느 정도 약점을 상쇄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라이크존이 아니라, 벗어나는 공에 타율이 상승한다?"
"이건 이해하기 힘든 점입니다. 그저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군요."
투수 코치의 말에 빅터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을 벗어났다 이거군."
커브에 취약점을 드러낸 타자가 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투수들은 이 커브를 어떻게 활용할까?
아무리 취약 구종이라 할지라도 대담하게 스트라이크존에 꽂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다수가 유인구로써 활용하려 들뿐.
"더군다나 KBO에서의 쌓였던 제대로 된 샘플은 후반기에 몰려있었습니다. 그 샘플이 쌓여가는 동안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보고도 있었으니... KBO의 투수들로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성장세가 완화됐다?"
"약점으로 생각되던 싱커를 제대로 쳐낸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직은 공략할 만한 약점이 많다는 것을 해두죠."
일각에서는 집요한 데이터 분석과 그에 따른 공략 방법으로 루키 학살자로 불리는 오클랜드.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낸 빅터 감독이 말했다.
"타격은 여기까지 보고.. 중견 수비가 까다롭긴 한데.. 이건 어쩔 수 없지. 최대한 풀히터들을 전면배치해서 정면돌파해보자고."
그들이 다저스의 슈퍼 루키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
4월 5일.
오클랜드의 홈구장인 알라메다 콜리시엄.
'슈퍼 루키라.'
오클랜드의 선발 투수 안토니오는 타석에 들어서고 있는 해준을 바라보았다. 애리조나에 이어 샌프란시스코마저 격파하는 주역이 되며 메이저리그의 스타로 발돋움할 기미를 보이는 다저스의 신인.
그가 타석에서 배트 헤드로 스파이크 끝을 퉁퉁- 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존에 꽃을 공은 커브. 그 외의 공들은 모두 크게 빼야하고..'
안토니오는 머릿속으로 해준의 공략법을 차근차근 정리해갔다.
일정 레벨 이하의 특정 구종에는 비상식적인 강함을 보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 외의 구종에는 큰 취약점을 내보이는 스타일.
오클랜드 전력분석원은 이미 자신의 구종과 부합 하는 최적의 코스와 패턴을 알려주었다.
그 모든 데이터를 머릿속에 암기한 채로 마운드에 올라선 안토니오. 자연스럽게 자신이 경계해야 할 사실들을 떠올렸다.
'스트라이크존에 벗어나는 공에 강한 기괴함. 그리고.. 안타를 칠수록 타구 속도가 증가한다는 소리가 있었지.'
배드볼 히팅 기질에 첫 타석에서의 결과에 따라 그 날의 타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유니크한 타입.
'좋아. 그러면 가볼까.'
투구판을 안토니오가 숨을 한차례 몰아쉬고는.
"플레이볼!"
구심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공을 꽂아 넣었다.
"..스트라이크!"
크게 떨어지며 바깥쪽 홈플레이트를 훑어간 커브.
"...스트라이크죠?"
"스쳐 갔어."
이미 콜이 나왔음에도, 한 번 더 물어본 해준은 구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날보다 다소 넓은 스트라이크존.
'자칫하다간 잡아먹히겠는걸.'
해준은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이어진 마르쿠스와의 대화.
마르쿠스는 오클랜드가 공략해올 자신의 약점을 지적했고, 그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 단점.. 뭐, 극명하긴 했지.'
KBO시절에는 전력분석원의 자료를 참고하는 투수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 데이터에 의존하기보다는 타고난 재능에 의존하는 선수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기에 해준으로서는 수월하게 상대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선수풀, 야생과 같은 환경에서 잡초처럼 살아남아 메이저리거라는 신분을 손에 쥔 선수들.
거기에 더해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한다는 동기부여까지.
노력 면에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약점을 알아낸 순간, 시체를 노리는 지독한 하이에나 무리처럼 달려든다라..'
