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86화 (86/137)

< 인터리그 2연전, 오클랜드의 저력 (1) >

86. 인터리그 2연전, 오클랜드의 저력 (1)

제이크의 의중은 릭 베이츠 감독에게도 전해졌다.

"본인이 하겠다니 말릴 이유는 없지. 우리로서도 바라던 일이니까."

다저스 역대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로 불리던 제이크 포드.

하지만 코치진 중 누구도 그의 포지션 변경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말 그대로 역대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더 큰 가능성이 있잖아?"

"외야수로 옮기고 공격에 집중한다면 역대 최고의 타자로 불릴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본인에게 안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으니까. 그저 팀 내에서 가장 유격수 수비가 뛰어나니 그 포지션을 맞았을 뿐이지."

유격수를 맡는 부담에서 오는 체력 저하로 지난 몇 년간 후반기만 되면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던 제이크 포드.

그런 그가 코너 외야수로 전향한다면 공격력 면에서 득이 될 가능성이 매우 다분했다.

하지만 여기서 작은 실랑이가 생겼다.

"좌익수나 우익수가 아니라 중견수를 원한다 이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외야수 중 가장 체력적 부담이 적은 자리는 좌익수다.

하지만 오히려 중견수 자리를 탐내는 제이크.

릭 베이츠 감독은 그런 그의 의중을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의 플레이를 보고 마음을 바꾼 것이로군. 그래서 중견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야구만을 보고 야구만을 생각하는 천생 야구인 제이크 포드.

그토록 이나 구단에서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어도 묵묵부답이었던 그는 단 한 명의 선수의 플레이를 보고는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버렸다.

'그래서 중견수라..'

릭 베이츠 감독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렇게 된다면 굳이 외야수 간에 교통정리를 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저 중견수와 유격수 간의 자리를 바꾸는 것뿐이었으니까.

"좋아, 이반에게 그렇게 말해놓지."

결정이 내려졌다.

+++

3월 31일 오전.

LA다저스의 클럽하우스는 오늘도 경기를 위해 출근한 선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작년 이맘때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hey, 오늘도 애리조나를 박살내보러 가볼까?"

"아, 평소처럼 말이지?"

"그렇지. 평소처럼."

애리조나와의 경기만 다가오면 속이 느글거릴 정도로 지독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다저스.

하지만 그 상황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개막 2연승 다저스, 올해는 다르다?]

[외야에서 날뛰는 코리언 비스트! LAD 대 ARI 2차전, 다저스 쾌승.]

[전대미문, MLB를 강타한 다저스의 외야 시프트 분석.]

[다저스에 나타난 혜성 Kang, 2차전 5타수 3안타 2홈런 5타점! 애리조나를 폭격하다.]

해준의 압도적인 수비와 폭발적인 타격을 앞세워 1차전에서 애리조나를 밀어붙였던 다저스.

2차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5타점을 기록한 해준과 2선발 알렉스 스트릭랜드의 호투가 어우러지며 2연승을 거둔 것. 특히나 해준의 2경기 8타점은 역대 메이저리그 최초 2경기 타점 기록인 6타점을 훌쩍 뛰어넘은 신기록에 해당했다.

"타구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솔직히 평소라면 이렇게 생각했겠지. oh, shit. 저 빌어먹을 애리조나 녀석들이 오늘도 나를 넉다운 시키겠구나. 뭐,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그런데 말이지.."

그 덕분인지 한껏 가볍고 떠들썩한 클럽하우스의 분위기.

그 한편에서는 어제 선발로 나섰던 알렉스의 이야기가 풀어지고 있었다. 일찍이 오전에 출근하여 개인 훈련을 맞췄던 해준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제이크가 말입니까?"

구단이 제이크에게 원하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수락한 것은 의외였다.

이야기를 전해준 베테랑 3루수 노아 존슨은 어젯밤 경기의 1등 공신이었던 알렉스에게 휘익- 한차례 휘파람을 불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팀이 우선인 녀석이니까. 어렸을 때부터 주목받아온 슈퍼스타지만 생각 외로 자신에게 냉철한 녀석이야. 여태껏 유격수를 고집해 온 건 자신보다 그 포지션을 잘 소화해낼 녀석이 없어서였겠지. 하지만 이젠 다르잖아?"

그 말과 함께 노아는 특유의 건치가 드러나는 큰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깨를 툭- 한차례 건드렸다.

"준, 네가 들어왔으니.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가 된 걸 축하해."

해준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상보다 빨리 손에 넣게 된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의 주전 유격수의 자리.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조차 주전으로 한 포지션을 담당해본 기억은 없었다.

'이리저리 공백을 메꾸느라 바빴지.'

물론 앞으로도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생긴다면 상황에 따라 그 자리를 자신이 메꿔야 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주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과 아닌 것은 심리적으로 많은 차이를 불러 일으켰다.

언제 어느 포지션에 나서야 할지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에 맞춰 감각과 기술을 조정하던 나날들.

그런 일상들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는 소리였으니까.

왠지 모르게 몰려오는 감상에 해준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1루수 드레이븐 래리가 그들 사이로 글러브를 들이밀었다.

"Hey, guys. 소식 들었어. 제이크가 외야수로 넘어가기로 했다며? 그렇다면 역시 유격수 자리는 강, 네가 맡는 건가?"

과연 소식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빨랐다.

특히나 화끈한 성격과 그에 어울리는 팁으로 클러비들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드레이븐은 그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제이크는 벌써 글러브를 들고 그라운드로 나섰다고. 우리도 손발 좀 맞춰봐야 하지 않겠어?"

드레이븐의 말에 노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해당 포지션으로 출전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호흡 정도야 맞춰봐야겠지. 지금 시간에 배팅 연습을 하는 선수가 누가 있었지?"

"마르쿠스가 있을 겁니다."

"아, 그렇지. 그 양반이 있었지. 항상 이 시간엔 안보여서 가끔 까먹곤 한다니까."

해준의 대답에 드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경기인 만큼 오후 2시는 넘어서야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선수들과 달리, 마르쿠스는 그 이전에 개인적인 몸풀기를 모두 끝내놓는 독특한 루틴을 가지고 있었는데 타격 연습 또한 그 일환 중 하나였다.

"타격 연습에서 나오는 마르쿠스의 타구는 살벌하다는 건 알지? 처음 받아보면 적응이 좀 안 될지도 몰라."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드레이븐이 경고하듯 말했다.

해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유격수 수비는 오랜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잠시 뒤.

퍼어억-!

"...어, 타이밍 상 완벽한 아웃."

공을 던져주던 3루 코치 호프먼이 어벙벙한 표정으로 아웃을 선언했다. 벌써 5번이나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안타성 타구. 타석의 마르쿠스가 허탈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봐! 지금 수비 연습이 아니라 내 타격감을 아예 죽이러 온 것 같은데? 난 애리조나 타자가 아니야 친구들!"

그의 외침에 1루를 밟고 있던 드레이븐 래리 또한 자신의 글러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던 땅볼 코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그때마다 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온다.

'...뭐지? 제이크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한편 마르쿠스는 이러다 있던 타격감도 사라질 것이라며 투덜거리면 타격 세션을 조기 종료했다.

그에 드레이븐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으로 노아에게 다가갔다.

"...이게 오래만이라 잘 안되는 거라고? 저 녀석. 기준이 우리들과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노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가 유격수로 데뷔하는 날이 기다려지는군. 다시 한번 언론을 발칵 뒤집어 놓을 거야."

+++

봄의 햇빛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쌀쌀한 4월.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2경기를 제외하고, 북미 전역에서 동시에 막을 연 개막전 시리즈를 마친 메이저리그.

2020년 들어 미식축구의 아성에 도전하기 시작할 만큼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이번 시즌 또한 수많은 이슈를 뱉어내며 이맘때쯤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SEA VS OAK 3차전. 헤이세이의 괴물. 6이닝 8피안타 3볼넷 3실점 QS 기록.]

[시카고 컵스, 시작부터 난투극! 파이어리츠의 캡틴 매니 로사리오. '다음엔 만난다면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것.']

[디트로이트 선발 3인방, 3연속 완봉승! CHW 3연패 수렁.]

일본의 황금세대로 불리며 메이저리그로 넘어온 헤이세이의 괴물의 데뷔전.

사납기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와 한 번 당한 것은 잊지 않는다는 파이어리츠의 난투극.

우승을 천명하며 FA시장에서 대어급 선발 투수들을 끌어모았던 디트로이트의 경이적인 3연속 완봉 행진까지.

처음부터 사나운 폭풍우와 함께 시즌 판도를 뒤흔들기 시작한 그 흐름 속에서, 다저스는 조용히 그 반전의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라운드를 뒤흔든 다저스의 슈퍼 루키! 오프닝데이 시리즈 4홈런 OPS 1.291 폭발! 팬들이 뽑은 개막 시리즈 최우수 선수.]

[판도 자체를 뒤흔든 외야 시프트. 동양에서 넘어온 단 한 명의 야수가 시리즈를 뒤흔들다.]