해준은 드레이븐이 말했던 비유를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대형 스타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적은 대신, 적극적인 분석을 활용한 끈질기고 집요한 플레이를 자랑하는 오클랜드.
그런 그들이 자신의 약점을 알고도 지나칠 리가 없었다.
퍼어엉-!
"스트라이크!"
다시 한번 구심의 콜이 울렸다.
2연속 커브. 그것도 다소 넓은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을 집요하게 노려온다. 하지만 카운트가 몰렸음에도 해준은 당황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투수의 무기는 평균 92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커브, 그리고 스트레이트 체인지업.'
약점을 집요하게 노린다는 소리는, 자신의 강점 또한 잘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
'즉, 저들의 입장에서 내 약점을 공략해본다면..'
뇌 속의 수많은 시냅스가 빠르게 신호를 주고받으며 몇 가지 추측을 토해냈다.
'포심 패스트볼은 아니다. 코스, 스트라이크 유무를 가리지 않고 타율이 매우 높아. 2스트라이크에서 그런 공을 택할 리가 없지. 그렇다고 2연속 이후 체인지업? 유인구라면 내 배트에 맞을 확률이 높고 그렇다고 해서 체인지업을 스트라이크를 던질 가능성도 낮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커브구나.'
해준이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3연속 커브. 게다가 공격적으로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해온 것을 보면, 자신의 배드볼 히팅 능력 또한 경계하고 있다는 소리.
시선에 들어온 안토니오는 어느새 투구판을 박차며 있었다.
그 순간, 손끝을 떠나는 3구.
'하지만 3연속 같은 구종을 같은 코스로 넣기는 부담스럽겠지. 그렇다면..'
동시에 두둥실- 살짝 위로 뜨는 공의 궤적이 시야에 잡혔다.
'몸쪽이다!'
찰나의 순간, 구종과 코스를 확신한 해준이 재빠르게 배트를 가로로 눕혔다.
그렇게 조금 뒤.
따악-!
그라운드에 울린 짧은 타구음.
마운드에서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제기랄, 3루!"
예기치 못한 번트에 대쉬 타이밍을 놓친 안토니오.
그가 3루 선상을 타고 굴러가는 타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포수와 3루가 어중간하게 굴러간 타구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는 사이.
"세이프!"
해준이 재빠르게 1루를 통과했다.
[SINGLE!]
[타구질 분류 SOFT 판명]
[속도 61.44km/h]
[발사각도 –36.2˚]
[캐치 확률 31.5%]
[특수 모듈 - '스택형 타구 속도'가 발동합니다.]
[최대 타구 속도가 1% 증가합니다.]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홀로그램들.
그를 확인한 해준의 입가에 단단한 자신감이 깃든 미소가 떠올랐다.
수많은 루키들을 잡아먹었고, 지금도 잡아먹고 있는 메이저리그의 전력분석.
하지만 오클랜드, 심지어 같은 팀인 다저스의 선수들조차 가관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만큼 기본부터 철저하게 전력분석을 파고드는 타자가 없다는 것을.
'지금은 고작 기습 번트였지만.'
동시에, 해준의 눈동자 위로 또 다른 홀로그램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닝이 쌓여갈수록 다를 거다.'
[AA급 도박성 모듈 - '전력분석예측'에 성공하셨습니다.]
수비에서 얻어낸 도박성 모듈 '전력분석예측'.
예측에 성공한다면 구종과 코스에 대한 타율을 급격히 상승시키고, 실패한다면 급락시키는 리스크가 큰 도박성 모듈.
하지만, 이미 전력분석에 한해서는 압도적인 분석력을 가지고 해준에게 있어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예측 구종] 커브
[예측 코스] 몸쪽
[구종 예측에 성공하셨습니다! 다음 타석에 한해 커브의 타율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코스 예측에 성공하셨습니다! 다음 타석에 한해 해당 코스의 공략률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초장부터 오클랜드의 수를 꿰뚫어 본 해준의 반격.
그 조짐이 벌써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인터리그 2연전, 오클랜드의 저력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