[사라져버린 애리조나의 폭발력. '어느 순간부터 외야가 발버둥 칠수록 깊게 빠져드는 늪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강적 애리조나와의 시리즈를 그대로 스윕해버리며 4연승을 내달리기 시작한 다저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경악스러운 수비와 폭발적인 타격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 해준의 활약이 있었다.

-장담하지. 이 선수는 다저스 역사를 넘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중견수가 될 거야!

-이 선수가 시리즈 내내 훔쳐낸 애리조나의 안타가 도대체 몇 개 지? 5개까지 세다가 포기한 것 같은데?

-파블로가 외야로 안타를 때려내는 데 성공했을 때의 표정은 슈퍼볼에 당첨된 그것과 같았지. 고작 단순한 단타였는데도 말이야.

-MLB 사무국이 흥행을 위해서 양심마저 포기한 건가? CG로 합성해놓은 영상을 들이밀다니! 인간이 저런 수비가 가능할 리가 없잖아. 친구들 :-(

-Fuck! 우리 단장은 얼마나 썩어빠진 눈깔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런 선수를 포기한 걸까?

└썩어빠진 눈깔이 아니라 썩어빠진 재정이 문제 아니었을까?

└공평하게 둘다 썩어빠진 거로 하자고.

-다들 이 선수의 수비만을 말하지만, 타격으로 시선을 돌려 보라고 친구들. 개막 4연전에서 4개의 홈런을 때려낸 루키가 도대체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몇 명이나 되는데?

당연하게도 기사마다 메이저리그의 야구팬들의 경악스러운 반응을 담은 댓글들이 이어졌다.

4억 2000만 달러라는 전대미문의 계약을 성사시키고 넘어온 선수이긴 하지만, 그 대부분이 옵션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의심들이 이어졌던 상황.

그 속에서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해준의 퍼포먼스는 말 그대로 리그 생태계의 판도 자체를 뒤흔들어버리는 수준이었으니까.

이런 활약은 이어 벌어진 샌프란시스코와의 원정 3연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아아아악-!

[머리 높이의 하이패스트볼을 강타! 투수가 고개를 돌리지도 못합니다!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가 그대로 폴대와 충돌합니다! 벌써 시즌 5홈런을 기록하며 리그 홈런 1위를 기록하는 Kang! 루키의 매서운 폭주가 식을 줄 모릅니다!]

블랑코의 폭력적인 포심 패스트볼 대응 능력을 앞세워 샌프란시스코의 마운드를 폭격해버린 해준.

2차전에서는 SF의 1선발 에이스 펠릭스 감보아에 막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3차전에서 다시 한번 5안타 2타점을 터트리며 뜨거운 타격감을 이어간다.

도합 7경기에서 20안타 5홈런.

그 압도적인 클러치 능력과 홈런 생산 능력은 전 메이저리그 팬들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했다.

그에 더해 조용하다 싶을 만하면 나타나는 슈퍼 캐치.

퍼어어억-!

해준이 그라운드 위로 몸을 던질 때마다, 장내 캐스터의 비명성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Oooooh! 캐치! 이번에도 강의 글러브에 샌프란시스코의 안타가 삭제됩니다! 허탈한 표정과 함께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샌프란시스코의 리드오프!]

애리조나에서 선보였던 극단적인 시프트는 꺼내 들지 않았지만, 중견 수비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커버 능력을 발휘하며 외야를 지배한 해준.

그렇게 4월 4일.

해준의 활약상을 등에 업은 다저스가 샌프란과의 원정 3연전을 끝마쳤을 때는 6승 1패라는 압도적인 페이스로 시즌을 내달리고 있었다.

해준이 이어진 MVP 인터뷰를 끝마치고 원정 클럽하우스로 들어섰을 때, 그런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포수 마르쿠스가 말을 걸어왔다.

"이봐, 준. 너도 낄래?"

각자 아이패드를 들고 원탁형 테이블에 둘러싸 앉아있는 노아와 드레이븐 래리. 2루수 루이스 화이트 또한 드물게 그사이에 앉아 조용히 패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경기에서 졌을 때 복기를 하는 것과 같은 광경에 해준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그 말에 마르쿠스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상대는 오클랜드거든."

4월 5일부터 벌어지는 인터 리그 2연전.

그 첫 상대는 머니볼로 유명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였다.

"특히나 준 너에게는 까다로운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마르쿠스의 경고가 이어졌다.

"짧은 시간 내에 너무 몰아쳐 버렸거든."

< 인터리그 2연전, 오클랜드의 저력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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